해발고도 5,643m 칼라파타르를 향한 히말라야 트레킹
목표는 달성했다.
칼라파타르 정상 5,643m에 올라 에베레스트와 로체를 비롯한 잊을 수 없는 광활한 파노라마를 눈 앞에서 목격하였다. 이제 남은 건 까마득한 하산길 뿐.
원래 예정대로였다면 3일에 걸쳐서 천천히 내려가는 것이었으나, 첫날의 비행기 취소로 이틀 안에 내려가야 했다
8일에 걸쳐 올라온 이 길을 2일 만에 내려가야 한다니..
가능할까..? 할 수 있을까?
무슨 일이 있어도 해내야 한다. 가능하느냐 못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못하면 카트만두로 가는 비행기도 놓치고 한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도 놓치고 귀국하면 바로 있을 친누나의 결혼식도 참석 못한다. 설령 내려가더라도 날씨가 좋지 않으면 비행기가 뜨지 않는 상황이 있을 수 있지만 그런 건 생각 안 하기로 했다. 날씨까지는 내 능력 밖의 일이니 내가 어찌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는 것. 그게 당장 내가 해야 할 일이다.
새벽 6시.
네덜란드 친구와 함께 로부체 롯지를 나섰다.
나와 이 친구의 이론은 이러했다.
고산을 오를 때는 산소가 부족해서 천천히 갈 수밖에 없었으나, 내려갈 땐 공기 중 산소농도가 점점 짙어지니 내려갈수록 힘이 넘칠 거라는 이론.
로부체-두글라 구간, 올라가는데 약 3시간 걸렸던 길을 내려가는 데엔 약 1시간 정도밖에 걸리지 않았다.
무릎과 발목에 무리가 가기게 조금씩 느껴지기는 했지만, 역시나 하산길을 빠르다.
두글라에 오르기 전 머물렀던 마을인 딩보체를 거쳐서 내려가려면 계곡을 내려가서 다시 언덕을 올라 언덕길을 따라 딩보체를 거쳐서 다리를 건너 내려가야 했고, 다른 길로는 계곡을 내려가 다시 언덕을 오를 필요 없이 계곡을 따라 쭉 내려와서 평지를 따라 걷다가 페리체 마을을 거쳐 다리만 건너면 되었기에 더 이상의 오르막길을 오르기 싫었던 나와 네덜란드 친구는 후자를 선택했다.
그런데 이 친구가 새로운 길을 제시했다.
두글라에서 딩보체나 페리체 어느 곳도 거치지 않고, 계곡 사이로 내려간 뒤에 얼어붙은 강을 건너 반대편으로 가서 산등성이를 따라 쭉 가면 나중에 다리를 건널 필요도 없다는 아이디어였다.
이 친구의 아이디어를 따랐던 건 지금 생각해도 최악의 선택이었다.
애초에 지도에도 나와있지 않은 길이었는데, 왜 그 아이디어를 따랐을까. 그 덕에 바위와 얼어붙은 강 사이를 지나다니며 거의 한 시간 가까이를 소비했다. 길이 없으니 건너가기도 쉽지 않았고, 설령 건너가더라도 거친 덤불 사이를 지나야 했기에 뒤늦게라도 페리체로 가는 길로 합류하기 위해 돌아섰다.
아니다 싶으면 빠르게 돌아가야 한다.
그게 그 순간 가장 빠른 길이다.
햇빛은 어느새 골짜기 깊숙이 곳곳을 밝게 비추었고, 금세 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바위와 얼어붙은 강 사이를 1시간 가까이 건너려 하다 보니 무릎과 발목에 무리가 간 게 어느 정도 느껴졌다. 중간중간 3분 정도의 휴식시간을 가지며, 가던 길을 재촉했다.
오늘 목적지는 '남체 바자르'로 어제 올라갔던 칼라파타르에 비해 고도가 2km가 낮은 곳이다. 얼마나 오래 걸릴지 모르기 때문에 어디서든 오래 쉴 수가 없었다. 페리체 마을을 지나 계곡 사이에 있는 다리를 건너 언덕을 올랐다. 확실히 내려갈수록 산소가 많아짐이 느껴졌고, 지치는 게 덜했다.
너무도 맑은 날씨에 내리쬐는 햇빛 때문에 선크림을 바를까도 싶었으나, 그럴 시간에 조금이라도 더 내려가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선크림은 무조건 발라야 한다.
이날 선크림을 안 발라서 코 주위만 새까맣게 탔고 그 덕에 거의 안 씻은 듯 보이는 거지꼴로 친누나 결혼식에 참석해야만 했다.
오늘 내려가는 거리만 하더라도 6일이나 걸려 올라왔던 길을 단 하루 만에 내려가야 했고, 언제 도착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그저 계속 내려가도록 스스로 밀어붙여야 했다.
어느새 시간은 11시를 넘어섰고, 슬슬 배가 고파왔다. 그러나 보통 롯지에서의 식사는 주문하면 메뉴가 나오는 데까지는 거의 1시간이 걸릴 정도로 오래 걸리기에 여유롭게 점심을 시켜서 먹을 시간은 없었다.
'소마레'라는 마을을 지날 때, 롯지에 물어보았다.
샌드위치 만드는데 얼마나 걸려요?
빨리 만들어 주실 수 있어요?
오늘 갈 길이 멀어서...
다행히 20분 안으로 만들어주겠다는 확인을 받고서야 짐을 내려놓고 편하게 앉을 수 있었다.
이제 점심시간이라 사람들이 지나가면서 이곳에서 점심을 먹을 시간인데, 그다지 사람들이 눈에 띄지 않았다. 내가 올라갈 땐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 마을에서 점심을 먹었었기에 의아했다. 비성수기에 그나마 사람이 꽤 오는 시기에 와서 그런 것일 수도..
샌드위치 하나로 굶주린 배만 채우고 가던 길을 재촉했다. '팡보체'를 지나 절벽에 난 길을 따라 걷다가 '데보체'로 가기 위해 내리막길을 걸었다. 주변에 나무가 많은 탓인지 눈이 그대로 쌓여있었고, 꽤나 미끄러웠다.
'데보체'에서 '텡보체'라는 마을까지는 오르막 길이라, 초콜릿으로 떨어진 당 충전을 하고 출발했다.
빙판길로 된 오르막이었는데 2보 앞으로 가면 1보 뒤로 미끄러져 내려왔다. 그나마 거의 꼭대기쯤에는 '텡보체'에 있는 큰 곰파에서 나온 스님분들이 빙판 위에 흙을 흩뿌리고 계셨고 그 덕에 마지막 20분 정도 올라올 때는 비교적 쉽게 올라올 수 있었다.
'텡보체'에 올라서니, 사방이 구름으로 자욱하게 깔리기 시작했다. 아까의 맑은 날씨는 거짓말같이 사라졌다. 표지판을 보니 '남체 바자르' 까지는 4시간을 더 가야 한다고 나와있다.
후우.. 좋아! 거의 다 왔다!!
어떻게든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해선 이렇게라도 자기 합리화와 자기 최면을 걸어야 했다.
어제 칼라파타르 정상에 비해서는 고도가 1.5km씩이나 낮으니 아무리 이곳이 해발고도가 3,900m 라 할지라도 산소가 너무도 풍부하게 느껴졌다.
텡보체에서 약 1시간가량 미친 듯이 내리막길을 걸었다. 무릎이고 발목이고 피로가 쌓일 만큼 쌓였고, 어깨에 짊어진 배낭은 어깨를 더욱 무겁게 짓누르는 듯했다. 몇 번이고 발목을 접질릴 뻔했으나 다행히 등산스틱이 있었기에 발목이나 무릎 부상 없이 무사히 내려올 수 있었다.
말없이 길을 따라 내려오고 올라가고를 반복하다가 슬슬 목적지인 '남체 바자르'에 가까워지고 있음이 느껴졌다. 남체 바자르에서 멀지 않은 절벽길을 따라 걸었고 사방이 구름에 휩싸여 주변이 전혀 보이질 않았다.
오전까지의 맑았던 하늘이 거짓말처럼 그 자취를 감추었다. 어디서부턴가 합류해서 같이 하산길을 내려가기 시작한 개 한 마리는 우리 앞을 항상 앞서가며, ‘남체 바자르’까지 길잡이 역할을 해주었다. 정확히 오후 5시가 돼서야 ‘남체 바자르’ 마을에 도착했다. 해발고도 4,900미터 ‘로부체’에서 약 11시간이 걸렸다.
부들거리는 다리로 롯지에 들어와 체크인을 했고, 침대 위에 그대로 쓰러져 잠이 들었다. 정말 6일을 걸려 올라갔던 길을 하루 만에 내려왔다.
다음날 아침 7시.
여유롭게 일어나 아침식사를 하고 천천히 출발했다. 오늘은 공항이 있는 루클라까지 갈 예정으로, 2일 걸렸던 거리를 오늘 하루 동안 가야 한다. 그래도 어제에 비하면 절반 정도 되는 거리라, 그다지 부담이 되진 않았다.
어제 쌓였던 피로는 몸에 아직 그대로 남아있었으나, 오늘이 마지막이라는 기대감과 설렘은 그것을 잊게 해주는 진통제가 되어주었다.
네덜란드 친구와 하산을 하면서 카트만두에 가면 무엇을 할지 이야기했는데 한마음으로 의견이 일치했다. 카트만두에 도착하자마자 좋은 호텔에 체크인을 하고, 따뜻한 물에 한 30분 정도 샤워를 하면서 머리는 3번 정도 감고 깨끗한 속옷과 옷들을 입고 침대에서 푹 쉬다가 저녁쯤에 KFC에 가서 치킨을 왕창 사다가 영화를 보는 완벽한 계획을 세웠다. 아직은 마냥 꿈처럼 느껴지는 계획들.
과연 무사히 그 꿈을 이룰 수 있을까?
마을을 벗어나는 길목에 수십 마리의 당나귀들이 길을 점거하고 있었다. 빼곡히 서있는 당나귀들 사이를 지나가는데 혹시나 절벽 쪽으로 밀지는 않을까 약간의 불안감이 엄습했으나 다행히 그런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히말라야 EBC 트레킹을 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구간을 꼽자면, 남체로 올라가는 길을 꼽을 것이다. 고도 2,600미터에서 3,400미터까지 높이는 구간인데 지금 생각하면 그다지 높은 고도는 아니다. 다만 그 당시 굉장히 배가 고파서 힘도 없었거니와 예상과 달리 너무도 가파른 경사와 끝이 안 보이는 오르막, 도무지 나타날 생각을 하지 않는 ‘남체 바자르’는 정말 지치게 만들었다.
내려가는 길 역시 가파르기 때문에 쉽지 않았으나 올라갈 때와는 정반대로 체력적으로 힘들지는 않아서 금세 내려올 수 있었다. 2시간 넘게 걸려 올라갔던 비탈길을 30분 만에 내려왔다.
우리와는 반대로 수많은 포터들이 각자 등 뒤에 짐들을 짊어메고 남체로 향하고 있었다. 트레커들의 짐을 들어주는 포터들이 아닌 생필품들을 마을로 조달하는 포터들이었다. 그들은 보다 더 큰 짐들을 지니고 있었고, 심지어 어떤 이들은 쇳덩이들을 짊어지고 올라가고 있었다. 이 정도의 노동강도라면 그에 합당한 임금이 주어져야 마땅하지만, 안타깝게도 세상은 그리 공평하지 않았다.
세상을 여행하면서 세상의 불공평함을 많이 봐왔다. 낭만으로 가득할 줄 알았던 곳 조차 낭만으로만 채워져 있지는 않았다. 내가 누리는 자유, 하고 싶은 일들, 이루고 싶은 꿈들, 나를 불안하게 하는 걱정거리들. 우리에겐 당연하게 느껴지는 일상들은 누군가에게는 가져볼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음을. 그렇기에 우리는 운이 좋았음을 이 나라에 태어난 것에, 자유를 갖고 태어난 것에, 노력을 하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는 기회가 있음에 그 모든 것에...
조르살레까지 내려온 우리는 루클라까지 약 4시간을 더 가야 했다.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의 수많은 반복 끝에 해가 지기 전에 겨우 루클라에 도착할 수 있었다.
날씨도 좋고, 날씨 예보상 내일도 날씨가 좋기에 이변이 없는 이상 카트만두로 가는 비행기는 예정대로 운행될 것이다.
우려했던 고산병도 미미하게 스쳐 지나갔고, 다친 곳 없이 목표 지점이었던 칼라파타르 정상에 올라 무사히 하산까지 마쳤다. 생각보다 추웠고 혹독했기에, 중간에 하산할지 고민도 했기에 무사히 하산까지 마쳤을 때의 그 기쁨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이제 내일 경비행기를 타고 이곳에서 벗어나기만 하면 된다. 나 자신을 위한 선물로 하루 정도는 좋은 호텔에서 먹고 싶은 음식을 먹으며 휴식을 취하는 걸로 주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