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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자 이순신 (오늘자 난중일기 번외편)

by 이순신서점

1. 이순신은 효자였습니다. 그는 난중일기에 어머니에 관한 일기를 100여편 남겼습니다.


2. 전쟁 초기에는 설날이나, 생신때 어머니를 뵙지 못해 슬프고, 죄송하다는 말을 자주 합니다.


3. 이순신은 어머니가 병에 걸린 것을 걱정하고, 귤, 유자, 송어, 어란과 같은 귀한 음식을 보내드리며 어머니가 건강하길 바라는 평범한 아들이었습니다.


4. 본인이 흰머리를 뽑는 이유는 보기 싫어서가 아니라, 위로 어머니가 계시기 때문이라 하고, 어머니가 80살이 되어서는 잔치를 크게 열고, 오래 오래 사신 것을 축하합니다.


5. 이순신 어머니 초계변씨는 강한 어머니였습니다. 아들이 걱정할까봐, 헤어질때도 전혀 서운하다는 표정을 짓지 않았고, “나라의 욕됨을 속히 씻어라.” 라며 오히려 이순신을 격려해주었습니다.


6. 운명의 장난인지, 팔순 잔치 다음해에 이순신은 백의종군을 하게 되고, 옥에 갇힌 자신을 보기 위해 배를 타고 올라오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7. 이 소식을 들은 이순신은 방을 뛰쳐나가 슬퍼 뛰며 뒹굴었습니다. 이후 백의종군을 하면서는 어머니 영위를 떠나 곡도 마음대로 못하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면서, 무슨 죄 때문에 이런 앙갚음을 당하는지 자문하며 세상을 원망했습니다.


8. 다시 통제사에 복귀하여 노량에서 전사할때 까지 이순신은 참 많이 울었습니다. 어머니 생신날에는 슬프고 애통함을 참을 길이 없어 닭이 울 무렵 일어나 앉아 눈물만 흘렸습니다. 명량해전을 앞두고는 달 밝은 날에 어머니를 그리며 울다가 밤이 깊도록 잠들지 못했습니다. 때로는 혼자 배 위에 앉아서 어머니를 생각하며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습니다.


9. 난중일기 속 이순신은 저와 같은 평범한 아들/딸이었습니다. 어머니와 함께하고, 오래 오래 건강하게 사시길 바랬습니다. 그러나 세상을 잘못만나 이런 평범한 바램은 이뤄지질 못했습니다. 자기 때문에 좀 더 사실수 있는 어머니가 돌아가신건 아닌지 자책했을지도 모릅니다.


10. 북방에 근무할때 이순신의 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이순신의 두 형은 어린 조카들을 남겨두고 먼저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이순신과 어머니는 서로에게 더 의지했을 것입니다.


10. 저 세상에서나마 이순신이 어머니와 다시 만나, 함께 행복하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참고: 난중일기 속 어머니 관련 이야기


1592년 1월 1일


맑다. 새벽에 아우 우신禹臣과 조카 봉挹과 아들 회諠가 와서 같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다만 어머니 곁을 떠나서 두 해째 남쪽에서 설을 쇠자니 슬픔이 북받쳐 온다. 전라 병사兵使의 군관 이경신李敬信이 병사의 편지와 설 선물과 장편전長片箭 그리고 여러 가지 물건을 가져와 바쳤다.


1593년 5월 4일


맑다. 오늘이 어머니 생신이지만 적을 토벌하는 일 때문에, 가서 오래 사시기를 축수하는 술잔을 올리지 못하니 평생의 한이다. 우수사, 군관과 진해루에서 활을 쏘았다. 순천 부사도 모여서 군사 일을 약속하였다.


1593년 6월 12일


비가 오락가락하였다. 아침에 흰 머리털 여남은 오라기를 뽑았다. 흰 머리카락이 있다고 하여 어찌 싫어할 일이겠냐만 위로 늙으신 어머니가 계시기 때문에 뽑은 것이다. 하루 내내 혼자 앉아 있었다. 사량 만호가 다녀갔다. 밤 10시쯤 변존서와 김양간金良幹이 들어왔다. 행궁行宮 기별을 들으니 동궁|왕세자 광해군|이 편찮다고 한다. 걱정스럽기 짝이 없다. 유 정승|유성룡|과 지사 윤우신尹又新의 편지도 왔다. 종 갓동과 철매哲每가 병으로 죽었다 하니 참 가엾다. 해당海撞이란 중도 찾아왔다. 밤에 원균의 군관이 와서 명나라 병사 다섯이 들어왔다고 전했다.


1594년 1월 11일


흐렸으나 비는 오지 않았다. 아침에 어머니를 뵈러 배를 탔다. 바람을 따라 바로 고음천에 도착하였다. 남의길, 윤사행尹士行, 조카 분芬도 같이 갔다. 어머니를 뵈러 들어갔더니 아직 주무시고 계셨다. 큰 소리로 부르니 놀라 깨어서 일어나셨는데, 기운이 가물가물하시고 살아 계실 날이 얼마 남지 않으신 듯했다. 하릴없이 눈물만 흘러내렸다. 그러나 말씀하시는 것은 조금도 어긋남이 없으셨다. 왜적을 물리칠 일이 급하여 오래 머무르지 못했다. 밤에 손수약孫守約의 처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1594년 1월 12일


맑다. 아침을 먹은 뒤 어머니께 돌아가겠다는 말씀을 드렸더니 “잘 가서 나라의 욕됨을 속히 씻어라.” 하고 말씀하시며 몇 번이고 거듭 타이르셨다. 헤어지는 데 대하여서는 조금도 슬픔을 나타내지 않으셨다. 선창에 되돌아오니 몸이 불편하여 바로 뒷방으로 들어갔다.


1595년 1월 1일


맑다. 촛불을 밝히고 혼자 앉아서 나랏일을 생각하니 저절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또 팔순의 병든 어머니를 생각하며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이른 아침부터 여러 장수들과 군사들이 찾아와서 새해 인사를 하였다. 원전元琠, 윤언심尹彦諶, 고경운 등이 보러 왔다. 각 급의 군사들에게 술을 먹였다.


1595년 5월 4일


맑다. 오늘은 어머니 생신이다. 직접 잔을 올리지 못하고 먼 바다에 홀로 앉아 있으니 가슴속에 품은 생각을 어떻게 다 말할 수 있으랴! 늦게 활을 15순 쏘았다. 해남 현감이 보고하고 돌아갔다. 아들의 편지를 보니, 요동의 왕작덕王爵德이 왕씨王氏 후손으로서 군사를 일으키려 한다고 하였다. 참으로 놀랍다.


1595년 6월 9일


맑다. 기분이 여전히 개운하지 않아서 매우 걱정스러웠다. 신 조방장과 사도 첨사, 방답 첨사와 편을 갈라 활쏘기를 하였는데 신 조방장 쪽이 이겼다. 저녁에 원수의 군관 이희삼李希參이 왕의 분부를 가지고 왔는데 조형도가 수군 한 사람에게 매일 양식 5홉, 물 7홉씩을 나눠 준다고 거짓 보고를 하였다. 세상일이란 정말 놀랍다. 세상에 어찌 이런 거짓이 있을 수 있을까? 저물녘에 탐색선이 들어왔는데 어머니께서 이질에 걸리셨다 한다. 걱정스럽다.


1596년 5월 4일


맑다. 오늘은 어머니의 생신인데 술 한 잔 올리지 못하여 마음이 불편하였다. 공무를 보러 나가지 않았다. 오후에는 우수사가 집무 하는 공관에 불이 나서 모두 타 버렸다. 저녁에 문촌공文村公이 부요富饒에서 왔다. 조종趙琮이 쓴 편지를 가지고 왔는데 조정趙玎이 4월 초1일에 세상을 떠났다고 하였다. 매우 슬프고 애석하였다. 우후가 앞산에서 여제顴祭를 지내기로 하였다.


1596년 5월 18일


비가 잠깐 개기는 하였으나 바다의 안개는 걷히지 않았다. 체찰사에게서 공문이 왔다. 늦게 경상 수사가 보러 왔다. 관청에 나갔다가 활을 쏘았다. 저녁에 탐색선이 들어왔는데 어머니께서는 안녕하시지만 음식을 전처럼 잡수시지 못한다고 하니 매우 답답하고 눈물이 핑 돌았다. 춘절春節이 누비옷을 가지고 왔다.


1596년 8월 12일


맑다. 하루 내내 노를 빨리 저어 밤 10시쯤 어머니가 계신 곳에 당도하였다. 백발이 성성한 채 나를 보고 놀라 일어나시는데, 숨이 끊어지는 듯하시는 모습이 하루하루를 지탱하시기도 어려운 듯하다. 눈물을 머금고 서로 붙들고 앉아서 밤새 위로하여 어머니의 마음을 풀어 드렸다.


1596년 8월 13일


맑다. 어머니를 모시고 옆에 앉아 아침 진지를 올리니 대단히 즐거워하시는 빛이었다. 늦게 작별 인사를 드리고 본영으로 돌아왔다. 오후 6시쯤 작은 배를 타고 밤새 노를 재촉하였다.


1596년 10월 7일


맑고 따스하였다. 아침 일찍 어머니를 위해 수연壽宴을 베풀면서 하루 내내 매우 즐겁게 보냈다. 매우 다행스러웠다. 남해 현령은 선대의 제삿날이어서 먼저 돌아갔다.


1597년 4월 13일


맑다. 일찍 아침을 먹고 어머니를 마중하려고 바닷가로 가는 길에 홍 찰방 집에 들렀다. 잠깐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울이 종 애수愛壽를 보내어, 아직 배가 도착하였다는 소식이 없다고 전하였다. 황천상이 술을 가지고 흥백의 집에 왔다고 하여 홍 찰방과 헤어져서 흥백의 집에 갔다. 조금 있자니 배에서 달려온 종 순화順和가 어머님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전했다. 방을 뛰쳐나가 슬퍼 뛰며 뒹굴었더니 하늘에 솟아 있는 해조차 캄캄하였다. 곧 해암으로 달려가니 배가 벌써 와 있었다. 길에서 바라보니 슬픔으로 가슴이 찢어지는 듯하여 모두 다 적을 수가 없다. 뒷날 대강 적으리라.


1597년 4월 15일


맑다. 늦게 어머니의 시신을 관 속에 모셨다. 친한 오종수가 맡아서 정성껏 해 주니 뼈가 가루가 되어도 잊기 어렵다. 관에 대해서는 조금도 못마땅한 점이 없으니 이는 다행이다. 천안 군수가 들어와서 상여를 준비하였다. 전경복全慶福이 매일같이 정성을 다해서 상복 만드는 일들을 돌봐 주니 슬픈 가운데도 감사하여 무슨 말을 할 것인가.


1597년 4월 4일


비 오다. 어머니 생신이다. 슬프고 애통함을 참을 길이 없었다. 닭이 울 무렵에 일어나 앉아 눈물만 흘렸다. 오후에 비가 몹시 퍼부었다. 정사준이 와서 하루 내내 돌아가지 않았다. 이수원도 왔다.


1597년 5월 5일


맑다. 새벽 꿈이 매우 어지러웠다. 아침에 부사가 보러 왔다. 늦게 충청 우후 원유남이 한산도에서 왔는데 원균이 못된 짓을 많이 한다고 했다. 또 진중의 장졸들이 다 그를 따르지 않으므로 앞일을 예측하기 어렵다고 했다. 오늘은 단오인데, 천리 밖 먼 곳으로 어머니 영위를 떠나 종군하고 있어서 예를 못 드리고 곡도 마음대로 못하니 무슨 죄 때문에 이런 앙갚음을 당하는가? 나와 같은 사정은 고금을 통해 찾아보기 힘든 일이니 가슴이 찢어지는 듯 아프다. 다만 때를 못 만난 것을 한탄할 따름이다.


1597년 6월 26일


맑다. 새벽에 순천의 종 윤복允福이 나타났기에 곧 곤장 50대를 때렸다. 거제에서 온 사람이 돌아갔다. 늦게 중군장 이덕필과 변흥달, 심준 등이 보러 왔다. 황 종사관이 개벼루 강가의 정자에 나왔다가 돌아갔다. 어응린魚應燐, 박몽삼朴夢參 등이 보러 왔다. 아산에 있는 종 평세平世가 들어와서 어머님 영위가 평안하시고 여러 집 위아래가 모두 무사하다고 하였다. 다만 석 달이나 가물어 농사는 끝장나서 더 이상 가망이 없다고 한다. 장삿날은 7월 27일로 했다가 다시 8월 초4일로 잡았다고 한다. 어머니가 그리워서 가슴 아픈 것을 어찌 다 말로 할 수 있을 것인가. 저녁에 우병사가 체찰사에게 “아산 이방과 청주 이희남이 복병하기가 싫어서 원수의 진 옆에 피해 있습니다.”라고 보고하여 체찰사가 원수에게 공문을 보냈다. 원수는 크게 화를 내어 또 공문을 만들어 보냈는데, 병사 김응서의 속뜻은 알 수가 없다. 작은 워라말이 죽어서 내다 버렸다.


1597년 7월 9일


맑다. 내일 열을 아산으로 보내려고 제사에 쓸 과일을 챙겨서 봉하였다. 늦게 윤감, 문보 등이 술을 가지고 와서 열과 주부 변존서에게 이별주를 권하고 돌아갔다. 밤에는 달빛이 대낮같이 밝아서 어머니를 그리는 슬픔으로 울다가 밤이 깊도록 잠들지 못하였다.


1597년 9월 11일


날씨가 흐리고 비가 올 것 같았다. 혼자 배 위에 앉아서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에 눈물을 흘렸다. 이 세상에 나와 같이 외로운 사람이 또 어디 있으랴. 아들 회는 내 심정을 알고 무척 언짢아하였다.


출처: 난중일기, 이순신 지음, 송찬석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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