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이들은 춥고, 배고프고, 과중한 노역에 시달려 투항하였다고 합니다. 난중일기에서도 비슷한 대목이 나옵니다. 이순신이 항복한 까닭을 물으니, 왜인들은 장수가 성질이 포악하고 일도 너무 고됐기 때문에 도망 나왔다고 답합니다.
3. 난중일기에 등장하는 항왜는 야여문, 망기시로, 산소, 여문련기, 야시로, 난여문, 사고여음, 신시로, 준사 등입니다. 이들 개인에 대한 정보는 거의 없으나, 몇몇은 시마즈의 부하, 가토의 부하라고 적혀있습니다.
4. 일기 내용 대부분은 항왜들이 도망갔다거나, 도망 갔다가 잡혀와서 처형되거나, 도망간 왜인이 제발로 돌아왔다는 등 탈출한 왜인들에 관한 것입니다.
5. 이중 대부분은 대청에 흙을 바라는 일에 동원되거나, 광대놀음을 하는 등 전투와는 상관이 없는 일을 했던 것 같습니다. 영화 '명량'에 등장하는 '준사'만이 전투에 참가한 기록이 있습니다.
6. 난중일기 기록에 따르면, 준사는 명량해전 때 대장선에 타 있다가 붉은 비단옷을 입은 자가 적장 구루시마라고 이순신에서 알려줍니다. 이순신은 김돌손을 시켜 구루시마를 낚아 올려 토막토막 잘라서 내 걸었습니다. 이걸 본 왜적의 기세가 크게 꺾였다고 이순신은 일기에 남겼습니다.
7. 준사와 같이 전투에 참여한 항왜 뿐만 아니라 조선의 조총제작 등 무기기술 발전에 기여한 왜인들도 있었습니다. 공로가 큰 자들은 성과 이름, 관직을 받기도 했습니다(수직왜인).
8. 7년 전쟁이 끝나고 나서, 항왜들 중 일부는 북방에 군인으로 배치되고, 일부는 병자호란에 참전하기도 합니다. 전쟁이 싫어 투항한 왜인들이 남의 나라에서 다시 한번 큰 전쟁을 치루게 되니, 인생은 아이러니라고 할수밖에 없습니다.
난중일기속 항왜 관련 기록
1595년 4월 24일
맑다. 이른 아침에 울과 뇌, 완을 어머니 생신에 음식을 차려 드리도록 내보냈다. 정오쯤에 강천석姜千石이 달려와 보고하기를, 도망한 왜군 망기시로望己時老가 무성한 풀 가운데 엎드려 있다가 붙잡혔고, 왜군 하나는 물에 빠져 죽었다고 하였다. 망기시로를 곧바로 끌고 오도록 하고 3도 수군에 나누어 맡겼던, 항복한 왜인을 모두 불러 모아 곧바로 목을 베도록 하였다. 망기시로가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이 죽으러 나왔다. 참 지독한 놈이었다.
1595년 5월 21일
흐리다. 오늘은 반드시 본영 사람이 도착할 텐데, 아직 어머니의 안부를 모르니 매우 걱정이 되었다. 종 옥이玉伊와 무재武才를 본영에 보냈다. 절인 어물과 송어, 어란 등을 어머니께 보냈다. 아침에 나가 공무를 보고 있자니 항복한 왜인들이 와서, 동료 왜인 산소山素가 아주 흉악한 일을 하므로 베어 죽이겠다고 하였다. 그렇게 하도록 하였다. 활을 20순 쏘았다.
1595년 10월 13일
맑다. 일찍 새로 만든 수루에 올라갔다. 대청에 흙을 올려 발랐다. 항복한 왜인에게 작업을 끝내도록 하였다. 송홍득이 군관을 따라갔다.
1595년 11월 16일
맑다. 항복한 왜적 여문련기汝文戀己, 야시로也時老 등이 와서 왜인들이 도망치려 한다고 보고하였다. 우후에게 잡아 오도록 하여 그 가운데 주모자 준시俊時 등 두 명을 찾아내어 목을 베었다. 경상 수사와 우후, 웅천 현감, 방답 첨사, 남도 만호, 어란 만호, 녹도 만호 등이 왔는데, 녹도 만호는 내보냈다.
1595년 11월 19일
맑다. 아침 일찍 도망한 왜인이 자기 발로 돌아왔다. 밤 10시쯤 분, 봉, 해, 회가 들어왔는데 어머니가 평안하시다고 하였다. 다행스러웠다. 하응문이 돌아갔다.
1595년 11월 25일
맑다. 아침밥을 먹은 뒤 곡포 권관으로부터 공식 인사를 받았다. 늦게 경상 우후가 와서, 항복한 왜인 여덟 명이 가덕도에서 나왔다고 전하였다. 웅천 현감과 우우후, 남도 만호, 방답 첨사, 당포 만호가 보러 왔다. 조카 분과 밤 10시까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1595년 11월 26일
아침에 흐리다가 저녁에 맑았다. 아침밥을 먹은 뒤 나가서 공무를 보았다. 광양 도훈도가 복병 나가서 도망친 자들을 잡아 와 죄를 주었다. 점심 때 경상 수사가 왔다. 항복한 왜인 여덟 명과 그들을 데리고 온 김탁金卓 등 두 명도 같이 왔기에 술을 먹었다. 김탁 등에게는 각각 무명 한 필씩 주어 보냈다. 저녁에 유척柳滌, 임영林英 등이 왔다.
1596년 1월 8일
맑다. 입춘立春인데도 날씨가 몹시 차가워서 한겨울같이 매웠다. 아침에 우우후와 방답 첨사를 불러서 약식藥食을 같이 먹었다. 아침 일찍 항복한 왜인 다섯 명이 들어왔다. 항복한 까닭을 물으니 저희 장수의 성질이 포악하고 일도 너무 고됐기 때문에 도망 나와서 항복했다고 하였다. 그들이 가진 크고 작은 칼을 거두어 수루 위에 간직하였다. 그런데 이들은 실제로 부산에 있는 왜적이 아니고 가덕도에 있는 심안둔沈安屯의 부하라고 하였다.
1596년 1월 15일
맑고 따뜻하였다. 날이 샐 무렵에 망궐례를 드렸다. 낙안, 흥양 현감을 불러 같이 아침을 먹었다. 늦게 대청에 나가 공문을 처리한 다음 항복한 왜인들에게 술과 음식을 먹였다. 낙안과 흥양에 속한 배와 병기, 부속물과 사부, 격군들을 점검하였더니 낙안이 훨씬 엉성하였다. 저녁 달빛이 더욱 맑았다. 풍년이 들 징조라고 한다.
1596년 2월 15일
새벽에 망궐례를 드리려 했는데 비가 부슬거리고 마당이 젖어서 거행하지 못했다. 어두울 무렵에 들으니 전라우도의 항복한 왜인들이 경상도의 왜인들과 짜고서 도망할 계획을 꾸민다고 하므로 전령을 보내어 그쪽에 통지하였다. 아침에 화살대를 골라내어 큰 화살대 1백 11개와 그 다음으로 큰 화살대 1백 54개를 옥지玉只에게 내주었다. 아침에 장계 초안을 수정했다. 늦게 나갔더니 웅천 현감, 거제 현령, 당포 만호, 옥포 만호, 우우후, 경상 우후 등이 보러 왔다가 돌아갔다. 순천의 둔전에서 추수한 벼를 내가 직접 보는 데서 받아들이게 했다. 동복 유사 김덕린, 흥양 유사 송상문 등이 돌아갔다. 저녁 때 사슴 한 마리와 노루 두 마리를 사냥해 가지고 왔다. 밤에는 달빛이 대낮처럼 밝고 물결 빛은 비단결 같아서 자려고 누워도 잠이 오지 않았다. 사람들은 밤새도록 술이 취해서 노래들을 불렀다.
1596년 2월 19일
맑았으나 바람이 세게 불었다. 아들 면이 잘 갔는지 몰라서 밤새도록 궁금하였다. 저녁 때 들으니 군량을 싣고 오던 낙안 배가 바람에 막혀 사량에 대었는데 바람이 잠잠해야 배를 출발시킬 것이라고 한다. 새벽에 이곳의 왜인 난여문亂汝文 등을 시켜 경상도 진에 있는, 항복한 왜인들을 붙잡아다가 목을 자르게 하였다. 권 수사가 왔다. 장흥 부사, 웅천 현감, 낙안 군수, 흥양 현감, 우우후, 사천 현감 등과 함께 부안에서 보내 온 술을 마셨다. 황득중이 총통 만들 쇠를 가져왔는데 모두 저울로 무게를 달아서 보관하게 하였다.
1596년 4월 29일
맑다. 저녁에 목욕을 한 차례 하였다. 남여문으로 하여금 항복한 왜인 사고여음沙古汝音의 목을 베게 하였다.
1596년 6월 24일
초복이다. 맑다. 일찍 나가서 충청 우후와 활 15순을 쏘았는데, 경상 수사도 와서 같이 쏘았다. 남해 현령은 자기 현으로 돌아갔다. 항복한 왜인 야여문 등이 같은 왜인인 신시로信是老를 죽이자고 청하기에 그렇게 하도록 명령하였다. 남원 부사 김굉이 군량을 축낸 데 대한 일을 조사하려고 이리로 왔다.
1596년 7월 13일
맑다. 명나라 사신을 모시고 따라갈 사람들이 탈 배 세 척을 정비하여 오전 10시에 띄워 보냈다. 늦게 활 13순을 쏘았다. 해가 진 뒤에 항복한 왜인들이 광대놀이를 벌였다. 장수 된 사람으로서는 그냥 두고 볼 일은 아니었지만 그들이 마당놀음 한 번 하기를 간절히 바라므로 금하지 않았다.
1596년 7월 3일
맑다. 새벽에 앉아 있으니 싸늘한 기운이 뼛속까지 스며든다. 비통한 마음이 갈수록 더하였다. 제사에 쓸 유과와 찹쌀가루를 장만하였다. 늦게 정읍 군사 이량李良, 최언환崔彦還, 건손巾孫 등 세 명을 심부름꾼으로 쓰라고 보내왔다. 늦게 장준완蔣俊琬이 남해에서 보러 왔는데 남해 현감의 병이 심하다고 전하였다. 몹시 근심스러웠다. 이윽고 합천 군수 오운吳澐이 보러 와서 산성에 관하여 많이 이야기하였다. 점심을 먹은 뒤 원수 진영에 가서 황 종사관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종사관은 전적典籍 박안의朴安義와 활쏘기를 하였다. 이때 좌병사가 그 군관을 시켜 항복한 왜인 두 명을 묶어 보냈는데, 가등청정의 부하라고 하였다. 저물녘에 돌아왔는데 고령 현감이 성주에 갇혔다는 소식을 들었다.
1596년 9월 16일
왜인 준사俊沙는 이전에 안골포의 적진에서 항복해 온 자인데, 내 배 위에 있다가 바다에 빠져 있는 적을 굽어보더니 “그림 무늬 놓은 붉은 비단옷을 입은 자가 바로 안골진에 있던 적장 마다시馬多時입니다.” 하고 말했다. 내가 물 긷는 군사 김돌손金乭孫을 시켜 갈구리로 낚아 올렸더니, 준사가 펄쩍 뛰면서 “정말 마다시입니다.” 하고 말하였다. 곧바로 명령을 내려 토막토막 잘랐더니 적의 기세가 크게 꺾였다.
참고: 임진란 시기 항왜의 투항 배경과 역할, 한문종, 전북대학교
임진란 중에 조선에 투항한 倭兵을 降倭라 칭하였다. 항왜의 발생배경은 식량의 부족, 과중한 노역과 혹독한 추위로 인한 병사들의 고통, 오랜 전쟁으로 인한 전쟁 기피 등이 조선의 항왜 우대책과 결부되어 있었다.
임진란 시기의 항왜는 1593년 5월경에 처음으로 나타났으며, 1594년 明軍의 철수를 계기로 조선이 적극적으로 항왜를 유치하면서 급증하였다. 그 후 明․日간의 강화교섭이 진행되면서 왜병의 투항이 주춤하였으나, 丁酉再亂이 일어나면서 다시 증가하였다. 한편, 임진란 시기 항왜의 수는 최대 1만명에서 최소 1천명에 이르렀을 것으로 추정된다.
明軍에 투항한 항왜는 遼東으로 압송되었으며, 이러한 前例에 따라 조선군에 투항해 온 항왜도 요동으로 압송하였다. 그러나 명의 주력부대가 철수하면서 항왜를 요동으로 보내지 않고 경상도 내륙지방에 分置하였다. 그 후 각 지방의 식량문제와 분란의 발생을 우려하여 항왜를 함경도․황해도․강원도․충청도 등지의 군현이나 섬으로 이송하고 거주지 밖으로의 출입을 제한하였다.
한편 조선에서는 항왜 중에서 총검의 제조나 화약의 제조법, 그리고 검술이 뛰어난 자에게 官職을 제수하여 서울에 거주하게 하고, 그 나머지는 내륙지방 또는 兩界地方에 移置하였다. 그러나 양계지방에서는 항왜의 수가 많아지자 지방 재정의 부족을 우려하여 항왜의 入送을 기피하였다.
임진란 시기의 항왜는 일본군과의 싸움에 참여하는 한편 胡狄을 방어하는데도 활용되었다. 또한 이들은 조총의 제조와 사용법, 화약의 제조법 등의 기술을 조선에 전수해주었다. 이는 조선의 무기제조 기술을 발전시키는데 크게 기여하였으며, 나아가 임진란을 종식시키는데도 일조하였다.
임진란 시기의 항왜 중에는 조선의 관직을 제수받은 수직왜인이 있었다. 그 중에는 조선으로부터 성과 이름을 하사받은 자도 있었으며, 임진란이 끝난 이후 일본으로 돌아가 다시 수직왜인이 되어 조선에 도항한 자들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