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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순신서점 Feb 11. 2023

이순신의 꿈해몽 (오늘자 난중일기 번외편)

1. 오늘은 이순신이 꾼 꿈과 꿈 해몽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2. 몸이 허하거나, 마음이 괴로우면 깊은 잠을 자지 못하고, 꿈을 많이 꾼다고 합니다. 이순신은 어깨에 총탄을 맞았고, 백의종군을 했으며, 어머니와 아들(면)이 세상을 떠나면서 몸과 마음이 모두 지쳤습니다. 그래서 늦게 까지 잠을 못 이루고, 새벽녘에 잠을 깨거나, 꿈을 많이 꿨습니다.


3. 전쟁 초기 이순신은 왜적을 물리치는 꿈을 많이 꿉니다. 그가 얼마나 이 전쟁을 빨리 끝고 싶어했고, 왜적을 물리치는데 진심이었는지 그의 꿈 이야기를 보면 알수 있습니다.


“바다 가운데 외딴섬이 달려와 눈앞에 주춤 서는데 그 소리가 우레와 같았고, 모두들 놀라 사방으로 달아났지만 나만은 홀로 서서 그 광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았다. 이것은 왜놈이 화평을 구걸하다가 스스로 멸망할 징조”

 

“왜적들이 항복을 청하면서 구멍이 여섯 개가 있는 총통 다섯 자루와 환도를 바쳤으며, 말을 전해 준 자는 이름이 김서신이라고 하였다. 왜놈들의 항복을 모두 받아들이기로 한 꿈이었다.”


“새벽에 꿈을 꾸었는데 어떤 사람이 화살을 멀리 쏘았고 다른 어떤 사람은 갓을 발로 차서 부수었다. 혼자 점을 쳐 보니 ‘화살을 멀리 쏘는 것’은 적들이 멀리 도망하는 것이요, 또 ‘갓을 발로 차서 부수는 것’은 머리 위에 있어야 할 갓을 걷어차니 적의 괴수를 모조리 잡아 없앨 징조라고 하겠다.”


4. 꿈 중에는 미래를 예견하는 예지몽이 있다고 합니다. 이순신의 꿈 이야기에도 예지몽이 아닌가 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이순신이 고초를 겪을 것을 예견한 것인지 백의종군 3년 전에 이순신은 머리를 풀고 통곡하는 꿈을 꿉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기 이틀전 새벽에는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번잡스러운 꿈을 꾸고는, 어머니의 소식을 알아오라고 종을 보내기도 합니다. 삼도수군통제사로 다시 임명되기 전날 밤 꿈을 꾸는데, 임금의 명령을 받을 징조가 있었다고 스스로 꿈 풀이를 하기도 합니다.


5. 마지막으로 이순신의 꿈에 영의정 류성룡이 자주 등장합니다. 둘은 이순신의 꿈에서 의관을 벗어 놓고 앉았다 누웠다 하면서 서로 나라 걱정을 털어놓다가 끝내는 억울한 사정까지 쏟아 놓기도 합니다. 이순신과 류성룡의 각별한 우정을 보여주고, 이순신이 전쟁중에 류성룡에 크게 의지했다는 점을 알수 있습니다.


6. 아들 면이 죽은 이후에는 이순신은 아들 꿈을 꾸고 눈물을 흘립니다. 아들의 죽음을 듣고 나서, 이순신은 코피를 한 되 넘게 흘리고, 밤에 앉아 아들을 생각하고 눈물을 흘렸으며, 슬픔 때문에 가슴이 찢어지는 듯하여 가눌 길이 없었다고 말합니다. 어머니와 셋째 아들의 죽음으로 인해 이순신은 불면증에 시달렸습니다. 이 대목에서는 이순신이 가엽고, 안타깝게 느껴집니다.


참고 : 난중일기 속 꿈 이야기


1592년 8월 28일

맑다. 새벽녘에 앉아 꿈을 생각해 보았다. 밤에는 나쁜 꿈인 듯했으나 곰곰 생각하니 도리어 길한 것 같았다.


1594년 2월 3일

맑다. 새벽에 꿈을 꾸었는데 한쪽 눈이 먼 말을 보았다. 무슨 징조인지 알 수가 없다. 밥을 먹은 뒤 활터에 올라가 활쏘기를 하였다. 세찬 바람이 크게 일었다. 우조방장

어영담

이 도착하였는데 그 편에 난을 일으킨 자들의 소식을 들었다. 염려스러우면서도 분통이 터졌다. 우우후가 여러 가지 물건을 여러 장수에게 나눠 주었다. 원식, 원전이 와서 서울로 올라간다고 하였다. 원식이 남해 현령에게 쇠붙이를 바치고 면천공문免賤公文 한 장을 대신 받아 갔다. 저물녘에 막사로 내려왔다.


1594년 2월 5일

맑다. 새벽에 꿈을 꾸었는데 좋은 말을 타고 바위가 겹겹이 쌓여 있는 큰 고개를 바로 내려갔다. 봉우리가 빼어나게 아름답고 구불구불 동서로 뻗어 있었다. 봉우리 위의 평평한 곳에 자리를 잡으려고 하는 순간에 잠에서 깨었다. 무슨 징조인지 모르겠다. 또 꿈에 미인 하나가 홀로 앉아 손짓을 했는데, 나는 소매를 뿌리치고 응하지 않았다. 우스웠다. 아침에 군기시軍器寺에서 받아 온 흑각黑角 1백 장을 수를 헤아려 수결手決

서명

하였고, 화피樺皮 89장에 대해서도 수결하였다. 발포 만호, 우우후가 보러 왔기에 같이 밥을 먹었다. 늦게 활터 정자에 올라 순창, 광주의 담당 서리의 죄를 벌하였다. 우조방장

어영담

과 우우후, 여도 등이 활을 쏘았다. 원수

권율

의 답장이 도달하였는데, 명나라 심 유격沈遊擊

심유경

이 이미 화친을 결정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왜적의 간교한 꾀를 미리 알기 어려우니, 이미 술책에 빠져들었것만 또 이렇게 빠져드니 한탄스럽다. 저녁에 날씨가 찌는 듯 더워서 마치 초여름 같았다. 밤이 되면서 비가 내리기 시작하였다.


1594년 7월 27일

흐리고 바람이 불었다. 밤에 꿈을 꾸었는데 내가 머리를 풀고 통곡하였다. 이것은 매우 길한 징조라고 한다. 충청 수사, 순천 부사와 수루에 올라서 활쏘기를 하였다. 충청 수사가 과하주過夏酒를 가지고 왔다. 나는 몸이 불편하여 조금 마셨는데도 몸이 좋지 않았다. 밤에 꿈을 꾸었다.


1594년 9월 20일

새벽에 바람이 그치지 않았고 비도 잠시 왔다 개었다. 혼자 앉아서 간밤의 꿈을 떠올려 보았다. 바다 가운데 외딴섬이 달려와 눈앞에 주춤 서는데 그 소리가 우레와 같았다. 모두들 놀라 사방으로 달아났지만 나만은 홀로 서서 그 광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았다. 참으로 기분이 좋았다. 이것은 왜놈이 화평을 구걸하다가 스스로 멸망할 징조다. 또 내가 좋은 말을 타고 천천히 갔는데 이것은 내가 임금의 부름을 받아 올라갈 징조이다.


1594년 10월 10일

맑다. 아침에 장계 초안을 내어 수정하였다. 박자윤朴子胤과 곤양 현감이 그대로 머물면서 출발하지 않았다고 한다. 흥양 현감, 장흥 부사, 보성 군수가 보고하고 돌아갔다. 밤에 꿈을 꾸었는데 두 가지 좋은 징조가 있었다. 울과 존서存緖, 유□□와 정립廷立 등이 본영으로 돌아갔다.


1594년 10월 14일

맑다. 새벽에 꿈을 꾸었다. 왜적들이 항복을 청하면서 구멍이 여섯 개가 있는 총통 다섯 자루와 환도環刀를 바쳤으며, 말을 전해 준 자는 이름이 김서신金書信이라고 하였다. 왜놈들의 항복을 모두 받아들이기로 한 꿈이었다.


1594년 11월 8일

새벽에 잠시 비가 뿌리더니 늦게 개었다. 배 만들 재료를 운반하여 왔다. 새벽에 영의정의 꿈을 꾸었는데 모습이 변한 듯하였다. 나도 모자를 벗었는데, 같이 민종각閔宗慤 집에 이르러 이야기를 나누는 대목에서 깨었다. 무슨 징조인지 모르겠다.


1596년 1월 12일

맑았으나 서풍이 세게 불어 추위가 몹시 심하였다. 새벽 2시쯤 꿈을 꾸었는데, 잘 알지 못하는 곳에 가서 영의정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한동안 둘이 다 의관을 벗어 놓고 앉았다 누웠다 하면서 서로 나라 걱정을 털어놓다가 끝내는 억울한 사정까지 쏟아 놓았다. 그러는 동안 바람이 불고 비가 퍼부어서 계속 함께 있었다. 조용히 이야기를 계속하는 사이, 만일 서쪽의 적이 재빠르게 들어오고 남쪽의 적까지 덤빈다면 임금이 어디로 갈 것인가를 되풀이하여 걱정하다가 할 말을 잊었다. 이전에 영의정이 천식으로 몹시 편찮다고 들었는데 나았는지 모르겠다. 글자로 점을 쳐보았더니, 바람이 물결을 일으키는 것 같다[如風起浪]는 괘가 나왔다. 또 오늘 어떤 길흉의 조짐이 있는지 들으려고 점을 쳐 보니, 가난한 사람이 보배를 얻는 것 같다[如貧得寶]는 괘가 나왔다. 이 괘는 매우 좋구나, 매우 좋구나! 어제 저녁에 종 금이를 본영으로 보냈는데, 바람이 아주 거칠어서 몹시 염려되었다. 늦게 관청에 나가서 각처 공문을 처리해 보냈다. 낙안 현감이 들어왔다. 웅천 현감의 보고에 왜선 14척이 거제 금이포에 들어와 머물고 있다 하므로 경상 수사에게 3도의 여러 장수를 거느리고 가 보도록 하였다.


1596년 6월 3일

흐리다. 아침에 제포 만호 성천유가 교서에 절을 하였다. 김양간이 농사 지을 소를 싣고 나갔다. 새벽에 태어난 지 대여섯 달밖에 안 되는 어린아이를 직접 안았다가 도로 내려놓는 꿈을 꾸었다. 금갑도 만호가 보러 왔다.


1596년 7월 10일

맑다. 새벽에 꿈을 꾸었는데 어떤 사람이 화살을 멀리 쏘았고 다른 어떤 사람은 갓을 발로 차서 부수었다. 혼자 점을 쳐 보니 ‘화살을 멀리 쏘는 것’은 적들이 멀리 도망하는 것이요, 또 ‘갓을 발로 차서 부수는 것’은 머리 위에 있어야 할 갓을 걷어차니 적의 괴수를 모조리 잡아 없앨 징조라고 하겠다. 늦게 체찰사가 명령을 전하기를 “황 첨지

황신黃愼

가 정사가 되어 이제 명나라 사신을 따라가고, 권황權滉

거창 현감

이 부사가 되어 가까운 시일에 바다를 건너게 될 것이니 그들이 탈 배 세 척을 정비하여 부산에 정박시키라.” 하였다. 경상 우후가 와서 백문석白紋席 1백 50닢을 빌려 갔다. 충청 우후, 사량 만호, 지세포 만호, 옥포 만호, 홍주 판관, 전 적도 만호 고여우 등이 보러 왔다. 경상 수사가 급히 고성 땅 춘원도에 왜선 한 척이 정박하였다고 보고하였다. 여러 장수를 보내어 수색하라고 명령하였다.


1596년 7월 30일

맑다. 새벽에 갈몰葛沒이 들어왔다. 간밤에 꿈을 꾸었는데 영의정과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는 꿈이었다. 아침에 이진이 본영으로 돌아가고 춘화春花 등도 또한 돌아갔다. 김대인金大仁이 담제를 지내려고 말미를 얻어 가지고 돌아갔다. 늦게 조방장이 와서 함께 세 가지 종류의 활을 쏘았다. 저녁 때 탐색선이 들어와서 어머니께서 안녕하시다는 소식을 알려 주었다. 왕의 밀지가 두 통 내려왔다. 전투에 쓸 말과 아들 면의 말도 들어오고 지이와 무재도 함께 왔다.


1597년 4월 11일

맑다. 새벽에 꿈을 꾸었는데 몹시 번잡스러워서 이루 다 말할 수 없었다. 덕德을 불러 대강 이야기하고, 또 아들 울에게 이야기하였다. 마음이 몹시 언짢아서 취한 듯 무엇에 홀린 듯 마음을 가라앉힐 수가 없으니 이 무슨 조짐일까. 병환중인 어머니를 생각하면 눈물이 저절로 흘렀다. 종을 보내서 어머니의 소식을 알아오게 하였다. 금부도사는 온양으로 돌아갔다.


1597년 7월 4일

맑다. 아침 일찍 정상명에게 종 평세, 종 귀인과 짐말 두 필을 주어 남해로 보냈다. 정상명은 싸움에 쓸 말을 끌고 오도록 보낸 것이다. 새벽에 꿈을 꾸었는데, 내가 체찰사와 함께 한곳에 다달았더니 많은 시체가 널려 있기에 밟기도 하고 목을 베기도 하였다. 아침을 먹을 때 문인수文麟壽가 와가채蛙歌菜와 동아전冬爪餞을 가져왔다. 방응원, 윤선각, 현응진, 홍우공 등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홍우공은 아버지의 병을 구실로 종군하고 싶지 않아서 나에게 팔이 아프다고 핑계를 대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오전 10시께 황 종사관이 정인서를 보내어 문안하였다. 또 왜적에게 붙었던 김해 사람 김억金億이 보낸 보고서를 보여 주었다. 거기에 따르면 “초7일에 왜선 5백여 척이 부산으로 나오고 초9일에는 왜선 1천 척이 합세하여 절영도 앞바다에서 우리 수군과 싸웠는데, 우리 전선 다섯 척이 표류하다가 동래 땅 두모포에 도착하였고, 또 일곱 척은 간 곳이 없다.”고 하였다. 이에 분함을 이기지 못하고 곧 황 종사관에게 달려갔다. 그는 군대를 점고하고 있었는데 그곳에서 사태를 의논한 다음 그대로 자리를 잡고 활쏘는 것을 구경하였다. 조금 있다가 내가 타고 간 말을 홍대방에게 타고 달려 보라 했는데 매우 잘 달렸다. 비가 올 듯하여 곧 돌아왔는데, 집에 닿자마자 비가 마구 쏟아졌다. 오후 10시쯤 개었다. 달빛이 낮보다 훨씬 더 밝아서 떠오르는 갖가지 생각을 어찌 다 말할 수 있으랴.


1597년 8월 2일

잠시 날이 맑았다. 혼자 수루의 마루에 앉았으니 어머님에 대한 그리운 마음이 어떠하랴. 슬픔을 이기지 못하였다. 밤에 꿈을 꾸었는데 임금의 명령을 받을 징조가 있었다.


1597년 8월 3일

맑다. 이른 아침 뜻밖에 선전관 양호梁護가 와서 임금이 내린 교서, 유서와 유지를 가져왔는데, 삼도통제사를 겸하라는 명령이었다. 교서에 절을 한 뒤에 받은 서장書狀을 써서 봉해 올렸다.


1597년 10월 19일

맑다. 새벽에 고향 집의 종 진辰이 내려오는 꿈을 꾸었다. 나는 죽은 아들을 생각하며 통곡을 하였다. 늦게 조방장과 경상 우후가 보러 왔다. 김신웅金信雄의 아내와 이인세李仁世, 정억부鄭億夫를 붙잡아 왔다. 거제 현령, 안골포 만호, 녹도 만호, 웅천 현감, 제포 만호, 조라포 만호, 당포 만호와 우우후가 찾아와서 적을 잡았다는 공문을 가져와 바쳤다. 윤건尹健 등 형제가 왜적에게 붙었던 자 둘을 붙잡아 왔다. 어두울 무렵에 코피가 터져 한 되 넘게 흘렸다. 밤에 앉아 아들을 생각하고 눈물을 흘렸다. 어찌 다 말로 할 수 있으랴! 이제 죽은 영혼이 되었으니 이렇게 불효를 저지를 줄을 어떻게 알 것인가! 슬픔 때문에 가슴이 찢어지는 듯하여 가눌 길이 없었다.


1597년 11월 7일

맑고 따뜻하였다. 아침에 해남 의병이 왜적의 머리 하나와 환도 한 자루를 가져와 바쳤다. 이종호와 당언국唐彦國도 잡아 왔기에 거제 소속의 배에 가두었다. 늦게 전 흥산 현감 윤영현尹英賢과 생원 최집崔潗이 보러 왔는데 군량으로 벼 40섬과 쌀 8섬을 바쳤다. 며칠간 양식으로 도움될 만하였다. 본영 박주생朴注生이 왜의 머리 두 개를 베어 왔다. 전 현령 김응인金應仁이 보러 왔다. 이대진李大振의 아들 순생順生이 윤영현을 따라왔다. 저녁에는 새 집의 마루를 다 놓았다. 여러 수사들이 보러 왔다. 밤 자정께 면이 죽는 꿈을 꾸고는 목 놓아 울었다. 진도 군수가 돌아갔다.


* 자료: 난중일기, 이순신 지음, 송찬석 옮김 중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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