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에 갑질이 생긴 이유
강준만 교수님의 '개천에서 용 나면 안 된다'를 읽었다.
책 제목만 보았을 때는, '말도 안 되는 주장'이라고 생각을 했다.
개천에서 용이 날 수 있어야, 공평한 기회가 생기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지막 책장을 덮으며, 강준만 교수님의 주장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 내용들을 적어본다.
갑질은 결코 많은 권력과 금력을 가진 사람들만이 저지르는 게 아니다. 그건 상대적이거니와 다단계 먹이사슬 구조로 되어 있어 전 국민의 머리와 가슴속에 내면화되어 있는 삶의 기본 양식이다. 즉, 이른바 '억압 이양의 원리'에 따라, 상층부 갑질의 억압적 성격은 지위의 고저에 따라 낮은 쪽으로 이양되는 것이다.
"6.25 전쟁이 끝나자 사람들은 배고픔과 이산에 대한 한이 맺히면서 어떠한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살아남겠다고 발버둥 치게 되었다. 이제 출세를 위해서는 무슨 방법이든 가능하게 되었고, 돈을 벌기 위해서는 어떠한 수단이든 가능하게 되었다. '바가지'가 난무하게 된 것은 이때부터였다. 사람들은 무엇이든지 원할 수 있었기 때문에 지금까지 그들을 묶고 있던 규범의 사슬이 하나둘 풀려나갔다. 출세와 돈을 위해서라면 몸을 팔 수도, 밀수를 할 수도, 다른 사람의 등을 칠 수도 있었다. 따라서 극소수의 규범 주의자와 대다수의 탈규범주의가가 윤리와 비윤리의 극단을 이루는 윤리적 극단주의가 지배하게 되었다."
영국 저널리스트 대니얼 튜더(Daniel Tudor)는 한국의 그런 두 얼굴을 다룬 책의 제목을 아예 '한국: 있을 수 없는 나라. Korea: The Impossible Country'라고 붙였다. '기적을 이룬 나라, 기쁨을 잃은 나라'라는 한국어판 제목이 그런 양면성을 실감 나게 표현해주고 있다.
"한국인들은 선진국이 되고자 하는 열망으로 남과 비교하는 저주에 빠져버렸다"는 것이 그의 진단이다. 물론 그런 '비교의 저주'는 일상적 삶에서도 끊임없이 나타난다. 누가 용이 되었으며 누가 용의 지위에 더 근접했느냐를 놓고 한국인은 남들은 물론 자신조차 못살게 군다.
손석희는 2월 12일 JTBC 뉴스룸의 '앵커 브리핑'에서 'Who Are You?'라는 질문을 던졌다. "내가 누군지 알아?" 현상의 핵심을 잘 꿰뚫고 있어, 그 전문을 감상해보는 게 좋을 것 같다. 아래와 같다.
"당신은 누구시길래"
내가 누군지 아느냐. 술에 취해서 택시 기사를 폭행하고 파출소에서 소란을 피운 청와대 민정수석실 행정관이 어제 면직 처리됐습니다. 그러고 보니까 참 많이도 들어본 말이네요. 오늘 1심에서 징역 1년 실형을 선고받은 대한항공 조현아 전 부사장 또한 '내가 누군지 아느냐' 식의 갑질로 처벌을 받게 되었고 국무총리 후보자가 기자들을 앉혀 놓고 했던 말도 결국은 따지고 보면, '내가 누군지 아느냐'와 다름없었습니다. 보도 내용과 언론사 인사, 학교 인사, 법안까지. 참 많은 말을 했죠.
남을 누르는 고압적인 질문, "내가 누군지 아느냐". 시대를 막론하고 부와 권력을 쥔 사람들의 상징어가 돼서 없는 사람들의 마음을 짓누릅니다. "내가 누군지 아느냐. 여기선 내가 왕이다." "내가 시의회 의장이다. 의장도 몰라보냐." "네가 뭔데 나에게 차를 빼라 하느냐." 이 사람들은 왜 자기가 누구인지를 남에게 물어보는 걸까요?
자신이 누구인지를 남에게 확인받아야 하는, 그래야 직성이 풀리는 자기 과시의 심리. 그러나 그것은 어찌 보면 온전한 자기 자신에 대한 확신이 없어서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일까요? '내가 누군지 아느냐'는 질문에 왠지 답을 해야 할 것 같은 느낌마저 드는군요. 그래서 오늘 앵커 브리핑이 고른 단어. "who are you?", '당신이 대체 누구시길래'입니다.
내가 누구인지 아느냐고 묻기 전에 스스로 자신이 누구인지를 먼저 묻고 대답해보면 답은 나오리라 믿습니다. 그리고 대답은 명확합니다. 민주사회에 지도층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권력층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모두가 우리 사회를 구성하고 이끌어가는 평등한 시민이라는 것이지요.
부와 권력이란 것도 결국엔 시민으로부터 나온 것이니 그걸 운 좋게 좀 더 갖고 있다고 해서 함부로 휘두르지 말라는 것은 동서고금에서 이미 다 배운 바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 항공기 회항 사건 재판에서도 알 수 있듯, 또한 총리 인준을 둘러싼 무성한 논란에서 볼 수 있듯이, '내가 누구인지 아느냐'라는 물음에 대해 돌려드릴 대답은 딱 하나밖에 없습니다. who are you? 당신은 대체 누구시길래. 앵커 브리핑이었습니다.
한국의 아파트는 '살 집'이 아니라 '팔 집'이다. 그래서 전체 인구의 19퍼센트가 해마다 이사를 다니는 바람에 5년만 지나면 한 동네가 완전히 새로운 사람들로 바뀐다. 주거 자체가 상업적 행위가 되어버린 상황에서 그 어떤 일이 일어난다 한들 놀랄 게 무어 있으랴. 아파트에 기업 브랜드를 붙이는 나라, 그리고 그 브랜드를 놓고 갈등이 끊이지 않는 나라가 대한민국 말고 또 있을까?
그런 환경에서 자라는 아이들이 무엇을 보고 배우겠는가? 아파트의 돈값에 따라 사람을 차별하고 갑질 하는 심성을 기르지 않는다면 오히려 그게 더 이상한 일이 아닐까? '경향신문'은 "어디 사세요?"라는 질문은 '현대판 호패'인 양 우리를 불편하게 한다고 했다.
아파트 단지 안 공원, 놀이터 등 부대복리 시설은 아파트 단지 입주자들의 부담이었다. 당연히 단지 주민들은 높은 담을 두르고 타인의 출입을 막았다. 그래서 한국의 아파트 단지는 철저하게 폐쇄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대해 박인석은 "주민들을 탓할 수 있는가?"라고 묻는다.
마당, 복도 등 공공 공간, 곧 이웃과 공유하는 공간이 어떻게 되든 현관 안쪽의 사적 전용공간만 넓고 쾌적하면 그만이다. 즉, 아파트 단지화는 사적 전용공간의 중시 경향을 낳고, 그 결과 공동체 의식 저하를 초래한 것이다.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꾼 1897년경 매관매직은 국가 시책이었다. 1894년 갑오개혁으로 과거제도를 폐지해버린 탓도 있었지만, 황실은 세원이 없어 벼슬을 팔아서라도 국고를 충당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탐관오리들만 득실거리게 되었다. 벼슬을 돈 주고 샀으니 본전 뽑고 이익까지 남겨야 하지 않겠는가. 백성을 착취하는 것 이외에 무슨 방법이 있었겠는가.
양반의 갑질에 질린 백성들의 저항은 '양반 족보 구입'으로 나타났다. 역사학자 이덕일의 조사에 따르면, 대구지역은 1690년(숙종)에 양반이 9.2퍼센트, 양민이 53.7퍼센트, 노비가 37.1퍼센트였다. 약 100년 뒤인 1783년(정조)에는 양반이 37.5퍼센트, 양민은 57.5퍼센트, 노비는 5.0퍼센트가 되었다. 그로부터 70년 뒤인 1858년(철종)에는 양반이 70.3 퍼센트, 양민이 28.2 퍼센트, 노비는 1.5퍼센트로 줄었다. 조선 말기에는 양반이 80~90퍼센트가 되었다고 한다. 양반 족보를 사서라도 양반 시늉을 내지 않으면 살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양반 족보는 학력. 학벌 증명서로 대체되었다.
오늘날 한국 사회가 특히 심하긴 하지만, 지위 불안은 미국에서 1950년대부터 학계의 주목을 받았던 개념이다. 지위의 본질은 무엇인가? 바로 비교다. 지위는 물론 행복은 비교에서 나온다. 데이비드 흄(David Hume, 1711~1776)은 시기심의 가장 핵심적인 요소는 사회적인 비교이되, '비교 가능한 대상'끼리의 비교를 강조했다.
미국에서 이루어진 조사에 따르면 여동생의 남편이 자기 남편보다 소득이 많은 여성은 그렇지 않은 경우에 비해 취업할 확률이 20퍼센트 더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게 바로 '이웃 효과(neighbor effect)'다. 그 어떤 절대적 기준이 아니라 이웃과의 비교를 통해 자신을 평가함으로써 발생하는 효과다. 한국인들의 자부심이 낮은 주요 이유다. 공부를 잘하는 학생인데도 옆집에 공부를 더 잘하는 아이가 있으면 주눅 들고 집에서 구박받기 쉬운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이른바 '엄친아(엄마 친구 아들)' 현상인 셈이다.
우리가 흔히 듣는 말들은 '비교의 독재'라고나 할까. '비교의 독재' 체제하에선 자신이 노는 물이 비교의 주요 근거지로서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된다. "사람은 큰 물에서 놀아야 한다"는 속설을 믿는 이들이 많지만, 그게 혹 미신은 아닌지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미국 스워스모대학의 심리학자 배리 슈워츠(Barry Schwartz)는 '선택의 역설(The Paradox of Choice: Why More Is Less)'에서 이렇게 말한다. "경제학자 로버트 프랭크는 그의 저서 '옳은 연못 고르기'에서 사회생활이 우리가 사는 연못에서 큰 고기가 되고 싶어 하는 우리의 열망에 의해 얼마나 크게 결정되는지를 보여준다. 지위 경쟁에서 성공해 행복해지는 법은 옳은 연못을 골라 그곳에 머무르는 것이다.
즉, 행복이 어떤 연못을 고르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말이다. 늘 '최고'나 '최상'만을 추구하는 사람은 무조건 가장 큰 연못을 택할 것이다. 다른 큰 고기들과 경쟁하며 몸집을 키워나가려고 애쓰는 것도 좋은 일이겠지만, 행복에서 멀어질 가능성이 높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정상근은 '나는 이 세상에 없는 청춘이다'라는 책에서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이들은 '공시족'이란 이름으로 패배자의 삶을 강요받고 있다고 말한다. "패배를 해도 툭툭 털고 다시 일어설 수 있는 다른 나라들과는 달리 '패배는 곧 죽음'이라는 무시무시한 국훈을 가진 이 나라에서, 어쩌면 이들은 매일매일 생사를 넘나드는 심정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모른다. 전쟁과 같은 이 경쟁에서 이기지 못하면 도태된다는 위기감이 그들을 궁지로 몰아넣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겁을 먹고 있다.
더욱 비극적인 건 그렇게 겁먹은 사람들 사이에서도 갑질의 폭력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공무원 시험 몇 번 떨어졌다고 인생이 비참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합격한 애들은 '땀은 배반하지 않는다'며, '떨어지는 애들은 이유가 있다'며 그들의 우월감을 한껏 과시하고, 시험에서 떨어진 친구들은 졸지에 능력도 없고, 노력도 안 하는 막장인생이 되어버렸다. 아직 20대인데,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들이 더 많은 이들에게 누가 손가락질하고 '패배자'로 규정하는가?"
이들은 '불안'의 수준을 넘어선 '공포'의 벼랑에 몰려 있다.
구성의 오류는 각 개인의 합리적 행동의 총합이 전체적으로는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하는 것을 말한다. 예컨대, 불황에 저축을 늘리면 개인은 안전감을 느끼겠지만 모두가 다 그렇게 하면 소비가 줄어 경기를 더 악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 또 농사를 잘 지어 생산량을 늘리는 것은 농민의 보람이지만, 모든 농민이 다 농사를 잘 짓는다면, 농산물 가격이 폭락해 모든 농민에게 재앙이 될 수 있다. 마찬가지로 모두가 합리적. 계산적으로 인생을 살아나가면, 사회는 과잉 경쟁의 늪에 빠져 들어 필요 이상으로 각박하고 살벌해질 수 있다. 우리의 대학입시 전쟁이 그 생생한 증거다.
물질적 서열의 굴레에서 벗어나 각자 다양한 가치관과 인생관에 따라 살아간다면 우리는 자기만의 세계에 만족하면서 평화로운 삶을 영위할 수 있으리라. 그러나 우리는 한사코 모든 사람을 일렬종대로 세워 서열을 매겨야만 직성이 풀린다. 삶의 만족과 보람은 나의 내면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남과의 사회경제적 비교에서만 나오기 때문이다. 주변에 나보다 잘 나가는 사람이 있으면 어떻게 해서든 따라잡거나 그 사람을 능가해야만 한다. 그 목표를 성취했다 하더라도 그걸로 끝이 아니다. 나보다 잘 나가는 사람은 끝없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따라서 계속 전시 상태로 살아가야만 한다. 일종의 쳇바퀴를 타는 셈이다.
김대호는 이른바 '철밥통 트랙(정년보장 트랙)'과 '플라스틱 트랙(기간제라든지 파트타임 트랙)'을 같이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플라스틱 트랙으로 사는 사람에 대해서는 노동의 질과 양이 같으면 임금을 더 높여줘야 하는 것이고요. 그다음에 이 사람이 고용이 단절되는 기간에 충격을 완화해주는 좀 더 두터운 고용보험을 만들 수도 있어요. 좀 더 후하게 고용보험을 줄 수도 있다는 말이에요. 이렇게 해서 비정규직으로 계속 살아도 별로 억울하지도 않고 행복할 수 있는, 그러한 정책들을 펴는 것이 맞는다고 보거든요"라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런데 현재 우리의 콘셉트가 무엇이냐 하면 비정규직은 없어져야 할 존재야. 그러면 여기에 대해서 개선하지 않아요. 정리해고를 부정하는 사람들은 해고된 사람을 어떻게 도와줄 건지에 대해서는 고민 안 해요. 정리해고 자체를 철폐하려고 하니까. 그런 걸 고민하면 정리해고를 인정하는 꼴이 된단 말이죠. 그런 것처럼 비정규직 자체를 없어져야 할 존재로 생각해버리면 비정규직으로도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건 고민 안 하죠. 왜냐하면 비정규직이면 행복하게 살 수 없다고 생각하니까. 정규직이 되어야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생각한단 말입니다. 굉장히 나쁜 콘셉트잖아요. 그런데 시대적인 추세를 보면 앞으로도 파트타임 고용이나 기간제 고용 같은 것들이 점점 더 늘어나게 되어 있어요. 전 세계적인 추세잖아요."
이 책에서는 '개천에서 용 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다양한 각도에서 해석해 주었다.
우리는 개천에서 난 용을 보면서 열광하는 동시에 꿈과 희망을 품는다. 계층 이동의 가능성을 보면서 이 세상이 살 만한 곳이라는 확신마저 갖는다.
"개천에서 용 난다"는 단순한 속담이 아니다. 그건 한국 사회를 움직이는 기본 모델이자 심층 이데올로기로서 무게와 중요성을 갖는다. '개천에서 용 나는' 모델은 신분 상승을 이룰 수 있는 '코리언 드림'의 토대지만, 동시에 사회적 신분 서열제와 더불어 "억울하면 출세하라"는 왜곡된 능력주의, 즉 '갑질'이라는 실천 방식을 내장하고 있다.
우리는 개천에서 더 많은 용이 나는 걸 진보로 생각할 뿐, 개천에 남을 절대다수의 미꾸라지들에 대해선 아무런 생각이 없다. 미꾸라지들의 돈으로 용을 키우고, 그렇게 큰 용들이 권력을 갖고 '개천 죽이기'를 해도 단지 그들이 자기 개천 출신이라는 데에 큰 의미를 부여한다. 내부 식민지의 기묘한 자학이요. 자해라 할 수 있다.
'개천에서 용 나는' 모델은 본질적으로 "억울하면 출세하라"라는 것과 다를 바 없으며, 출세하지 못한 채 개천에서 살아가야 하는 다수 미꾸라지들에게 불필요한 열패감을 안겨주면서 그들을 불행의 수렁으로 밀어 넣는 게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개천에서 용 나는' 모델을 깨야 한다.
개천에서 용이 나는 것이 필요한 것은 맞다고 생각한다. 조선시대처럼 노비로 태어났으면 노비로 생을 마감하는 것이 아니라, 능력과 실력이 있으면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 맞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개천에서 용 난다'는 속담 외에 한 가지 속담을 더 주지시켜 주는 것 같았다. 그 속담은 바로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 못한다'이다. 개천에서 용이 났으면, 그 용이 개천에서 미꾸라지였던 시절을 생각하고, 개천에 있는 다수의 미꾸라지들에게 도움이 되는 삶을 살아가면 된다. 하지만 개천에서 용이 나면, 내가 언제 개천에 살았냐는 듯이 개천과 단절하고, 개천의 미꾸라지들에게 군림하려 하는 것이 대한민국의 현주소라고 생각한다.
나 또한 개천에서 난 용이 되기 위해. 그리고 주변 사람들에게 기에서 눌리지 않으려고 발버둥 친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만드는 좋은 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