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내 머릿속에는
‘어떻게 사는 게 좋은 것일까?’란 생각이 가득하다.
그런 생각들을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이 책의 제목에 끌리게 되었다.
유시민 작가님의
‘어떻게 살 것인가’에서 접한
인생의 나침반과 같은 표현들을 적어본다.
도대체 무슨 사연이 있기에 호두가 운다는 말인가. 크라잉넛 멤버들은 대중이 좋아하는 음악이 아니라 자기네가 하고 싶은 음악을 했다. 그렇게 하면 돈이 잘 벌리지 않는다. 어느 날 배가 너무 고픈 나머지 버스비를 탈탈 털어 호두과자로 끼니를 때우며 집으로 가던 중 크라잉넛이라는 밴드 이름을 생각해 냈다고 한다. 알고 보니 호두가 운 게 아니었다. 스스로를 ‘땅콩’이라고 부르는 멤버들이 운 것이다. 호두과자로 허기를 달래고 집까지 걸어가야 하는 신세가 서러워서.
크라잉넛 멤버들은 인생의 성패를 가르는 기준을 물질이나 지위, 사회 통념이나 타인의 시선, 어떤 이념이나 명분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에 두었다. 마음이 내는 소리를 귀 기울여 들으면서 행복한 삶을 스스로 설계했다. 그리고 그 삶을 자기가 원하는 방식으로 밀고 나갔다. 주눅 들지 않고 세상과 부딪쳤다. 인생이 성공했으며 삶이 행복하다고 생각한다. 계속 그렇게 마음이 이끄는 대로 살고 싶다고 한다.
‘가문의 영광’에 대한 강의가 끝나면 어른들은 커서 ‘무엇’이 되고 싶으냐고 물었다. 모범 답안은 판사나 검사였다. 의사나 공무원도 대충 정답으로 통했다. 그와 다른 대답은 어른들을 실망하게 만든다는 것을 알았기에 나는 판사가 되겠다는 모범 답안을 말하곤 했다. 어른들은 매우 기꺼워하셨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삶의 목표가 무엇인지는 아무도 묻지 않았다.
자살은 단순한 충동의 표출이 아니다. 누구도 가벼운 마음으로 자살하지 않는다. 겉보기에는 마치 한 순간의 분노나 충동을 억제하지 못해 목숨을 끊은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죽음이 직접 동반하는 것보다 더 혹심한 몸과 마음의 고통을 겪은 끝에 자살을 감행한다. 학업 성적, 경제적 궁핍, 질병의 고통, 가족 간의 불화, 명예 실추, 타인의 비난, 풀 길 없는 억울함... 그 동기가 무엇이든 다르지 않다. 그런 것들이 자존감을 회복할 수 없는 양상으로 파괴할 때, 인간적 존엄성을 회복할 수단이 남아 있지 않다고 느낄 때 자살은 탈출구가 된다.
로널드 레이건(Ronald Wison Reagan)은 아흔네 살 나이로 2004년 세상을 떠났다. 그는 미국 대통령을 두 번 지냈으며 죽기 전 십 년 동안 알츠하이머병을 앓았다. 알츠하이머병은 치매를 유발하는 질병 중에 가장 흔한 것이다. 여든넷의 아직 건강한 노인에게 알츠하이머병이 찾아드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다. 알츠하이머병 확진을 받은 사실을 미국 국민들에게 알린 것이다. 이 담화문에서 레이건은 병을 공개하는 것이 치매에 대한, 그리고 환자와 가족이 겪는 고통에 대한 사회의 관심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되기 바란다고 했다. 그리고 자신은 조국에 대한 사랑을 간직한 채 죽음으로 가는 마지막 여행길에 나섰으며 나라의 앞길에 밝은 아침이 올 것임을 믿는다는 희망을 피력했다.
레이건은 철학적 자아의 죽음에 의연하게 대처했다. 그의 담화문은 자유의지를 가진 지성적 인간으로서 할 수 있었던 마지막 결단이었다. 지는 해가 만드는 낙조는 일출만큼 눈부시지 않다. 하지만 아름다움으로 치면 낙조가 일출을 능가할 수 있다. 레이건의 마지막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든다.
존엄(Dignity)이란 무엇인가? 이 단어의 어원은 라틴어 ‘디그니타스(dignitas)’이다. 존엄은 일상 언어생활에서는 존경과 고귀함을 의미한다. 철학적 정치적 학술적인 토론에서는 개념을 명확하게 규정하지 않은 채 사용한다. 존엄성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는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의 견해를 길잡이로 삼을 만하다. 칸트에 따르면 존엄한 것은 ‘가치(value)’를 따질 수 없다. 어떤 것의 ‘가치’는 사람들이 인정하는지, 인정한다면 얼마만큼 높게 평가하는지에 좌우된다.
그러나 ‘그 자체가 목적인 것’은 가치를 따질 수 없다. 도덕적 차원을 가진 것, 옳은 것과 그른 것 사이의 선택을 나타내는 것만이 그 자체로 목적이 된다. 인간다움(humanity), 존엄성(dignity)이 그런 것이다.
열등감을 전혀 느끼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은 드물다. 전쟁과도 같은 대학 입시 경쟁을 보라. 공부를 아주 잘하는 젊은이들은 소위 SKY 대학과 카이스트, 포항공대 등에 진학한다. 세칭 일류 대학에 진학하지 못한 청년들은 흔히 열등감을 느낀다. 그러나 SKY 대학에 들어갔다고 해서 문제가 다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연고대나 카이스트를 다니다가 휴학하고 다시 수능을 봐서 서울대를 가는 청년들이 드물지 않다. 서울대라고 해서 어디 만사형통이겠는가. 거기에도 잘 나가는 학과와 그렇지 않은 학과가 있다. 이른바 인기학과에도 성적이 하늘을 나는 학생이 있는가 하면 바닥을 기는 학생도 있다. 경쟁은 끝이 없다. 경쟁에 뒤질 때마다 열등감을 느낀다면 인생은 참혹한 비극이 된다.
부모가 저지를 수 있는 가장 중대한 잘못은 자녀의 삶을 대신 설계하고 자녀의 행복을 대신 판단하는 데서 시작된다. 부모는 누구나 딸 아들이 행복하게 살기를 바란다. 그러나 아무리 지위가 높고 돈이 많은 사람도 자녀에게 행복을 상속해 줄 수는 없다. 행복은 사람이 저마다 느끼는 주관적 만족감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이야기는 다시 철학의 근본 문제로 돌아간다. 자식에게 물려주고 싶지만 그 자체를 물려줄 수는 없는 행복, 그것은 무엇인가? 행복은 삶에서 기쁨을 느끼고 자기 삶에 만족하여 마음이 흐뭇한 상태를 말한다. 우리는 언제 이런 흐뭇함을 느끼게 되는가? 스스로 설계한 삶을 자기가 옳다고 여기는 방식으로 살면서, 그것이 무엇이든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것을 성취했을 때 행복을 느낀다. 부모는 자녀가 자신의 행복을 찾아나갈 수 있도록 지켜보고 격려하면서 필요할 때 적절한 도움을 주는 선에 머물러야 한다.
프리랜서 글쟁이는 나쁘지 않은 직업이다. 무엇보다 물적 자본이 없이 일을 할 수 있어서 좋다. 작은 집필 공간과 컴퓨터 한 대만 있으면 그만이다. 따로 작업실을 구할 돈이 없으면 집에서 일해도 된다. 꼭 필요한 책은 구입해야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것은 공공도서관에서 빌려도 무방하다. 국가와 기업, 시민단체가 운영하는 사이트에서 온라인으로 거저 얻을 수 있는 자료도 많다. 시간을 자유롭게 쓸 수 있는 것도 큰 강점이다. 일이 잘될 때는 밤을 새도 되고 그렇지 않을 때는 그저 책을 끼고 빈둥거려도 괜찮다. 게다가 누가 시키는 일을 하는 게 아니라 스스로 선택한 주제를 마음 내키는 대로 쓸 수 있는 것도 좋다. 글 쓰는 사람에 대한 사회의 시선도 우호적이다.
강연이나 인터뷰를 하다 보면 진보주의란 무엇이며 보수주의와 어떻게 다르냐는 질문을 자주 받는다. 앞서 말한 것처럼 진보주의를 ‘유전자를 공유하지 않은 타인의 복지에 대한 진정한 관심과 타인의 복지를 위해 사적 자원의 많은 부분을 내놓는 자발성’이라고 이해하면 그 차이를 비교적 분명하게 설명할 수 있다. 진보는 서민복지를 확대하기 위한 부자증세에 찬성하지만 보수는 반대한다. 진보는 외국인 노동자의 권리와 문화적 다양성을 옹호하지만 보수는 내국인의 이익과 민족문화의 고유성을 중시한다. 진보는 동성애에 대해 너그럽지만 보수는 동성애를 혐오한다. 진보는 전쟁에 반대하고 갈등의 평화적 해결을 옹호하지만 보수는 부국강병을 좋아하고 외부 위협에 대한 군사적 대응을 선호한다. 진보는 여성과 장애인 등 소수자의 권익 보호를 매우 강조하지만 보수는 덜 그렇다. 진보는 무슨 문제가 있으면 국가와 사회의 책임을 강조하는 반면 보수는 개인과 가족의 책임을 중시한다.
뭉뚱그려 말하면 보수는 모든 문제에 대해서 진화적으로 익숙하고 생물학적으로 더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생각하고 행동하지만 진보는 진화적으로 새롭고 생물학적으로 덜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생각하고 행동한다.
오로지 엄청난 행운만 누리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도 불운의 방문을 받는다. 스페인 FC바르셀로나 소속 아르헨티나 국가대표 공격수인 리오넬 메시(Lionel Messi)도 그런 인물이다. 1987년 아르헨티나 산타페 주 로사리오에서 태어난 메시는 다섯 살에 이미 주변 사람들을 놀라게 한 ‘모태 축구 천재’였다. 이 아이가 뛰어난 축구 스타가 될 것임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 열한 살이 되었을 때 메시는 성장 호르몬 분비에 장애가 있다는 진단을 받았다. 이것이 축구 재능에 어떤 악영향을 줄지는 확실하지 않았다. 그러나 키가 제대로 자라지 않는다면 축구 선수에게 좋을 것이 없다는 건 분명했다. 문제는 치료비였다. 그의 부모에게는 매달 900달러 넘게 드는 치료비를 감당할 능력이 없었다. 그가 태어났을 당시 아버지는 공장 노동자였고 어머니는 비정규 청소 노동자였다. 공을 차는 재능 말고는 메시의 출생에서 행운이라고 할만한 요소를 찾아보기 어려웠다.
그런데 대서양 건너에서 도움의 손길이 찾아들었다. 스페인 프로구단 FC바르셀로나의 유소년 선수 선발 담당자가 이 소년이 뛰는 모습을 보았다. 구단은 메시 가족을 통째로 유럽으로 데려왔다. 꾸준히 치료를 받은 덕분에 키 169센티미터, 몸무게 67킬로그램으로 성장했지만 메시는 여전히 작고 가볍다. 하지만 그는 축구로 세계 최고가 되었다. 열여섯 살에 친선 경기에서 비공식 데뷔전을 했다. 곧이어 스페인 프리메라리가 경기에 공식 데뷔했으며, 1년 뒤에 데뷔 골을 넣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주전 선수 자리를 확보했다. 메시의 성장과 더불어 FC바르셀로나는 세계 최강 프로축구팀이 되었다.
질문은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대부분의 책 제목은 정의를 내린다.
이 책은 특이하게 책 제목으로 질문을 사용했다.
그리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해서,
다양한 관점의 이야기를 해주고 있다.
어떻게 살 것인지를 묻고 있지만,
책의 상당 부분은 죽음에 대해 말하고 있다.
죽음을 다양한 방법으로 고찰하며,
어떻게 사는 것이 후회 없이 죽는 것인지를 알려주고 있다.
이 책은 ‘어떻게 살 것인가?’란 질문에,
‘어떻게 죽는 것이 가치 있는 삶’인지로 답한다.
나는 후세에 어떻게 기억되기를 원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