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실은 더하기. 창의는 곱하기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당시 사원이었던 나는 SERICEO를 수강했다.
‘사원이 왠 SERICEO?’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1년에 120만 원이나 하는 SERICEO를 들은 것은
김정운 교수님 때문이다.
꼬불꼬불한 헤어스타일에
유럽 작곡가를 떠올리게 하는 의상.
그동안 알고 지내던 점잖은 교수님의 모습과는 판이하게 다른 ‘엥~ 엥~’ 거리는 하이톤 음성까지.
어느 것 하나 교수답지 않은 교수님의 이야기에 나는 매료되었다.
당시는 유튜브로 동영상 강의를 보는 개념도 없던 시절이라, 나는 고민 없이 120만 원을 지불했다.
최근 마음속이 혼란스러웠는지,
책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글이 잘 써지지 않았다.
이런 때일수록 재미있는 책을 읽고 싶었다.
관점의 전환이 필요했다.
바닷가 작업실에서는 전혀 다른 시간이 흐른다.로는 해소되지 않는 답답함이었다.
그런 이유로 10년 만에 다시 꺼내 든 책.
‘나는 아내와의 결혼을 후회한다’의 신선한 내용들을 적어본다.
행복하고 싶은가? 그렇다면 행복을 구체적으로 ‘정의’할 수 있어야 한다. 내 침실의 ‘백열등 부분조명’과 ‘하얀 침대 시트’처럼,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직접 느낄 수 있게 정의할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전문 용어로 ‘조작적 정의(Operational definition)’라고 한다.
잊지 말자. 나이가 들수록, 이런 종류의 사소하지만 즐거운 리추얼이 우리의 삶을 구원해준다. 내가 정말 관심을 가져야 할 대상은 즐거운 느낌이 반복되는 나만의 리추얼이다.
‘맛없는 식당 주인의 딜레마’는 오늘날 한국사회가 씨름하고 있는 문제의 본질이 무엇인지 잘 보여준다. 맛있는 게 뭔지를 알아야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낼 수 있는 것처럼, 삶의 재미와 행복이 뭔지 알아야 즐겁고 살 만한 세상을 만들어 낼 수 있다. 행복하고 재미있는 삶의 구체적 조건에 대한 이해가 없는 사람이 만들어내는 상품이 경쟁력이 없는 것은 당연하다.
과정을 즐기지 못하면 항상 불안하다. 타인의 완성된 결과와 내 미숙한 결과를 비교하기 때문이다. 이 땅의 사내들이 불안해하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다. 살면서 한 번도 과정을 즐기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또 아무리 노력해도 결과가 그리 분명하게 나타나지도 않는 세상이다. 이런 ‘결과 지향적 삶’에는 어떠한 즐거움도 없다. 결과를 이루는 순간, 또 다른 결과를 계산해야 하기 때문이다.
행복과 재미는 리추얼로 확인된다. 리추얼을 통해 사람은 서로의 정서를 흉내내기 때문이다.
모든 재미는 바로 이 흉내 내기에서 출발한다. 어린아이가 어머니와 제일 먼저 하는 놀이는 흉내 내기다. 아기는 엄마의 표정을 흉내 내고, 엄마는 아기의 표정을 흉내 낸다.
도대체 왜 아이들은 장난감을 좋아하는 것일까? 간단하다. 대상 세계를 모방했기 때문이다. 아이들의 장난감 중에 외부의 대상을 모방하지 않은 경우는 없다. 인형, 자동차 장난감, 컴퓨터 게임에 이르기까지 모든 놀이의 본질은 흉내 내기다.
이야기가 있는 삶은 행복하다. 이야기는 풍부하고 다양할수록 좋은 것이다. 남의 이야기는 백날 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 그러니 갈수록 자극적이고 파괴적인 이야기만 난무하는 것이다. 더 늦기 전에 다른 이야기를 찾아야 한다. 내 피부로 느끼는 삶의 기쁨이나 슬픔에 관한 이야기, 내 가족, 친구들과 공유할 수 있는 자잘한 즐거움과 설렘에 관한 이야기가 많을수록 행복한 삶이다.
서로 마주 보며 이야기하기를 두려워하는 것을 정신병리학에서는 ‘자폐증’이라고 한다. 폭탄주는 집단 자폐 증상이다. 자폐증은 정상적인 사회생활이 불가능한 아동들에게만 나타나는 현상이 아니다. 멀쩡하게 사회생활을 잘하고 있는 이들에게도 자폐 현상은 나타난다.
문화심리학적으로 보면, 명함을 건네는 행위의 이유는 아주 단순하다. 서로의 권력관계 서열을 정하기 위해서다. 서열이 정해져야 상호작용의 룰이 정해지기 때문이다. 서로의 사회적 지위, 연배의 순서가 정해지지 않은 상태에서는 상호작용의 룰이 정해지지 않는다. 남자들에게 상호작용의 룰이 애매한 상태처럼 견디기 힘든 상황은 없다.
오늘날 한국사회의 문제에 대해 서로 목소리 높여가며 이야기한다. 그러나 한국사회의 본질적인 문제는 ‘서로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이해 못한다’는 사실에 있다. 서로 의사소통이 안 되니, 남는 것은 동물적인 공격성, 분노, 적개심뿐이다. 분노, 적개심, 공격성이 공중에 둥둥 떠다닌다. 다들 ‘건들기만 해 봐!’ 하는 표정이다. 미칠 지경이다. 아니, 도대체 왜들 이러고 사는 것일까?
21세기 리더십은 ‘마음을 움직이는 힘’에서 나온다. 그래서 모두들 소통이 중요하다고 한다. 그러나 “소통하자”라고 외친다고 소통이 될 리 없다. 우선 소통의 기본원칙부터 이해해야 한다. 인간의 기초적 상호작용 형태인 의사소통은 두 가지 원칙에 의해 유지된다. ‘순서 바꾸기(turn-taking)’와 ‘관점 바꾸기(perspective-taking)’가 바로 그것이다. 이 두 가지 원칙 중 하나라도 망가지면 소통은 불가능해진다.
누군가와 대화를 하다가 기분 상하는 느낌이 드는 경우는 대부분은 이 ‘순서 바꾸기’가 망가졌을 때다. 상대방만 일방적으로 이야기하고 나는 듣고만 있어야 할 때, 기분이 상하는 것이다. 상대방에게 도무지 이야기할 순서는 물론, 반응할 기회조차 주지 않는 이런 종류의 실수는 스스로 도덕적으로 우위에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에게서 주로 나타난다. 상대방을 계몽과 설득의 대상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순서 바꾸기’가 망가지는 가장 큰 이유는 불안이다.
자신의 이야기가 상대방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다는 불안 때문에, 계속 반복해서 자기 이야기만 하는 것이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은 나 자신에 대한 확신에서 나온다. 내가 하는 이야기에 나 스스로가 먼저 설득돼야 한다. 스스로도 설득당하지 않는 이야기에 상대방이 설득될 리 만무하다.
삶의 목적을 다시 한번 정리해보자. 우리는 행복하려고 산다. 행복하면 감탄이 저절로 나온다. 줄여서 말하자. ‘우리는 감탄하려고 산다.’ 감탄은 인간을 다른 동물과 구별 짓는 가장 중요한 특징이다. 어설픈 구라가 아니다. 인간 문명의 비밀은 바로 이 ‘감탄하기’에 있다.
감탄 때문이다.
다른 곳에서는 아무도 나보고 감탄해주지 않는다. 그러나 골프장에서는 감탄이 된다. 그것도 네 시간, 다섯 시간 동안 계속된다. 그래서 골프에 그토록 미치는 것이다.
내 삶이 어려운 이유는 간단하다. 경제가 어려워서가 아니다. 정치가 개판이라서가 아니다. 이 감탄의 욕구를 채워줄 수 있는 문화적. 예술적. 종교적 체험이 부재하기 때문이다. 한국인들에게는 감탄이 존재하지 않는다. 서양 사람들은 ‘원더풀(wonderful)’이라는 단어가 아예 입에 붙어 있다. 가만히 살펴보라. 별일이 아니어도 ‘원더풀’을 끝없이 반복한다. 독일어로는 ‘분더바(wunderbar)’다. 정서적으로 거칠고 한없이 무뚝뚝해 보이는 이 독일인들도 매일 ‘분더바’를 연발한다.
내가 지금 행복한 삶을 살고 있는가의 기준은 아주 간단하다. 하루에 도대체 몇 번 감탄하는 가다. 사회적 지위나 부의 여부와 관계없다. 내가 아무리 높은 지위에 있다 할지라도, 하루 종일 어떠한 감탄도 나오지 않는다면 그건 내 인생이 아니다. 바로 그만두는 게 정신건강에 좋다. 내가 아무리 돈을 많이 벌어도 그 돈으로 매개된 감탄이 없다면, 그 돈은 내 것이 아니다.
20세기 후반, 역사상 유례없는 대한민국의 발전을 가능케 했던 동력은 다음 시대의 발목을 잡게 되어 있다. 산업사회의 압축성장을 가능케 했던, ‘근면. 성실’이라는 가치가 새로운 시대로의 변화를 가로막는다는 이야기다. 근면. 성실하지 말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참고 인내하는 근면. 성실은 아무 소용없다는 뜻이다. 참고 인내하는 방식으로는 누구도 창조적일 수 없기 때문이다.
독일의 IT 관련 산업의 발전이 그들이 가지고 있는 잠재력에 비해 상당히 느린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예측이 되지 않는 분야이기 때문이다. 원칙을 세워 대비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기에 투자할 수도 없다. 대신 예측 가능하고 안전한 자동차와 같은 기계산업에 집중 투자한다. 그래서 여전히 독일 자동차가 세계 최고인 것이다.
반면 한국이 IT 분야에서 눈부신 발전을 이룩한 것은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유연한 사고’와 ‘무모할 정도의 과감함’ 때문이다. 그 과감함이 한편으로는 고속성장의 원인이 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온갖 사고와 혼란의 원인이 된다.
정말 많은 분들이 내 이야기에 공감을 전해왔다. 과분할 정도의 관심과 사랑을 받았다.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사십 대 후반의 철없는 ‘내 이야기’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삶의 재미는 ‘내 이야기’가 있을 대 생긴다. 건강한 사회는 각자의 ‘내 이야기’가 풍부한 사회다. 그래서 ‘스토리텔링의 시대’라고 하는 것이다.
보다 많은 이들과 ‘내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사람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려 한다. 자신이 하는 일, 사회적 관계 등등. 그러나 세상에 바보 같은 짓이 ‘사회적 지위’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는 일이다. 사회적 지위는 반드시 변하고, 사라지기 때문이다. 제 아무리 높은 지위라 할지라도 길어야 10년이다. 연임이 불가능한 우리나라 대통령 임기는 고작 5년이다. 그 후 죽을 때까지 ‘전 대통령’으로 살아가야 한다. 과거의 지위로 미래를 살아가는 것처럼 서글프고 초라한 일은 없다.
내 존재는 내가 즐거워하는 일로 확인되어야 한다. 내가 즐거워하는 일로 존재를 확인하면 관계에서 확인되는 존재 역시 언젠가는 다시 작동하게 되어 있다. 처칠의 아내는 온갖 소문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처칠의 곁에 머물렀다. 존재가 확인되면 사회적 지위는 부산물로 얻어지게 되어 있다. 처칠이 위대한 이유는 그림을 그렸기 때문이다.
덤으로 처칠은 우리에게 우아하게 나이 들어가는 방법을 한 가지 알려준다. 자신만의 트레이드마크를 개발하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시간이 날 때마다 자신의 옷을 스스로 디자인해 입었다. 촌스러워 보이는 그의 군복 스타일의 옷은 다 자신이 디자인한 옷이다. 손가락으로 승리의 ‘V’를 그려 보이는 것도 스스로 연출한 트레이트 마크다. 그가 독한 시가를 항상 물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2020년도 참 열심히 일했다.
되돌아보니, 열심히 일하는 것은 한계가 있었다.
스마트해야 한다.
창의적이어야 한다.
무엇보다 재미있어야 한다.
열심히 하는 것은 더하기다.
1+2+3+4... 다.
창의적인 것은 곱하기다.
1x2x3x4... 다.
김정운 교수님의 창의적인 이야기를 통해
2021년을 얼마나 창의적이고 재미있게 즐길지 상상해 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