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해와 이해는 ‘나’와 ‘내’가 하는 것이다.
TV는 거의 보지 않는다.
시간 낭비라는 생각을 많이 하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최근에 꼭 챙겨보는 프로그램이 생겼다. 바로 오은영 박사님에게 육아, 그리고 부모에 대해 많이 배울 수 있는 ‘금쪽같은 내 새끼’라는 프로그램이다.
오은영 박사님의 가르침이 무척 마음에 와 닿아, 오은영 박사님의 저서, ‘오은영의 화해’를 읽었다. ‘오은영의 화해’를 통해 생각하게 된, ‘부모, 육아, 사과, 용서, 화해’에 대한 좋은 표현들을 적어본다.
부모는 아이에게 우주입니다. 그 우주가 안전하고 그 우주에서 사랑받고 존중받는다고 느끼고 신뢰가 형성되어야 아이는 편안하게 자랄 수 있어요. 부모는 ‘부모’라는 이름으로 아이에게 해야 하는 상호작용이 있고, 주어야 하는 사랑이 있습니다. 이것은 아이가 부모에게 잘할 때만 주는 것이 아니라 조건 없이 주는 것입니다. 이 사랑을 받았다고 느끼는 아이는, 부모가 곁에 없어도 편안합니다. 이 사랑을 받지 못한 아이는 부모가 곁에 있어도 불안합니다. 부모가 곁에 있어서 더 불행합니다.
가슴 아프지만 부모님이 이제 와서. 진심 어린 사과를 할 거라고 기대하지 마세요. 대부분 사과하지 않습니다. 사과를 받아야만 나의 상처가 치유되고 마음이 편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사과받는 데 매달리면 부모가 끝내 그 기대를 저버리고 떠날 경우에 더 큰 상처를 받을 겁니다. 부모에게 사과를 받는 것이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지금 당신에게는 자신의 마음을, 자신의 오랜 아픔을 부모에게 털어놓는 그 시도 자체가 중요해요.
용서는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고차원적인 가치지요. 하지만 강요할 수는 없습니다. 용서를 하고 안 하고는 그 사람의 마음이에요. 그 사람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이해도 마찬가지예요. 내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누구도 나에게 강요할 수는 없어요. 부모를 이해하려고 지나치게 애쓰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부모가 준 상처들은 영영 아물지 못할지도 몰라요. 이해가 안 되면 안 되는 채로, 용서가 안 되면 안 되는 채로 있어도 괜찮아요. 그렇게 살아도 괜찮습니다. 그것이 당신의 감정에 대한 존중입니다.
학대하고서는 훈육했을 뿐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많아요. 그리고 평범한 부모도 훈육이라고 하면서 그 과정에서 잘못된 방식을 쓰는 경우를. 굉장히 많이 목격합니다. 흔히 훈육과 학대를 헷갈려하세요. 설령 잘 가르치고자 하는 훈육의 의도라 해도 때리는 행위는 절대 안 됩니다. 소리를 지르거나 욕(이 새끼가! 이놈이!)을 해서도 절대 안 됩니다. 그 출발은 어떤 누구도 다른 사람을 때릴 권리는 없다는 데서 시작합니다. 그게 설사 부모 자식 간이라고 해도 타인을 모욕하고 때릴 권리는 없습니다. 아이가 나를 짜증나게 해도, 하지 말라는 짓을 또 해도, 나쁜 짓을 해도, 때리는 건 절대 안 됩니다.
아이를 편하게 대하고, 아이에게 상냥해지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부모는요, 무서워서는 안 됩니다. 세상에는 무서운 사람이 정말 많아요. 무서운 아저씨, 무서운 선배, 무서운 일진, 무서운 유괴범, 무서운 도둑… 그런데 엄마, 아빠마저 무섭다면 아이는 어디 가서 편안하게 마음을 열고 소통할 수 있을까요? ‘무섭다’라는 감정 자체도 스트레스예요. 부모가 무서우면 아이는 이 스트레스를 태어나서 독립하기 전까지 항상 곁에 두고 살아야 합니다. 너무 잔인하고 슬픈 일이에요. 자기를 낳아 준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좋고 편안해야 합니다.
아이가 내 말을 잘 들을 거라는 전제 자체가 육아를 힘들게 합니다. 매일매일 말 안 듣는 아이 앞에서 그럼 어떻게 할까요? 답은 하나입니다. 그냥 새날이 밝았다고 생각하세요. 우리는 어제 세수하고 오늘 또 세수해요. 새날이 밝았으니까요. 우리는 어제 양치하고 오늘 또 양치합니다. 새날이 밝았기 때문입니다. 30분 전에 해 줬던 말, 아이가 못 지켰습니다. 새날이 밝은 겁니다. 또 세수하듯이 또 양치하듯이 새날이 밝은 겁니다. 아이의 행동에 의미를 부여하지 말고 그냥 또 말해주세요. 육아는 상황 상황마다 새날이 밝은 거라고 생각해야 마음이 좀 낫습니다. 아이가 또 말을 안 들으면 ‘아, 또 새날이 밝았구나’ 생각하세요. 새날이 너무너무 자주 오더라도 눈 한 번 질끈 감고, 심호흡 한번 크게 하고 ‘새날이 밝았구나’ 생각하세요. 저도요, 그렇게 키웠습니다.
아이를. 존중한다는 것은 뭘까요? 이 아이의 인생을 내가 좌지우지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 아이와 내 생각이 다를 수밖에 없다는 것을 그냥 받아들이는 것이에요. 내가 생각하는 행복의 기준이 내 아이가 생각하는 행복의 기준과 다를 수 있다는 것을 편안하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화해는 ‘내’가 ‘나’와 하는 겁니다. 부모는 죽을 때까지 ‘나’에게 사과하지 않을 수 있어요. 우리는 죽을 때까지 부모를 용서하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그 마음, 그냥 그대로 두세요. 누구도 나 아닌 남을 어쩌지 못해요. 부모도 내가 아닌 이상 남입니다. 결국 ‘내’가 화해해야 하는 것은 ‘나’예요.
속절없이 당했던 ‘나’와 화해하고, 이 사람들이 나를 망치면 어떻게 하지 했던 ‘나’와도 화해해야 합니다. 자신을 형편없이 생각했던 ‘나’와 화해해고, 자신을 비난했던 ‘나’와 화해하고, 자신의 나쁜 면에 진저리를 쳤던 ‘나’와 화해해야 합니다. ‘나’ 자신을 세상의 가장 초라하고 작은 존재라고 여겼던, 그래서 ‘나’는 어떤 것도 가질 수 없고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느꼈던 ‘나’와 화해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제는 힘도 있고 작지도 않은데 여전히 하염없이 내리는 비를 맞으면서 웅크리고 앉아 있는 작은 아이에게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손을 내밀어야 합니다 잊는 그만 일어나 새로운 창 앞에 서라고 말해 주세요.
나의 내면과 내가 손을 잡는 것이 ‘나와 화해’하는 시작입니다.
저희 집에 있는 인공지능 스피커에게 알람을 맞춰 달라고 했습니다. 그때 시간이 오전 7시 30분이었는데 제가 착각하고 오전 7시 15분에 맞춰 달라고 했어요. 그랬더니 말하더군요. “지나간 시간은 세팅할 수가 없습니다. 기계가 한 말이지만 그 말을 듣고는 제 마음에 깊은 울림이 있었습니다. 아! 그래요. 지나간 것은 그것이 영광이든 상처든 이제 ‘내’가 주도적으로 어떻게 할 수가 없는 시간이에요. 타임머신을 타고 가지 않는 한, 그냥 지나온 것입니다. 그 지나온 것으로 깨달음도 있고, 상처도 있고, 어떨 때는 너무 아쉽고 슬프고 굴욕감도 느끼지만, 지나온 것은 ‘내’가 어떤 힘을 행사해서 변화시킬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지나온 것은 그냥 되돌아볼 수 있는 자료일 뿐입니다. 좋은 결과가 나왔든 나쁜 결과가 나왔든 그것은 ‘나’의 긴 인생의 행로에 그저 일정 기간일 뿐이에요. 지나온 것은 이제는 지나가 버린 것입니다.
두 집의 싸움은 하루가 멀다 하고 벌어졌고, 소송과 재판으로까지 이어졌습니다. 마을 사람들조차 혀를 내두를 정도였지요.
그러던 어느 날, 그러니까 농부가 이웃 농부와의 재판에서 이긴 날이었습니다. 그날 밤 농부는 이웃 농부가 자신의 집 헛간에 쌓아 놓은 짚단에 불을 붙이는 것을 보았어요. 농부는 이웃 농부를 현장에서 붙잡아 크게 벌을 줄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정신없이 도망가는 이웃 농부를 죽기 살기로 뒤쫓았습니다. 그런데 농부가 막 이웃 농부를 잡으려고 하는 순간, 나무 막대기에 머리를 맞고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농부가 정신을 차려 보니 짚단에 붙었던 작은 불은 큰 불길이 되어 농부의 집은 물론 이웃 농부의 집까지 다 태우고 그 마을의 절반을 태운 뒤였습니다. 농부는 잦아드는 불길을 바라보면서 정신이 나간 듯 같은 말을 되풀이했어요. “불붙은 짚단을 바로 꺼내어 짓밟아 껐더라면… 그냥 짚단만 끌어냈으면 되었을 것을…”
러시아의 대작가 톨스토이의 단편집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명절이 끝나가고 있다. 부모님을 뵙고 오면, 마음이 편하지 않다. 나는 아버지가 싫었다. 매일 술만 마시고 담배를 피는 아버지가 싫었다. 최근에는 어머니에게도 마음이 떠나고 있다. 어디서 들으신 이야기를 나에게 강요하는 모습이 싫다. 항상 남들 이야기를 하면서 나와 우리 가족을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는 것 같아서 싫다. 부모님을 싫어하는 내 모습도 싫다. 부모님을 미워하는 것 같아서 죄송한 마음이 든다. 내 아이들도 나를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부모님을 뭐라 하지만, 나도 좋은 부모는 아닌 것 같다.
어디서부터가 문제일까? 오은영 박사님은 상대방의 말과 감정은 그대로 흘려버리라고 조언을 하신다. 상대방의 말과 감정에 의미를 부여하고 생각으로 반응하면 서로가 오해를 하게 된다. 아마도 나는 부모님을 오해하고 있었나 보다. “술 마시지 말아라”는 말은 ‘건강 잘 챙겨라’는 말로, “찬물 마시지 말아라”는 말은 ‘마시는 것도 항상 따뜻하게 잘 챙겨 마셔라’는 의미로 생각해야겠다.
나도 표현이 많이 서투른 아빠다. 부모님도 연세가 많이 드셨지만 아직도 표현이 많이 서투르신 것이라 생각해야겠다. 오은영 박사님 말씀처럼 화해는 ‘나’와 ‘내’가 하는 것처럼, 이해도 ‘나’와 ‘내’가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