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회에는 어떤 대통령이 필요할까요?
'누구나 대통령을 알지만, 누구도 대통령을 모른다'라는 문구에 눈길이 가, '대한민국의 대통령들'이란 책을 일었습니다. 대통령의 이름은 알아도 '몇 대 대통령인지? 어떤 업적을 가지고 있는지? 어떤 과오를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습니다. 역사적인 사건에 대해서도 들어만 보았으나, 어떤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었으며, 현대 사회가 있기까지 어떠한 역할을 했었는지? 에 대해서는 크게 생각해 보지 않았던 내용들에 대해서 많이 생각할 수 있었던 시간을 주었던, '대한민국의 대통령들'의 기억하고 싶은 역사적 내용과 대통령의 자질에 대한 이야기들을 적어 봅니다.
* 1~3대 (1948.7~1960.4)
-. 다른 가능성도 있었던 해방공간에서 그는 자유민주체제를 택한다. 학교에 자유민주주의 교육을 도입시킨 것도 그다. 하지만 그의 집권 12년 동안 자유민주주의 이념 교육에 의해 한국 사회의 가장 강력한 세력의 하나로 성장해 있던 학생집단은 그를 거부한다. 자신이 편 정책의 성공으로 자신의 통치가 부정되는 역사에서의 토크빌효과를 만든 그는 마침내 망명길에 오른다. (P.17)
* 내각책임제 (1960.8~1961.5)
-. 그는 독립운동을 하거나 쿠데타로 목숨을 거는 삶을 살지 않고도 학생들이 일으킨 4.19 혁명의 결과로 정상의 자리에 오른다. 사람을 존중하는 성실한 인품의 그는 평소 소신대로 진정한 자유민주주의 정치를 펴나갔지만 결단력과 과단성을 요구하는 시대적 지도력을 제공하지 못함으로써 해방 후 한국 사회의 또 다른 세력집단으로 부상해 있던 군부에 의해 민주정체를 빼앗기고 만다. (P.61)
-. 평소 과목한 그는 아랫사람에게도 늘 진지한 태도로 그들의 의견을 존중해 주고 인격적으로 대해주었는데, 이 점과 관련하여 훗날 국무총리를 역임한 강영훈은 다음과 같은 일화를 들려주었다.
내가 (주미 대사관) 무관으로 갔던 1952년의 일입니다만, 장면 대사를 자동차로 모시던 인도 출신의 운전기사가 있었는데, 나한테 가끔 장 대사의 안부를 물어요. 그래 어째서 장 대사의 얘기를 가끔 하느냐고 그러니까 "저는 장 대사를 존경합니다" 그러면서 얘기가 "그분은 나를 일개 운전사로 대하는 게 아니고 친구로서 대해주셨습니다" 그런 얘기였어요. 그래서 지금의 양유찬 대사는 어떠냐고 물어보니까 "그분은 저를 일개 고용인으로 보고 시간 외 근무를 하면 돈도 더 주고 해서 고맙지만, 장면 대사는 제가 근무 외에 무슨 일을 한다고 해서 돈을 더 준 분이 아니지만 저를 친구로 대해주셨기 때문에 그분을 존경합니다"라고 하는 거예요. (P.68~69)
-. 귀국 후 신앙심에 기초한 그의 인격에 대한 일화로는 동성상업학교 교장 시절의 것이 전해진다. 4학년 학생 3명이 신학을 더 배우고자 로마로 유학을 갔다가 신품을 받고 귀국하여 모교를 찾아왔을 때, 일본인 교사들은 그들을 "기미(자네)"라고 불렀고, 체육 선생 이모 씨는 신자이면서도 "어서들 오게"하고 반말로 맞았으나 교장인 장면만은 "아, 신부님들 오셨습니까"하고 깍듯이 그들을 대접했다. 동료교사였던 유동진은 이렇게 기록한다.
놀란 것은 나뿐만 아니었다. 주위의 모든 교사들이 크게 경탄해 마지않았다. 우리의 놀람은 곧 장 박사를 경외하는 마음으로 변했다. 그분은 그 제자 신부들에게 처음부터 끝까지 스승이요, 교장의 신분이 아닌 평신도로서 신부를 대하는 예를 갖추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때의 장 박사 태도에 감복되어 얼마 후에 신도가 되었고, 신도가 된 후에 나도 신부에게 절대로 평어를 쓰지 않고 존경어를 쓰게 되었다. (P.72)
* 4대 (1960.8~1963.12)
-. 그가 민주당 구파의 지도자로 급부상하게 된 데는 조용하고 신사적이며 중후한 영국신사의 이미지도 한몫한다. 민주당 구파의 몫으로 내각책임제하의 대통령이 된 그는 사회혼란을 구실로 쿠데타를 일으킨 군부세력이 결국 자신에게 정권을 넘길 거라는 기대와 오판하에 쿠데타를 추인한다. 그러나 결과가 다르게 나타나자 그는 '민주화투쟁'이라는 이름의 '반 박정희' 운동을 벌인다. (P.103)
* 5~9대 (1963.12~1979.10)
-. 그는 국민이라는 이름의 환자를 치료하는 의사를 자임한다. 가난이라는 병을 수술하기 위해 쿠데타를 일으켰다는 그는 가난을 고치기 위해서는 민주주의를 제한할 수 있다면서 '민족적 민주주의'를 제시한다. 그리고 '하면 된다'는 정신과 함께 개발독재의 강력한 추진력으로 산업화를 밀어붙였다. 그의 혁혁한 공적인 '경제개발'과 과거지향적인 '10월 유신'의 정치적 과오도 바로 거기서 나온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P.147)
* 10대 (1979.12~1980.8)
-. 그는 우유부단하거나 무능한 사람이 아니다. 개인으로서는 원칙에 충실하고 성실한 인간이고, 외교관으로서는 유능하고 뚝심 있는 관리이며, 공직자로서는 엄정하고 청렴한 행정가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대통령으로서의 그는 유혈의 비극을 막는 뚝심이나 지도력은 보여주지 못한다. 그런 그를 세간에서는 '최 주사'라고 부른다. 글라이스틴 주한 미대사는 "현명하게도 최규하는 전두환에 대항해 국민적 지지를 동원하려 들지 않았다"고 말한다.(P.191)
-. 외무장관 자리에서 물러난 1973년부터 대통령 외교담당 특보로 있던 그는 제1차 오일쇼크를 해결하기 위해 중동을 방문했다. 최규하는 사우디 국왕이 한국 근로자들의 '횃불도로공사'에 감명받고 있다는 점과 그가 공산주의를 싫어한다는 점에 착안하여 이렇게 말했다.
"우리 한국 노동자들은 사우디의 발전을 위해 횃불을 밝혀가며 철야공사를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공산세력과 대치하고 있는 우리 한국은 지금 오일쇼크로 큰 곤란을 겪고 있습니다. 기름이 없으면 공산세력과 싸워 이길 수가 없으니 국왕께서 선처해 주시기 바랍니다."
공산당과 이스라엘을 미워하던 사우디 국왕의 기분에 꼭 들어맞는 발언이 주효했다. 회담은 성공적이었다. 국왕으로부터 종전 수준의 석유를 계속 공급받는다는 언약을 받아냈던 것이다. (P.203)
-. 야심이 있거나 도전하는 2인자를 용납하지 않았던 박정희에게 최규하의 온순한 성품과 태도는 마음에 들 만한 요소였는데, 당시 일선기자였던 한 언론인은 그 점을 이렇게 묘사했다.
총리시절 그는 행사 참석이 줄어든 박정희 대통령을 대신하여 공식치사와 격려사 등을 읽는 경우가 많아 '대독총리'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대통령 치사를 대독한 뒤에는 박수를 치고 환영하는 군중들에게 손이라도 한 번 흔들어 줄 만한데도, 일체 그 같은 제스처 없이 군중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고개를 푹 수그리고 빠른 걸음으로 퇴장하는 것이 그의 스타일이었다. 이런 자세 때문에 여당의 역학관계를 잘 아는 사람들로부터 '장수형 국무총리'라는 평가를 받았다. (P.204)
* 11~12대 (1980.8~1988.2)
-. 5.18 광주민주화운동 후 TV '땡전뉴스'에 등장하던 전두환의 표정은 근엄하고 무서웠지만 국민들 눈에는 박정희를 교본으로 삼아 움직이던 그가 한편으로는 우스꽝스러운 존재로 보인다. 국가 재건최고회의는 국가보위비상대책위로, 국토건설단은 삼청교육대로 이름만 바꿔 흉내 낸 5공은 마치 3공의 모조품 같지만 만성적인 인플레를 잡고 무역적자를 흑자로 돌려놓은 것은 그의 경제업적이기도 하다. (P.235)
-. 유사에 들어간 뒤에도 축구부 주장으로 교우의 폭을 넓히며 동료들을 리드해 나갔다. 골키퍼였던 그의 활약에 힘입어 육사는 전국대학 축구대회의 준결승에 진출하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는데, 훗날 대통령이 된 그는 "골키퍼는 할 게 못 됩니다. 다른 사람은 백 번 실수하다가도 한 번 골을 넣으면 스타가 되는데 키퍼는 백 번 잘하다가도 한 번 실수하면 욕을 먹어요"라고 우스갯소리를 했다.
하지만 그는 광은 나지 않으면서 책임은 무거운 골키퍼 역할이 구성원 전체에 대해 무한책임을 져야 하는 리더의 몫이란 것을 일찍부터 체득했던 것 같다. 이 점에 대해 훗날 그는 "나는 부하들에게 100% 충성한다. 그러나 나는 부하들이 50%만 충성하기를 기대한다"는 말로 요약한 일이 있다. (P.242~243)
* 13대 (1988.2~1993.2)
-. 재임 5년 동안 그는 중국을 포함한 45개국과 수교하는 성과를 올린다. 적대 국가들과 국교를 맺고 북한과의 관계를 개선하면서도 전통적인 한미동맹을 약화시키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는 북방정책의 바람직한 모델을 제시한다. 그러나 경제적으로는 인천공항, 서해안고속도로, KTX, 주택 200만 호 건설 등 대형 공사에 너무 많은 돈을 쓴다. 흑자경제에 자만한 것에 대해 외국 언론들은 "한국이 샴페인을 너무 일찍 터뜨렸다"고 비웃는다. (P.279)
-. 혜택을 입은 2인자의 입장에서도 그 지위를 계속 유지해 나가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아주 오래전 <뉴욕타임스> 일요판에서 읽었던 것 같은데, 한 특파원이 저우언라이에게 2인자의 장수비결이 무엇인가를 물어보았더니 그는 마오쩌둥의 주석궁 쪽으로 눈길을 돌리며 "모든 영광을 윗분에게!"라고 대답했다는 기사가 기억난다.
이 점과 관련해서 노태우도 1980년 가택연금된 김종필을 찾아가서 1인자와 틈이 벌어지지 않는 비법을 물어보았고, 그로부터 "같이 걸을 때조차 그림자를 밟지 않도록 한 걸음 물러나서 걷는 것"이라는 대답을 얻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그런 충고 때문이었는지 노태우는 내무장관 시절 전두환이 부른다는 전갈을 받자 "내가 지금 감기가 몹시 들었는데 대통령에게 옮기면 안 되니 다음으로 미루어달라"고 한 적이 있다. 이 말을 전해 들은 전두환은 "노 장관이 최고다. 저렇게까지 나를 위하는구나"하고 흐뭇해했다는 것이다.
다음 수순은 기다림이다. 2인자가 실각하는 것은 대개 마음이 성급해서 자기 때를 기다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인내심 면에서 새가 울지 않으면 '울 때까지 기다린다'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곧잘 비교되던 노태우는 "만에 하나 내가 대통령이 되고 싶어 하는 언동을 하고 다녔다면 대통령이 되기는커녕 어떤 비운을 겪었을 게 틀림없었을 것"일고 회고하기도 했다. 발톱을 숨기는 것이 2인자의 성공 요령이다. (P.281~282)
* 14대 (1993.2~1998.2)
-. 대통령에 취임한 김영삼은 "나는 돈을 받지 않겠다"며 자신의 재산을 먼저 공개한 다음 공직자의 재산등록을 실시토록 한다. 그 결과 재산이 과도하게 많은 3000여 명의 공직자들이 구속, 파면 또는 징계된다. 이를 본 국민들은 "살맛 난다"고 열광했고, 그는 95%의 지지율에 힘입어 군부의 하나회를 제거하고 금융실명제를 전격 실시한다. 그의 인기정책은 세계화 및 OECD 가입을 위한 금융시장 자유화로 이어지나 뒤이어 닥치는 IMF 환란은 막지 못한다. (P.321)
-. 그가 체득한 한 가지는 아무리 강력한 군인이라도 군복을 벗기면 그만이라는 사실이었다. 이때 중요한 것은 스피드였다. 군은 특수조직인데다 하나회 같은 사조직은 오랜 세월 자기들끼리 똘똘 뭉친 집단이라 언제든 세력을 재규합해 저항해 올 가능성이 높았던 것이다. 그래서 세력 규합의 시간적 여유를 주지 않는 것이 중요했다. (P.346)
-. 미국에서는 장관을 Secretary라고 한다. 대통령제하에서는 장관이 바로 대통령의 비서인 까닭이다. 따라서 각 부처의 일은 야전비서인 장관에게 맡기고, 청와대 안의 비서는 자기가 속한 부문에서 어떻게 하면 대통령의 존재를 선전하고 홍보할 수 있는가에 전념해야 한다. 부서 간의 조정업무도 부서 자체에 간섭할 것이 아니라 대통령의 존재를 부각시키는 차원에 머물러야 한다. 대통령의 인기가 높아야 개혁도 그 무엇도 할 수 있는 것이니까 말이다. (P.350)
* 15대 (1998.2~2003.2)
-. '인동초'라는 별명이 붙을 만큼 어려움이 많았던 그는 색깔론 이외에도 온갖 야유와 냉소를 받으면서 대선 4수 만에 대통령이 된다. 전임 정권이 초래한 IMF 환란을 단기간 내에 수습한 그는 '생산적 복지'라는 개념하에 사회안전망 확충을 위해 노력하고, 새로운 먹거리를 위해 IT 산업을 일으킨다. 또 민족분단의 고통을 치유하기 위해 햇볕정책이라는 이름으로 남북교류 시대를 연다. 수평적 정권교체를 이루었던 그는 2기 진보정권의 길도 연다. (P.365)
* 16대 (2003.2~2008.2)
-. 특권과 반칙을 이용해 부를 거머쥔 기득권층에게 부의 정당성을 질문하면서 정의가 승리한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려던 열정의 정치인 '바보 노무현'은 끝내 '사람 사는 세상'을 만들지는 못하고 기득권층의 강고한 벽에 부딪혀 생을 마감한다. 그러나 개천에서 용 났던 존재 자체가 서민들의 꿈이요 위안이었던 그는 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영원한 그리움으로 남아 있다. (P.409)
-. 포레스트 검프의 법칙이 '노사모'의 형태로 나타나리라는 것까지는 노무현 자신도 몰랐을 것이다. 그러나 누군가는 반드시 자신의 원칙주의를 알아주리라 기대했을 텐데, 과연 그를 알아본 사람들이 있었다. 그중 하나가 당시 삼성에 근무하던 유중희라는 40대 후반의 직장인이었다. 5공 청문회를 통해 처음 알게 된 뒤 "편한 길을 내버려 두고 올곧은 한길을 걸어온" 노무현을 개인적으로 좋아했다는 그는 2000년 3월 22일 유니텔플라자에 이런 글을 올렸다.
그는 이번에도 또 부산에서 출마하겠다는 바보의 길을 택하고 있다. 그러나 이번은 노무현만이 바보가 아니라 그 지역구의 유권자들도 같이 바보이기를 바라고 싶다. '바보 노무현'을 국회의원으로 뽑아주는 바보 같은 부산 시민들! 노무현 바보! 부산 시민 바보! 그리고 나도 그 바보의 대열에 끼고 싶다. (P.424)
* 17대 (2008.2~2013.2)
-. 경제인 출신의 그는 정치인 출신보다 더 사안의 핵심을 잘 짚는 유능한 인물이었지만 회사와 정부를 혼동하고 정치의 궁극적 목표가 '통합'에 있다는 것을 간과한 것 같다. 그랬기 때문에 자신을 반대한 나머지 세력에 대한 배려와 설득을 외면하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열심히 추진한다. 얼리버드처럼. 하지만 누구를 위해 열심히 일했는지 국민은 의문을 갖는다. (P.453)
* 18대 (2013.2~2017.3)
-. 9세 때부터 27세까지 청와대의 공주로 자란 그녀에게 청와대는 늘 돌아가야 할 자신의 집이었을 따름이다. 그 집에서 공과 사를 구분하지 못하고 나라를 사유화한 채 국정을 비선에 의지한다. 당초부터 권력욕은 강했으나 그 권력욕을 성취하고 나서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비전은 없다. 아버지 시대의 정당화에만 관심을 두었던 공주를 탄핵한 것은 피플파워다. (P.499)
개인적으로는 정치에 대한 관심이 적습니다. 특히 'O공화국'과 같은 표현은 왠지 모를 군부독재를 연상시키는 이미지 때문에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생각이 많이 바뀌었습니다. 우리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을 잘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잘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도 공부하고, 교훈을 얻는 과정이 필요할 것입니다. 특히 역사에 대해서는 단군시절, 삼국시대와 같이 오래된 역사도 중요하지만, 대한민국이 수립되어 지금까지 어떤 배경으로 지금의 사회가 형성되었는지를 아는 것도 중요한 가치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몇 십 년 전의 역사적 배경을 바탕으로 현대 사회가 만들어진 것이고, 또한 당시 대한민국을 만들었던 시대와 함께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대한민국을 이끌었던 대통령들에 대한 이야기를 읽으면서, 대한민국이 어떤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지도자를 선택해 왔는지? 각 대통령의 리더십 스타일에 따른 장단점은 어떠한지를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앞으로 탄생할 대통령을 비롯하여 수많은 사회 지도자들이 대한민국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훌륭한 대통령과 지도자가 있기를 기대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