빵을 사면서 기업가 정신을 생각했습니다.
지방 출장이 잦은 저는, 대전도 자주 갑니다.
혹시라도 대전역에 내리게 되면 자연스럽게 찾게 되는 빵집이 있습니다. 바로 성심당입니다.
성심당에서 빵을 사다 보면 단순히 맛뿐만 아니라, 성심당 특유의 밝은 분위기에 기분이 좋아집니다. 성심당만의 밝은 분위기의 원천이 궁금해서 읽게 된 책, ‘성심당’의 기억하고 싶은 이야기들을 적어 봅니다.
임길순은 오기선 신부를 만나 흥남부두를 탈출해 거제와 진해를 거쳐 대전역에 도착하기까지의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이야기를 듣자마자 오신부는 미국에서 지원받은 밀가루 중 두 포대를 임길순 가족을 위해 선뜻 건네주었다. 밀가루 두 포대를 받아 든 부부는 이를 가족의 식량으로 소비하는 대신 찐빵 장사를 시작하기로 했다. 대전 성심당의 첫출발이었다.
그런데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다. 철거반을 지휘하던 반장이 철거 명령을 내리는 대신 철수 명령을 내린 것이었다. 그들은 성심당의 티끌 하나도 건드리지 않고 그대로 돌아갔다. 나중에 알고 보니 구청의 지시가 아니라 철거반장의 독자적인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그는 어릴 때 아버지를 여의었다. 워낙 가난해서 장례를 제대로 치르지 못하고 있을 때 임길순이 찾아와 염부터 입관까지 장례 일체를 치러준 일이 있었다. 어릴 때였지만 철거반장은 그 장면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성심당 철거를 포기하고 철수한 철거반장은 그 길로 구청장을 찾아가 면담을 신청했다. 구청장에게 그동안의 자초지종을 설명하며 다음과 같이 간청했다고 한다.
"아버지 장례 때 진 빚을 언젠가는 갚겠다고 다짐했는데 오늘이 바로 그날인 것 같습니다. 그 빚을 갚을 수 있게 구청장님을 선처해 주시길 바랍니다."
철거반장의 진지한 간청에 구청장도 공감했고, 덕분에 성심당은 위기를 무사히 넘길 수 있었다. 그리고 작은 일 하나라도 소홀함 없이 제대로 절차를 밟아야 한다는 큰 교훈도 덤으로 얻었다.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지만 그 당시 모든 새로운 것은 서울에 있었다. 온갖 사람과 기술이 모였고 신기하고 재미있는 것들도 가장 먼저 서울에서 시작했다. 서울에 차고 넘치면 그제야 지방으로 하나둘 새로운 문화가 퍼져나갔다. 지방에 사는 많은 사람들은 서울을 동경하는 것과 동시에 상대적인 박탈감을 느끼기도 했다. 편리한 교통으로 다른 어느 지역보다 서울에 드나들 기회가 많았던 대전 사람들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성심당이 서울 빵집에서도 보기 어려운 포장빙수와 생크림 케이크를 연달아 내놓자 대전 시민은 환호하면서 성심당의 빙수와 케이크를 자랑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성심당은 대전의 자부심입니다', '성심당은 대전의 문화입니다'라는 슬로건이 등장했다. 모두 대전 시민들이 직접 지어준 것이었다.
1985년 어느 날 영진은 바로 옆 다방을 찾아가 그 건물을 팔 의향이 없는지 물어봤다. 그때 영진은 건물 시세에 10% 밖에 안 되는 돈을 가지고 있었다. 그쪽 입장에서는 난데없는 제안이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그 자리에서 거절당했다. 그러나 그 당돌한 제안이 다방 주인의 기억에 남았다. 그로부터 얼마 있지 않아 다방 주인이 더 큰 부동산을 매입할 기회가 생겨서 건물을 매각하려 했다. 그 첫 번째 협상자는 바로 영진이었다. 거래는 순조로웠다. 1986년 성심당은 다방 건물을 인수해 두 배로 규모를 확장했다.
그러나 화재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었다는 사실을 영진과 미진이 알아차리기까지 단 하루면 충분했다. 이튿날 화재 현장에 모인 직원들은 함께 해결책을 모색하며 복구 의지를 다졌다. '잿더미 속의 우리 회사 우리가 일으켜 세우자!'라는 현수막이 내걸렸고, 청소와 함께 임시 공장 복구 작업이 빠르게 진행되었다.
직원들의 투지에 감동받은 영진은 복구 과정 자체에 의미를 부여하고 싶었다. 공군 장교 출신인 영진은 군대에서 흔히 쓰는 '작전명'을 떠올렸다. 그렇게 '프로젝트 패스오버(Pass-Over)'가 탄생했다. 패스오버는 '지나가다'라는 뜻으로 유대인이 문설주에 수양의 피를 바르고 죽음의 영이 지나가도록 했다는 유월절 이야기에서 유래된 말이다.
2005년 1월 22일의 화재는 어떠면 성심당의 마지막 장면으로 남을 수도 있었지만, 직원들은 재난에 굴복하지 않고 새로운 성심당의 역사를 써 내려갔다. 그래서 성심당 구성원들은 이날을 '제2의 창업일'이라고 부른다. 성심당의 경영진은 위기 속에서 어설픈 벤치마킹에 매달리기보다는 스스로 본질을 찾으려고 애썼다. 선대 때 만들어진 성심당의 정체성을 새롭게 정의하면서 자신들의 이야기로 재탄생시키는 데 성공한 것이다.
1956년 대흥동성당의 오기선 신부가 건넨 밀가루 두 포대로 시작한 성심당은 2016년 60주년을 맞았다. 2016년 1월 4일, 성심당은 직원과 가족 35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비전 60'을 선포하며 비전선포식을 가졌다. 이날 발표한 비전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서로 사랑한다. 우리는 사랑의 문화를 이룬다. 우리는 가치 있는 기업이 된다.'
매출과 사업 확장이 아니라 서로 사랑하는 회사로 거듭나자는 내용이었다. 이어지는 프로그램도 다른 기업과는 다른 이색적인 내용으로 채워졌다. 15년 이상 근무자에게 수여하는 장기근속상, 회사 내에서 남몰래 사랑과 선행을 실천하는 사람에게 수여하는 '사랑의 챔피언' 시상식을 거행하며 상금과 승진 혜택을 제공한 것이다. 시상식에 참여한 수상자의 발표에 직원 모두가 눈물과 박수를 아끼지 않았다. 직원들에게 성심당은 따뜻한 '우리 회사'이자 소중한 삶의 일부였다.
그러나 정작 성심당은 서울의 롯데백화점에 입점해 달라는 요청을 사양했다. 롯데백화점뿐만 아니라 많은 유통업계에서 파격적인 조건을 제시하며 서울 입점 러브콜을 보냈지만 모두 거절했다. 서울은 대전과 비교할 수 없는 규모의 매출을 기대할 수 있는 곳이지만, 성심당은 대전을 벗어나지 않기로 결정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성심당이 굳이 대전을 벗어나서까지 영업해야 할 이유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미진은 이렇게 말했다.
"대전을 벗어나 서울에 자리 잡은 성심당을 과연 성심당이라 부를 수 있을까요? 물론 돈은 지금보다 훨씬 많이 벌겠지만 돈을 많이 버는 대신 우리의 본질을 잃을 수도 있다고 판단했어요. 대전 사람들이 외지에서 온 손님들에게 성심당을 소개하고, 빵을 선물하며 대전에 성심당이라는 역사를 지닌 로컬 기업이 있다는 데 자부심을 느끼는 모습을 보면서 대전에 와야만 만날 수 있는 빵집으로 그 가치를 지키고 싶었습니다."
성심당과 이곳 포장마차들 사이가 각별한 이유가 또 하나 있다. 성심당 본점 1층 골목길을 보면 수도꼭지 하나가 바깥으로 나와 있다. 포장마차들이 맘 편히 물을 쓰도록 일부러 설치한 것이다. 성심당은 오랫동안 무상으로 물을 공급해 왔는데 언제부턴가 포장마차 주인들이 자발적으로 형편껏 수도세를 내기 시작했고, 성심당 골목길 포장마차들은 이렇게 30년 넘게 공생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기존 상권과 노점상은 공생보다는 갈등하는 경우가 많다. 한정된 손님을 두고 경쟁하는 사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전 은행동의 성심당 골목은 그렇지 않다. 성심당은 포장마차들 때문에 빵집에 들를 손님들을 뺏긴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포장마차 덕분에 골목이 더 활기 넘친다고 생각한다. 성심당 직원들에게도 포장마차의 메뉴들은 훌륭한 먹을거리다. 제빵사들도 똑같은 대한민국 청년들인데 어찌 하루 종일 빵만 먹고살 수 있으랴.
레빈은 노동에 몰입할 때 엄청난 행복을 느꼈다. 그러나 그것만이 아니었다. 더 놀라운 일이 그다음에 이어졌다. 그가 그토록 바라던 농민들과의 소통이 바로 그 순간 가능해진 것이다. 레빈은 농부들 곁에 자리를 잡았고, 농부들 또한 그들 주인을 어려워하지 않았다. 레빈은 나이 든 농부의 집안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그 이야기가 얼마나 재미있었는지 '그는 형보다 농부 영감이 더 가깝게 느껴졌다'고 말했다.
톨스토이는 '인간이 얻는 최고의 행복은 사람들과의 융합의 일치'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일치는 함께 노동할 때 가장 잘 이루어진다고 믿었다. 톨스토이가 보기에 노동은 사람과 사람이 중간에 아무 장애 없이, 아무 선입견도 없이 만나서 소통할 수 있게 만드는 일종의 의식이었다.
맛있는 빵집은 참 많습니다. 하지만 지역 주민을 사랑하고, 어려운 이웃을 도우며, 구성원들과 함께 성장하는 빵집은 흔치 않은 것 같습니다.
성심당 창업주 임길순 님은 6.25 전쟁 때, 남으로 내려와 아무런 연고도 없는 대전에서 찐빵 장사를 시작했습니다. 성당에서 받은 밀가루 두 포대를 가족들과 먹을 수도 있었겠지만, 그 밀가루로 찐빵 장사를 하고, 그 어려운 시기부터 주변에 더 어려운 이웃을 돌보며 살았습니다.
그렇기에 성심당 빵에는 단순히 맛이라고는 표현하기 어려운 사랑도 녹아들어 있습니다. 누군가에게는 가벼운 간식일 수 있는 빵이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힘든 시기를 극복할 수 있는 소중한 한 끼인 빵이 되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성심당은 모두를 위한 빵을 만듭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 빵은 지금의 성심당을 있게 한 모든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맛, 이윤, SNS를 생각하며 빵을 만들 때, 사랑을 실천하는 매개체로의 빵을 만들고 있는 성심당을 다시 돌아보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