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는 소중한 교훈
고전은 언제 읽어도 많은 교훈을 주는 것 같습니다.
특히 노자와 장자의 사상은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도 많은 가르침을 주곤 합니다.
노자와 장자의 가르침을 현대적 의미로 해석한 ‘노자와 장자의 기대어’의 기억하고 싶은 교훈들을 적어봅니다.
나에게 별은 목표가 아니라 목적이다. 우리는 현실에서 목적보다는 목표를 추구하며 산다. 대학이 왜 존재할까? 인간은 자기 내면의 가능성과 본성을 발견해서 미래 세계를 여는 행복한 존재가 되려고 대학에 들어간다. 이것이 우리가 대학에 가는 목적이다. 하지만 요즘 대학은 취업률을 너무 앞세운다. 방송의 목적은 세상 소식을 사람들에게 알리고 국민이 제대로 판단하여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자료를 제공하는 것이다. 그런데 방송은 시청률에만 목을 매다가, 본래 목적을 잃곤 한다. 고등학교는 왜 존재할까? 학생들에게 자기 내면의 가능성을 발견해서 밝고 힘차게 살아가는 힘을 길러주기 위해 존재한다. 그런데 어느 순간, 고등학교는 존재 목적을 잃어버리고 대학 진학률이란 목표에 빠져버렸다.
'덕'의 유지가 바로 인간을 기능적 활동에서 벗어나 본래적 인간으로 서게 만든다. 기차 안에서도 전화가 오면 전화를 받는 기능에 빠지지 않고 인간으로서 품격을 유지하기 위해 통로로 걸어 나가는 불편을 감수한다. 교회에 갈 때 이웃에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 차를 몰고 가지 않는 불편을 스스로 받아들인다. 아는 것에 매몰되지 않고 모르는 곳으로 넘어가려고 불편한 몸부림을 친다. 이렇게 하면 자신의 질량이 커지고 또 커져서 다른 가벼운 것들을 제압하는 힘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매력이고, 존경을 유발하는 요소다. 장애인 왕태가 존경받고 수많은 추종자를 거느린 이유다.
영감이란 익숙함, 습관, 정해진 생각의 방향을 그대로 따라가서는 맞이할 수 없다. 영감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방향을 바꾸는 일이 일어나야 한다.
보통은 움직임이 없는 상태, 소리가 안 나는 상태, 말이 없는 상태를 '고요'라고 한다. 고요는 형식적이든 현상적이든 조용함, 그 자체이다. 고요는 어떤 행위도 일어나지 않는 상태이지만, 모든 행위를 가능하게 하는 근원이기도 하다. 정적 또한 아무 소리가 나지 않는 상태라는 점에서 고요와 비슷하지만, 고요는 인간의 삶 그리고 존재의 활동에서 단지 소리가 없는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한 방향으로 가는 행위가 역전하는 바로 그 찰나의 순간이다.
인간은 완결된 것에는 더 이상 호기심을 가지지 않는다. 완결되지 않은 것에만 호기심을 가진다. 식당 종업원은 자신의 임무가 완결되기 전까지는 자신이 기억해야 할 주문을 전부 기억한다. 하지만 완결된 후에는 잊어버린다. 이 같은 결과를 자이가르닉은 하나의 이론으로 제시했다. 사람은 끝마치지 못했거나 완성하지 못한 일을 잊지 않고 머릿속에 간직하게 되는데 이것을 '자이가르닉 효과' '미완성의 효과'라 부른다.
왜 생각이 중요한가? 사람은 자신이 가진 생각의 높이 이상을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생각이 일정한 높이에서 작동할 때 그것을 또 시선이라고 부른다. 어떤 기관이나 국가도 마찬가지다. 시선은 삶과 사회의 전체 수준을 결정한다. 시선의 높이가 삶의 높이다. 그래서 보통 일컫는 발전이나 진보라는 것도 사실은 시선의 상승이다. 여기 있던 이 시선이 한 단계 더 높이 저 시선으로 상승하는 것이 바로 발전이다. 그런데, 이 발전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우선 자기를 지배하는 정해진 생각의 틀을 벗어나려는 도전이 감행되어야 한다. 익숙함과의 결별이다.
문과에 가서 배우는 학문을 보자. 철학, 사학, 문학, 정치, 경제, 법률, 신문방송학 등등이다. 이과로 진학한 다음에는 주로 생물학, 물리학, 지구과학, 천문학, 수학, 화학 등등을 배운다. 이렇게 나눠놓고 보면, 두 영역을 가르는 기준이 희미하게 드러난다. 이렇게 물어보자. 이 지구상에서 어떤 연유인지는 모르나 인간이 갑자기 한 명도 남김없이 모두 사라져 버렸다. 그렇다면 문과에서 배우는 학문 분야가 여전히 남아 있을까? 아니면 인간과 함께 사라지는가? 당연히 함께 사라져 버린다. 똑같은 질문을 이과 학문 대상들에도 할 수 있다. 인간이 모두 사라져도 이과에서 배우는 학문 대상은 여전히 존재한다. 이렇게 본다면 우리가 문/이과를 선택할 때, 인간이 사라져도 여전히 남아 있는 것에 관심이 있으면 이과를 가고, 인간이 사라질 때 함께 사라져 버리는 것에 관심이 있으면 문과를 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이 개입했느냐 개입하지 않았느냐가 관건이다.
노자는 우리가 성공의 기억에 갇히는 것을 경계하라고 다음과 같이 권한다.
공이 이루어지면, 그 공을 차고앉지 말아야 한다.
노자는 처음에 이 말을 정치적인 의미에서 주로 사용하였다. 정치인이 지속적인 지배력을 유지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백성들의 마음속에 영원히 살아남는 생명력 있는 권위는 어떻게 가질 수 있는가? 우선 자기가 이룬 공, 바로 그것에 함몰되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이룰 때 사용하였던 방법에 고착되어서는 안 된다. 어떤 혁명가가 자신이 타도하려고 하는 대상을 타도하고 나서 그 자리를 차지하고 앉으면 그는 이미 혁명가가 아니라 반항아에 불과하다. 왜 진실한 표정으로 혁명가를 자처하던 사람들이 혁명을 이룬 후에는 쉽게 비판받고 버림받게 되는가. 그것은 혁명 대상을 타도하고 나서 그 자리를 차고앉으려 시도하면서 이미 자신이 타도하려던 그 대상과 부지불식간에 닮아버리기 때문이다. 정치 자체를 상승시키지 못하고, 정권만 교체한 형국이다. 혁명의 기운이 감돌 때, 백성들이나 국민이나 시민들은 모두 지금과는 전혀 다른 세상을 꿈꾼다. 다른 세상은 다른 정치로만 가능하다. 혁명가들은 대개 다른 정치를 하겠다고 선동하지만, 결국 타도 대상이 앉았던 자리에 자신이 앉음으로써 다른 정치의 길은 요원해진다. 정치가 상승하는 길은 사라지고 권력만 교체된다. 이 정권 저 정권으로 바뀐 것에 불과하다. 더 좋은 세상을 위해서 필요한 것은 정치의 발전이지 정권이나 권력의 교체가 아니다.
유방은 항우와의 치열한 전투를 거쳐 승리자가 된 후, 한이라는 이름을 단 새로운 정치 마당을 펼친다. 황제가 되어 새 정치를 펼치고 있는 유방에게 육고라는 신하가 말한다. "황제께서는 이제 경전을 공부하십시오." 여기서 경전은 철학이나 문학 혹은 역사 등 경세의 근본에 관한 학문을 가리킨다. 처음에 유방은 육고의 조언에 화를 냈다. 자신이 목숨을 걸고 전장을 누빌 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책이나 보던 사람이 이제 와서 자신에게 경전을 읽으라 충고나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자 육고가 말했다. "말 잔등에 올라탄 채로 천하를 차지했다고 해서 말 잔등에 올라탄 채로 천하를 경영할 순 없습니다." 유방의 위대한 점은 육고의 충고를 그 즉시 알아들었다는 데에 있다. 육고의 지도로 유방은 바로 경전 공부를 시작했다. 이런 경청의 능력으로 유방은 천하를 차지할 때의 성공 기억에 갇히지 않을 수 있었다. 만약 혁명의 기세와 기억에 사로잡혀 있었다면 유방도 분명히 말 잔등에 올라탄 채 국가를 다스리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유방은 공이 이루어질 때의 그 기억에 갇히지 않고 바로 변신을 감행하였다. 유방은 혁명가에서 국가 경영자로 변신함으로써 비로소 혁명을 완수할 수 있었다.
교육의 효과가 최종적으로 드러나는 모습은 변화가 일어났느냐 일어나지 않았느냐 하는 점에 있다. 변화를 일으키는 힘은 이해 자체에 있지 않다. 그 이해가 어떤 동작으로 이행되려면 자기 전체를 움직이는 힘이 필요한데, 나는 그것을 감동이라고 본다. 학생과 나 사이에 호감이 지속되고, 신뢰가 쌓이면 감동이 생길 가능성은 더 커진다. 교육자로 사는 사람들이 학생들의 신뢰를 얻는 데 방해가 되는 언행을 하지 않아야 하는 이유이다. 나는 성직자나 부모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신뢰를 쌓는 데에 방해가 되는 언행을 하면, 신뢰가 충분한 관계를 형성하지 못하고, 그 관계에서는 감동이 만들어지지 않고, 감동이 만들어지지 않으면 감화력을 발휘할 수가 없다.
1543년 9월, 일본 가고시마 항 남쪽으로 배를 2시간 정도 타고 가면 나오는 다네가시마라는 작은 섬에 포르투갈 상선이 표류해 왔다. 열다섯 살의 도주 도키타카는 그들로부터 화승총 한 자루를 선물로 받았는데, 거기에 그치지 않고 그는 한 자루를 사서 대장장이 야이타로 하여금 본떠서 만들게 하였다. 그래서 일본은 자신들이 직접 조총을 만들 수 있게 되었다. 당시 일본 사람들은 자신들과는 다른 포르투갈 사람들을 알려고 노력한다. 1653년, 조선에 네덜란드 상선이 표류하였다. 인원은 36명이었고, 그중에 하멜이라는 청년도 있었다. 그 배에는 대포와 조총 등이 가득 실려 있었고, 항해 전문가와 무기 전문가들이 있었지만, 조선의 그 누구도 이런 문물에 관심을 표하지 않았다. 시간이 흘러 살아남은 여덟 명이 일본의 나가사키로 도망갔다. 그 후 하멜은 네덜란드로 돌아가 자신이 조선에 머무르는 동안 받지 못한 임금을 받기 위한 증빙자료로서 조선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 그것이 '하멜표류기'다. 그 당시 일본은 나가사키에 네덜란드 상인 구역을 만들고 네덜란드와 상업을 하고 있었다.
평소 ‘어른답다’라는 말을 자주 생각합니다. 어른답지 못한 행동을 하는 사람을 보면서, 반대로 성숙한 모습을 보여주는 사람을 보면서도 어른답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을 보았을 때, ’어른답다‘라고 생각할까요? 이 책을 보면서 느낀 것은 불편함을 감수하면서도 덕을 유지하려고 하는 사람, 익숙함과 결별하면서 도전을 하는 사람, 기존의 성과에 함몰되지 않고, 다른 사람의 말을 경청할 수 있는 사람이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모두에게 주어신 시간은 같습니다. 똑같은 시간을 부여받고도 어떤 사람은 발전을 하고, 어떤 사람은 쇠퇴하곤 합니다. 노자와 장자의 가르침은 현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어떤 마음가짐으로 살아가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소중한 교훈을 건네줍니다. 가끔 삶의 방향을 재정의하고 싶을 때마다 다시 꺼내보고 싶은 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