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책인사 Mar 03. 2020

맞춤정장을 입지 않게 된 이유

라떼는 말이야 - #22. 맞춤정장이 작업복?

신입사원 시절.

난 항상 맞춤정장만 입었다.

좋은 옷을 입으면

내가 조금 더 멋져 보인다고 생각을 한 것 같다.


그런 내가 어느 순간부터 맞춤정장을 입지 않게 되었다.

이유는 속절없이 찢어지는 정장 바지 때문이었다.


[Episode-1]

당시 내가 근무한 사무실에는

생수통을 꼽아서 쓰는 정수기가 있었는데

생수통 교체는 막내인 내 담당이었다.


한 번은 쪼그려 앉아서 물통을 드는 순간

"부욱~!!" 소리와 함께

뭔가 허전한 느낌이 들었다.


바지가 찢어진 것이었다.

비싼 돈 주고 맞춘 이태리 원단의 슈트였는데

생수통을 들다가 찢어지다니..


그 이후로는 물통 교체를 할 때에는

치마를 입은 것처럼 무릎을 한쪽으로 모아서

쭈그려 물통을 들게 되었다.

[생수통과 맞바꾼 나의 첫번째 정장바지]


[Episode-2]

내가 속한 인사총무팀은

업무의 특성상 작업이 많았다.

사무실 배치를 새로 한다거나

조회 준비를 한다거나

의자, 집기류를 옮기는 것까지

모두 인사총무팀 직원들이 직접 했다.


하루는 1년에 한 번씩 있는 문서창고 정리의 날.

서류뭉치를 드는데 "부욱~!!!" 하는 소리가 났다.

아뿔싸.

바지가 또 찢어졌다.

내 마음도 찢어졌다.


엉거주춤 엉덩이 부분을 부여잡고

회사 근처 세탁소에 갔더니

동대문 쇼핑몰에서 바지 갈아입을 때 쓰는 큰 치마를 주신다.

수선할 동안 입고 있으라며.


펑퍼짐한 치마를 입고 세탁소 구석에 앉아있었다.

한 땀 한 땀 장인의 손길로 만들어진 내 슈트에

드르륵드르륵 재봉틀이 지나가는 소리를 듣고 있자니,

찢어진 바지만큼 마음도 아팠다.


[무한도전 내용 중. 그래도 나는 찢어지자 마자 알았다]




그 이후로는 맞춤정장을 입지 않게 되었다.


백화점 매장에서 싼 값을 주고 산 바지들은

어지간해서는 잘 뜯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무엇보다 지금의 회사는 캐주얼을 입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전에는 나의 외형을 통해 나를 돋보이고자 했다면,

지금은 나의 내실을 통해 있는 그대로의 나를 보여주고 싶기 때문이다.


혹시라도 정말 좋은 자리에서 내 책으로 강의를 하는 날이 오면,

그때는 멋진 슈트를 입고 싶은 생각이 든다.

매거진의 이전글 생일인데 먼저 좀 들어가면 안될까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