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살아가야 한다면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 르네 데카르트
르네 데카르트의 유명한 명제는 서구 철학을 이성적이고 명명 가능한 것, 의미화할 수 있는 것으로만 구성된 체계로 만들었다. 이성(logos)ㅡ말, 이성, 논리ㅡ은 생각하는 나로부터 나오는 것이지만, 의식 이전 감각은 그저 단순한 반응으로 치부되기 일쑤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사람마다 인식이 달라지기에 절대적인 진리는 존재하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렇게 의심하고, 혼란에 빠져 있다는 그 ‘사실’ 자체가 곧 존재의 확실한 증거라고 말했다.
“내가 잘못하고 있다, 그러므로 존재한다”
- 아우구스티누스
이 명제는 인식이 틀릴 수 있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는 그 ‘의식의 흔들림’ 자체가, 오히려 내가 존재하고 있다는 가장 강력한 증명이 된다는 역설이다. 그럼에도, 나의 생각이 곧 존재라는 등식 안에서 타자는 언제나 객체로 머무르고, 나의 생각과 판단이 결코 완전하지 않다는 사실은 점점 잊혀진다.
만약, 당신이 어떤 방 안에 들어가 사물들을 바라본다고 하자. 사과의 색, 테이블의 질감, 물병의 이미지를 통해 스스로 이 공간에 대한 결론을 내리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 방에 다른 누군가가 들어온다면 그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공간을 받아들이고, 전혀 다른 해석을 내놓을 수도 있다.
그 차이는 관찰력이나 감각의 문제가 아니다. 의식이 얼마나 불안정하고, 얼마나 주관적인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증거다. 같은 시간과 공간 안에서, 같은 사물을 바라보면서도 전혀 다른 해석이 작동한다. 그럼에도, 이러한 불완전한 의식을 통해 진리를 보고 있다는 착각에 빠져버린다.
카뮈의 관점에서 본다면, 심연은 세상에 아무런 의미도 없다고 속삭인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은 바로 그 안에서 문명을 쌓고, 규범과 제도를 정비하며 살아간다. 세상의 모든 것을 의심하기 시작하면, 마침내 나 자신마저 의심하게 되고, 존재는 서서히 혼란 속으로 빠져든다.
진리를 향한 갈망은 때로 존재에 대한 불신과 붕괴로 이어지고, 끊임없는 의심은 우리를 깊은 심연 앞에 세운다. 그리하여 마침내 도달하게 되는 결론. ‘살아갈 이유가 있는가?’ 진실조차 진실이 아닐 수 있다는 깨달음 앞에서 세계는 무너져 내리고, 그 어떤 말과 믿음도 이 두려움을 채워주지 못한다.
알베르 카뮈는 이러한 상태를 ‘부조리(absurde)’라 불렀고, 그 앞에 선 인간에게 세 가지 선택지를 내민다. 하나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사라지는 자살, 또 다른 하나는 환상, 마지막은 어떤 의미도 보장되지 않는 세계와 끝까지 함께 살아가는 반항이다.
“나는 반항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 알베르 카뮈
카뮈에게 있어서 반항이란, 삶의 부조리를 인식하고도 그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진리가 무너지고 존재가 흩어져도 무의미한 세상은 답을 주지않고 침묵한다. 삶은 그 침묵 속에서 계속되고, 우리는 그것을 견디며 살아야만 한다. 아무것도 보장되지 않는 세계에서, 우리를 다시 살아가게 만드는 그 불가해한 부름 앞에서—우리는 과연, 반항하는 인간이 될 수 있을까. 아니, 될 수밖에 없지 않은가.
반항은 결코 삶의 의미를 찾아낸 자의 단정한 고백이 될 수 없다. 오히려 어떤 의미도 보장되지 않는 세계 속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살아내려는 이의 고요한 결심에 가깝다. 그리고 어쩌면, 삶의 의미는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내겠다는 결심 속에서만 조용히 발생하는 기적일지도 모른다.
1) 아우구스티누스와 데카르트: 우구스티누스와 데카르트를 나란히 다루는 것은, 철학사적으로 볼 때 분명 계열상 차이를 감안해야 하는 작업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중세 신학-철학의 전환기에 위치한 사유자로, 존재에 대한 확신을 신 앞에서의 내면적 고백과 죄책의 자각을 통해 확보한다.
그의 “내가 잘못하고 있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는 명제는 인간이 오류를 인식하고 있다는 그 사실 자체가, 곧 존재의 증거가 될 수 있음을 말한다. 이때 존재는 신과의 관계 안에서 발생하는 자기의식의 부산물에 가깝다.
반면 데카르트는 근대 철학의 시작점에 서 있는 인물로, 신을 의심할 수 있는 자아의 이성을 통해 확실성의 토대 자체를 재정립하려 한다. 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명제는 모든 것을 의심하더라도 그 의심하는 주체만큼은 의심할 수 없다는 논리적 토대 위에서 성립한다. 이때 존재는 자기 이성의 자명성과 불가의심성에 뿌리를 둔다. 출발점도, 전제도, 지향하는 존재의 개념도 명확히 다르다.
2) 카뮈의 선택지에 대한 해설: 카뮈는 자살을 가장 무책임한 도피로 간주했다. 한편, 무신론자였던 카뮈는 신을 환상으로 보았다. 예를 들어,『이방인』에서 ‘환상’은 신부의 입을 통해 구현된다. 죽음을 앞둔 뫼르소에게 다가온 신부는 죽음 이후의 구원과 회개를 권유하지만, 뫼르소는 이를 현실의 고통과 부조리를 덮는 자기기만적 서사로 간주하며 거부한다. 본문에서는 이 맥락을 반영하여 ‘환상’으로 표기했다.
카뮈는 이 두 선택지 모두를 넘어, 부조리를 끝까지 인식하면서도 살아가려는 태도, 즉 반항을 제시한다. 그에게 있어서 반항이란, 무의미한 세계 자체에 맞서 지속적으로 살아가는 조용한 결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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