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외국인 노동자로 살아간다는 것
이 전 글을 읽어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감사합니다) 나는 유럽에서 꽤 오랜 시간 동안 수학했다. 그 중 헝가리에서 법학 석사를 취득했는데, 물론 미국에서 헝가리 학위가 엄청 메리트가 있지는 않은 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나는 정부 장학생으로 석사 학위를 공부하며 해외 생활을 맛볼 수 있었고, 그때의 경험이 지금 미국 생활에 많은 도움이 되고 있다. 하지만 내가 처음부터 법학을 공부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다.
영국에서 교환학생으로 공부하며 내가 연구하고 싶은 역사학 분야의 권위자가 강의하는 수업을 들을 기회가 있었다. 당시에는 역사학도가 꿈이었고 학사 학위도 역사학 및 법학 복수전공을 하고 있었기에, 해당 교수님 밑에서 석사를 하고 싶었다. 다행히 교수님도 나의 과제 연구 주제를 흥미롭게 봐주셨기 때문에, 역사학 중에서도 전쟁 범죄를 좀 더 깊게 배우고 싶은 마음은 날로날로 커져만 갔다.
하지만 브렉시트가 터졌다. 파운드는 요동쳤고 내가 있던 한적한 동네에도 외국인을 적대적으로 바라보는 시선이 늘었다. 부모님의 형편도 내가 영국에서 석사를 마음놓고 할 만큼 풍족하지 않았고, 게다가 국제 학생인 내가 지원할 수 있는 장학금은 절대적으로 적었다. 교수님은 일단 한국 본교를 졸업한 후 자신 밑으로 석사를 입학한 다음 조교에 지원해보라고 하셨지만, 누구를 지도할 만큼의 지식과 영어가 충분치 않아 자신이 없었다.
그렇게 한국에 돌아와 본교의 막학기를 앞두었을 때, 교수님에게 연락이 왔다. 헝가리에 장학금 프로그램이 있는데 도전해보지 않겠냐고. 헝가리에 홀로코스트를 연구하는 대학이 있는데, 그 곳에 지원하겠다면 추천서를 써 주겠다고. 정말 감사했고, 최선을 다해 준비했다.
결과적으로 나는 내가 하고 싶던 전공의 가고 싶던 학교에는 가지 못했다. 여러 가지 요인이 있겠지만, 유럽과 한국의 학기제가 달라 Conditional Offer 를 받아놓고도 기한 내에 졸업증명서를 제출하지 못한 이유가 제일 컸다. 학교 측에서는 나에게 추가 기한을 주는 것이 다른 학생들에게 불공평할 수 있다며 구비서류를 다 준비한 후 다음 학기에 다시 지원해보라는 제안을 하였다.
하지만 나는 그때 부모님으로부터 취직 압박 & 결혼 압박을 심하게 당하던 차였고, 이럴 바에 한국을 다시 떠나자는 마음으로 2지망에 지원한 법대에 진학하게 되었다. 결국 그 때의 선택이 지금의 커리어를 만들어 내는 토대가 되었지만, 지금도 역사학을 공부하고 싶은 마음이 조금은 있다. 교수님께는 가끔씩 연락을 드리고 있고, 아직도 내가 역사학을 선택하지 않는 것에 대해 아직도 약간은 서운해 하신다. 하지만 나의 선택을 전적으로 지지해 주셨다.
당시에는 정말 하기 싫은 분야였고 어쩔 수 없이 선택한 학교이자 전공이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지금의 나를 만들어 준 또 하나의 계기가 된 것 같아 감사하다. 돌아돌아 찾은 직무 적합성이기에, 나는 헝가리에서 공부할 기회를 제공해 주신 영국의 교수님께 지금도 깊이 감사드린다.
지금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지 못해 눈 앞이 깜깜하더라도, 돌아돌아 언젠가는 내가 희망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혹시 모른다. 내가 갑자기 다시 역사학과에 입학할 지는. 하지만 주어진 기회에 감사하며 최선을 다해 도전해보고 싶다. 한국이든 유럽이든, 미국이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