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인 배우자로 산다는 것
유학 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한국, 치열한 취준을 거쳐 입사한 회사는 나의 이상과는 달랐다. 편리한 한국이 좋았지만 나의 행동을 제약하는 한국이 미웠다. 무엇을 하든지 나의 행동을 재단하고 '이건 이러면 안돼'라고 판단하는 한국이 답답했다. 게다가 나와 20대를 따로 보낸 부모님은 이미 나와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있었고, 그것이 나를 너무나 답답하게 했다. 아무도 나의 상황에 공감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배우자를 따라 미국으로의 결혼 이민을 결심했다. 당시 나에게 미국은 도피처였다.
유럽에서 교환학생과 석사를 마치고 돌아온 2018년의 여름, 한국은 폭염으로 길가의 아스팔트까지 지글지글 녹아가는 듯한 날씨였다. 한국 학사와 유럽 석사를 가진 '자칭 콘텐츠 전문가'는 인사담당자의 눈길을 받지 못했고, 취직 전에 짧게 하려고 마음먹은 카페 오픈 아르바이트 기간은 기약 없이 늘어났다. 아침 출근 전 커피를 사러 오는 직장인들을 보며 부러움의 눈길을 수도 없이 보내기도 했다.
학창 시절 친구들은 점점 자리를 잡아가고, 집에서도 '이제 결혼해야지'라는 압박이 슬슬 들어오기 시작했다. 당시 오래 연애한 남자친구가 있었지만 외국인이라는 특성상 (맞다, 당시 남자친구도 미국인이었다) 언제 한국을 떠날 지 몰랐고, 결혼 이야기도 전혀 나오지 않았다. 유학을 끝내고 모국에 돌아와서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외국인 남자친구과 연애하는 한국 여자 28살은 - 정말 공중에 둥둥 떠있다는 말 밖에 표현할 길이 없었다.
그 뒤, 6개월 만에 취업을 했어도 - 한국의 직장은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많이 달랐다. 면접을 볼 때 들었던 '자유롭다'는 출판사의 분위기는 사장 한정 자유로웠던 것이었고, 나는 문서 작성 시 쓰는 프로그램이나 메일 작성 양식부터 옷차림까지 직장 사람들에게 늘 '한 소리'를 들어야 했다. 내가 효율적이라고 생각하는 방식은 이들 입장에서는 오랑캐와 다름없었고, 그들은 내가 되바라졌다고 생각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채용을 안 했을 것이라는 막말도 서슴지 않은 채.
수 차례 이직을 했어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내가 배운 학교와 이전 직장에서 배운 것은 도태되어야 할 것이었고, 새로운 회사의 프로토콜만이 내가 따라야 하는 것이었다. 나름 창의적이라는 콘텐츠 업계에서도 이러한 불문율은 깨지지 않았다. 특히 방송국 재직 시절, 사수의 막말과 과도한 업무량으로 간수치가 크게 증가했고 우울증은 심화되어 갔다. 전 직장 과장님에게 털어놓자 이런 조언을 들을 수 있었다. 'Azuree야, 저 사람을 차로 치고 싶다고 생각하는 거면 아직 다녀도 돼. 근데 저 사람 때문에 내가 차에 치이고 싶다 라는 생각이 들면, 그땐 그만두어야 해.'
그래서 퇴사를 결심했다. 나를 지키기 위해 이 곳을 떠나기로 했다. 휴식을 핑계로, 당시 남자친구였던 지금의 반려인을 만나기 위해 코로나가 심하던 2021년 미국 여행을 결심했다. 그리고 다짐했다. 미국에서 살아보지 않았지만 살아보기로, 아무것도 모르지만 알아보기로. 프로포즈를 받고 깡도 좋게 메릴랜드 법원에서 혼인신고를 했다 (부모님에게는 선신고 후통보 했다 절대 이러지 마세요..) . 그때는 나의 삶이 순탄하게 흘러갈 줄만 알았다. 한국이라는 사회에서 도망왔으니 미국에서 아무런 부담 없이 꽃길만 걸을 줄 알았다. 전혀 그렇지 않은데도.
이것이 나의 이민 결심이다. 시간이 흘러 지금, 이민 만 2년차에 느끼는 것은 도피처에서 결코 도피만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아무리 유학을 했어도 나는 한국인이고, 당황하면 흘러나오는 말은 영어가 아닌 한국어이다. 한국에서 느꼈던 어려움과 불편함을 미국에서 갑절로 느끼고 있고, 그럴 때마다 작은 후회를 하곤 한다. 그래서 이민을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한국인에게는 한국이 제일 살기 좋다'는 주제 넘은 조언도 가끔 한다. 문화와 언어는 단순해 보이지만 우리가 한국에서 살아가며 습득해 온 또 하나의 '나 자신'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미국행 선택에 후회를 덜기 위해 나는 오늘도 낯선 땅에서 열심히 살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