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인 배우자로 산다는 것
2년이 넘는 비자 승인 대기 기간 중, 가장 걱정되었던 것은 나의 커리어- 다시 말해 먹고 사는 것이었다. 막말로 미국에서의 경험도 학위도, 그 흔한 어학연수 경험도 없는 내가 과연 밥값을 할 수 있을지가 두려웠다. 그래서 이민 이후에도 이어갈 수 있는 뉴욕 본사 콘텐츠 회사의 Remote 직업을 얻었다. 코로나의 영향이었다. 그리고 8개월 후, 레이오프 당했다. 코로나 종식의 영향이었다. 하지만 그저 쉴 수는 없었다. 예상되는 실업급여보다 나갈 돈이 많았으므로, 실업수당 대신 일을 할 것을 선택했다. 알바 3개와 외주를 병행해 가며.
내가 기억하는 나의 첫 직장(이라기보단 알바)는 신림 순대촌이었다. 당시 시간 당 1500원을 받고 순대볶음 철판을 닦았다. 우리 엄마가 그랬다. '사람은 첫 직장이 중요해. 자기도 모르게 그 길을 가게 되거든.' 어느 정도는 엄마 말이 맞았는지도 모르겠다. 아르바이트를 남들보다 일찍 시작해서 그런가- 나는 대학생 시절은 물론이고 서울에서 직장인으로 근무하던 시절에도 음식점, 카페, 심지어 타코야끼까지 굴려가며 아르바이트 이력서만 2장을 빼곡히 채웠다.
여기서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내가 아르바이트를 많이 했다는 자랑이 아니다. 나는 중학생 때부터 아르바이트를 했고 유학생 신분으로도 카페 알바를 했으며 (내가 있었던 나라에서는 학생 비자라도 요건만 갖추면 불법이 아니다), 한국에 돌아와 직장인으로 일하면서 주말에는 아르바이트를 계속 했다. 그러니까 내 말은, 내 인생에서 단 한번도 내 의지로서 일을 '안' 해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여의도 벚꽃 축제를 가면 나는 벚꽃 텀블러를 팔았으며, 크리스마스로 모두가 들뜬 12월에는 평소보다 늘어난 레스토랑 예약에 매장 마감을 마친 다음날 새벽에 올빼미 버스를 타고 퇴근해야 했다.
그래서 실업급여를 얼마간 받는 대신 '어떠한 일도 할 수 없다'는 상태를 견딜 수가 없었다. 게다가 예상되는 실업급여 수급예정액은 나의 기존 수입보다 훨씬 적었으며, 이는 내가 당시 가정의 (그러니까 친정의) 경제를 어느 정도 책임지고 있었다는 점에서 단순하게 내가 사고 싶어하는 것을 안 사면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었다. 보험료와 대출 상환 등 고정 지출액은 실업급여 수급액을 훨씬 웃돌았다. 하지만 지금 당장 다른 회사에 정규직 입사를 준비할 수도 없었다. 나는 비자가 언제 나올지는 몰라도- 그래도 언젠가는 떠날 사람이었다. 내가 나의 상황을 숨기고 어딘가에 정규직으로 지원하려면 거짓말을 했어야만 했다. 하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실업급여를 포기했다. 대신 외주를 더 늘리고, 아르바이트를 더 구해보기로 했다. 그 결과 직장에서 해고된 백수(?) 임에도 불구하고 어느 정도 안정된 스케쥴을 얻어 낼 수 있었다. 평일 오전에는 카페에 출근해 직장인들의 커피를 말았고, 카페에서 퇴근한 후 취준생을 위한 집 근처 '일자리 카페'에서 컴퓨터 자격증을 준비했다. 또한 미국 결혼 비자가 나오기 전에 혹시 기간제 일자리라도 얻을 수 있을까 하는 기대감에 이리 저리 계약직 공고를 기웃거렸다. 금요일의 카페 알바가 끝나면 서버로 주말 내내 일했다. 당시에는 나름 핫했던 레스토랑에서 최소 8시간 최대 12시간 음식을 나르며 고객을 응대했다. 와중에 자투리 시간이 나면 전단지를 돌리며 아르바이트 3개를 동시에 해나갔다.
외주 같은 경우, 2개를 맡아 진행했다. 하나는 꾸준한 수요가 있는 것이었고, 나머지 하나는 한정된 기간에만 수요가 대폭팔하는 종류의 것이었다. 전자는 계속 진행했고, 후자의 일을 주는 에이전시에게는 '혹시 지금 자잘하게라도 진행할 수 있는 프로젝트가 있냐'고 물으며 돈이 안되는 업무도 도맡아 진행했다. 그러다 보니 적어도 실업급여보다는, 많은 돈을 손에 쥘 수 있었다.
그 때는 정말 '내가 왜 이렇게 살아야 하나' 라는 자괴감으로 하루 하루를 보냈는데, 이런 경험은 미국 이민 초기 나름 생존에 도움이 많이 되었다. 처음 미국에 정착해서 지하철 역에서 전단지를 돌리면서도, '내가 왜 여기까지 와서 이 일을 해야 하나' 라는 무력감 대신 '내가 한국에서 이 일을 해봐서 다행이다'라는 안도감이 먼저 들었고, 카지노에서 다국적 진상을 대하면서도 '한국의 진상에 비하면 다 병아리들이구나'라는 자신감을 얻었다.
생각해 보면, 필요 없는 경험은 없다. 오히려 행복했던 경험보다 나를 힘들게 했던 많은 일들이 나를 성장하게 했고 지금의 내가 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6개월의 기간동안 시간 관리 능력을 배웠고, 9-6에 얽매이지 않은 채 내가 좋아하는 운동에 집중하며 마음이 통하는 친구들을 만들 수 있었다. 지금도 업무가 힘에 부칠 때마다, 저 시절을 생각한다. 그리고 다짐한다. '조금만 더 힘을 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