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저어가는 삶을 위한 향연] - 김민휴의 시
가지 않은 길
김. 민 휴
아득한 옛날 한 오경박사가 책굴에 공부하러 가며, 공부하고 집에 오며,, 공부하다가 머리 식히며 사색에 빠져 걷던 길을 걷는다.
해질무렵 홀로 호젓한 산길을 걷다 갈림길을 만나면 자연스레 가장 환한 길을 골라 걷고, 어딘지 모르게 '우리집'으로 가는 느낌이 드는 길로 들어서게 된다.
이곳에 온지 벌써 얼마쯤 지난 것이어서, 이제는 그간 낯 터놓은 오솔길을 조르르 따라 걷는다.
아파트가 많은 도회마을의 뒷산 산책길이 거미줄처럼 연결 되어 있는 것과는 달리 이곳 길은 단순하고 길어서 걸으며 사색하기에 가히 좋다.
도회마을 산책길이 큰 하수구만큼 넓다면, 이곳 산길은 봄날 산골짜기를 흘러내리는 졸졸졸 물소리만큼 가늘다.
오늘 산책은 조금 일찍 나선다. 걸음이 슬그머니 느려진다. 문득, 내가 걷는 이길에도 두어 개의 제법 큰 문이 달린 산길이 더 있고, 노끈 실만큼 가느다란 숨다시피 희미한 길들이 여럿 더 있다.
나는 오늘 작은 산길까지 죄다 길문을 똑똑 두드려 본다. 살짝 문을 열어 본다. 얼마쯤 들어가 보고 나온다.
책굴 앞 왕인석상 옆에 앉아 생각에 잠긴다. 그는 까마득한 옛날, 저 아래 상대포구에서 천자문과 논어를 가지고 일본국 아스카문화의 문을 열러 길을 떠났다 한다.
문필봉 아래서 그가 걸었던 마음 안팎의 오솔길, 서기 4세기, 그의 앞에 놓인 세상의 길을 생각해 본다. 더는 가지 않은 길을 위해 그가 바쳤을 원시의 기도를 생각해 본다.
오늘 산책을 하며 가지 않은 미지의 길, 문을 죄다 두드려 보고, 들여다 보고, 살짝 들어가 보고 한 일이 잔잔히 한 소식을 준다.
내가 가지 않은 길도 가는 길만큼 아름답고 소중한길일 거라는 생각, 소리 먼 손뼉을 쳐주어야 한다는 마음 앞에, 이제 나는 겨우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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