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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HE AZURE POET Nov 15. 2022

사적 욕망과 공적 욕망

사적 욕망과 공적 욕망

              김 민 휴


머리가 좋으면서 마음의 씨가 사邪하고 어리석은 사람이 공부를 많이 하고 국가가 그 사람을 높은 위치에 사용하면 그 사람은 되려 국가를 사용하게 되고 반드시 국민은 큰 재앙을 입게 된다.


한 인간이 자기가 접촉하는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은 개인주의, 공동체주의 둘 중 하나가 차지하는 비중이다. 그의 출생과 성장과정은 이 두 가지 중 한 가지를 이어받고 흡수하여 자기 것으로 하는 단초임과 동시에 배경인데 이로서 그는 정체성을 선택한다.

 

어린 정체성은 그가 어른이 되어서도 개인주의 시각에서 세상을 보게 하거나 공동체주의 시각에서 세상을 보게 한다. 개인주의와 공동체주의 마음의 조화는 개인과 공동체의 균형과 성장을 주지만 이를 갗춘 인물은 드물다. 극단적인 정체성은 한 사람을 부단히 사사건건 세상으로 나아가 나서게 하거나 한사코 세상으로 나가는 것을 회피하게 한다.


어린 정체성을 내재한 채 어른으로 성장한 개인주의 인성 소유자의 모든 생각은 사적 욕망에서 출발하여 사적 욕망에 도착한다. 그의 말과 행동의 발현은 거의 모두 은폐, 위장, 치장한 것이다. 그의 언어는 현란하고 비틀어져 어지러운 것이다. 많은 사람은 휘둘리고 참과 거짓을 제대로 분간하지 못하게 된다.


끊임없이 사리사욕을 채우려 하는 그들의 생각의 바퀴는 결코 공공을 위하는 반대방향으로 돌지 않는다. 이 현상은 그의 삶의 송두리를 잡고 흔드는 문제이다. 그들이 언뜻하면 유체이탈 언어를 흘리게 되는 근원이다.


이러한 사람들이 지도층이 되고 정치판의 중심 자리를 꿰차게 되면 세상의 사실과 의견과 신념이 모두 다 신념 단 한 가지로 통일되도록 강요되고 소통은 사라져 공화는 빛을 잃고 신음하게 되며 독단 또는 독재의 향기가  폴폴 날리게 된다.


사람들은 토론할 필요가 없는 사실 자체를 가지고 쓸데없이 토론을 하는 진기한 풍경이 벌어지고, 정작 토론의 테이블에 올려 상대의 동의를 물어야  할 자기 의견을 신념화 하여  내세워 강요함으로써 건전한 의견의 교환을 통한 공적 욕망을 해결할 수 있는 해법은 생산되지 않는다.


신념화된 사람은 똑같은 신념을 가진 사람들을 서로 찾고  그들만 서로 온라인, 오프라인으로 어울리면서 그 신념의 말을 메아리처럼 서로 반향해준다. 이렇게 되면 자기의 신념이 확증된 신념이라  믿으며 더욱 신념을 강화해 나가게 된다. 이른바 반향실효과의 생산자겸 소비자 상태에 빠지게 된다.


자기 공적 욕망의 간섭을 받지 않는 사적 욕망은 끊임없이 사리사욕적 부를 축적하려 하는 치료하기 힘든 정신이상이다. 주이상스이다.  사적 욕망으로 정신이 뭉쳐진 무리들이 정권을 잡으면 국민국가는 구호 뿐이고 정신문화는 후진적이고 사익추구는 선진적인 어처구니없는 기업국가가 된다.


그들은 국가를 먹음직스러운 알토란 회사쯤으로 본다. 회사를 인수하여 이익을 창출하는 것이 그들의 진정한 목표가 된다. 그들은 추종자 그룹을 형성하기 위해 음양으로 기술을 부리며 적극적 국민에게는 노골적으로, 은근한 국민에게는 은근한  먹이를 던져주며 관리한다. 포퓰리즘이다.


메타버스에서 다양한 사회적 관계망(sns)은 대중의 심리를 조작해내고 의식을 조종하여 추종자로 만들고 신념화 시키는  최상의 장소이고 경이로운 수단이 된다. 탁월한 사적 욕망과 출중한 지식 실력, 우월한 재력으로  이들은 재빠르고 능숙하게, 그리고 질기고 질리게 매타버스 생태계를 선점, 장악하여 최상위 포식자가 된다.


유튜브 등 사회계망서비스에서 가능한 가지가지 방법으로 대중을 조작하고 이용할 수 있는 기법을 터득한 그들은 이제  위험하고 망신스러우며 번거로운 쿠테타 같은 구닥다리 낡은 독재의 도구와 방법을 사용하지 않고 고급지고 뽀대나게 대중을 관리하여 신형 독재를 꿈 꿀 수 있다.


sns에서 아무것이나 한 번만 검색하면 sns는 당신이 찾거나 관심 있거나 하는 것을 취향까지 파악해 필터 버블로 신기할 정도로, 감사하다가 귀찮을 정도로 계속해서 화면에 띄워준다.


당신이 어떤 정치인에 관해 유튜브 검색을 한 번이라도 한 다음에는 유튜브는 그에 대한 모든 유튜빙 물을 몇 날이고 필터 버블링 해줄 것이고, 그의 반대자의 약점, 비판, 비난도 보너스로  제공해줄 것이다. 당신은 확증된 신념으로 가득찬 찬양자임과 동시에 저주자가 된다. 세상에는 중도의 소리가 희미하고  극단의 안티, 찬티 개짖는 소리만 끓는다.


사적 욕망에 휩싸인 사람들이 정부를 맡아 서로 이끌고 밀어주고 할 때 그들은 유독 국가, 국민, 국익, 자유, 법 등의 용어를  강조하고 애용한다. 이 때 이 언어들은 치욕스럽게 오염당하는데, 이 오염된 언어로 인해 필연적으로 대중은 갈라진다.


사적 욕망에 사로잡혀 정부를 인수한 사람들이 사용하는 어휘들의 의미는 사전 밖에 있다. 그들이 정의하고  심리적 공유를 하며 퍼뜨리는 핵심 말들의 진정한 의미는 이렇다.

국민=우리를 추종하는, 우리와 함께 사적 욕망의 추구에 몰두하는 결속 가능한 다수, 우리 편인 국민

국가=우리와 우리를 추종하는 우리국민의 나라

국익=우리와 우리국민이 사적 이악을 추구할 수 있도록 조성된 환경과 그 결과로써의 재산상의 이익

자유=우리와 우리국민이 더 많은 사적 이익을 추구하려 하는 데 방해가 돠는 규제나 걸림이 없는 상태

법=우리는 빼고 그들만 지켜야 하는 정교한 개구멍이 숨겨진 문장들의 집합

사적 욕망을 하는 자들이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예술 언론 등의 필드에서 하는 일은 모든 사람과 세상을 ‘self and others, us and them’로 분류하여 동일시하거나 대상화 하며, 포함하거나 배제한다.

우리

우리가 포함할 우리를 추종하는 우리국민

우리가 배제할 우리를 반대하고 저주하는 자

조작과 조종이 가능한 우리의 포퓰리즘의 직접 대상이 되는 휘둘리는 자

그들의 놀라운 점은 ‘우리와 우리국민’의 미래성에 대한 태도도 있다. 그들이 말하는 ‘우리, 우리국민’은 현재의 우리, 우리국민만들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우리는 현재의 우리와 미래의 우리를 내포하며 우리국민은 현재의 우리국민과 미래의 우리국민을 내포한다. 이러한 편성을 유지하기 위해 그들은 감각적 부지런함으로 시스템과 놈norm를 건든다.


아타깝게도 반대하는 자와 저주하는 자는 그 울하고 분한 에너지의 충천만큼 부지런하지 않고 노력하지 않는다. 그들의 약 점은 견해의 R&D에 투자하지 않으며 공유하고 축적하지도 않는다.  그들은 그들이 반대하고 저주하는자의 통시적, 공시적 두뇌와 유산에서 배우려 하지도 않는다.


반대하는 지와 저주하는 자의 또 다른 특징은 끊임없이 자신을 선이라고 의식하는 데 있다. 그들의 선은 이성적이기 보다는 감정적인데 그들의 감정은 그들과 조그마한 반대 의견을 갖는 자도 악이라고 의식하게 한다


이러한 행태와 편견과 고정관념은 지속되며 그대로 그들이 반대히고 저주하는 자에게 가장 만족스러운 무기를 쥐어주게 된다. 아이러니하여 역설적인 현상이 유지되는 것이다.


휘둘리는 자는 선거 때가 되면 손가락을 잘못 사용하고 머지 않아 그 손가락을 잘라버리고 싶다고 울부짖으며 후회를 되풀이하는 자들이다. 동네 술집과 단란한 가정에서는 이들의 정치적 주장이 심약한 이들의 사단 칠정에서 우러나오는 바르고 착한 견해를 압도하고 만다.이들은 포퓰리즘의 진정한 먹이이다.


사적 욕망을 하는 자들로 재배치 된 정부에서는 국가는 표류하며 혼동, 혼돈, 혼란 상태에 빠져 혹 무리는 열광하며 높은 충성도를 보이고, 혹 무리는 분노하여 술친구나 괜한 가족 앞에서 욕지꺼리를 하고, 혹 무리는 냉소적이 되어 겨우 길바닥에 거래침을 뱉거나 하고, 쓰레기로 머리를 가득 채운 혀 돌림이 빠른 자는 미디어에 출현해 개소리를 하면서 돈 버는 일이 생긴다.


공론이 꼭 필요한 일임에도 이를 마다하고  그 때마다 매번 관리에 치우친 메뉴얼이 생산되고, 메뉴얼에 따라 일하도록 강요 받는데 이 메뉴얼을 금과옥조로 여기다가 또 다른 메뉴얼을 만드는 일을 반복한다.


사적 국가조직의 행동대원급 인물들은 선한 의견과 주장에도 그들의 이익에 반하면 삿대질을 하며 저질스런 개처럼 마구 짓는다. 한편에서는 관행과 관례대로 갈팡질팡하다가, 관행과 관례대로 책임을 회피하다가, 관행과 관례대로 꼬리를 자르고 마파람에 방구 빠지듯 빠져나가버리는 시스템이 반복된다.


 자유롭지 말고 반드시 고민해야 할 문제들로부터의 좀 자유로워진 경험은 회피이지 자유가 아니다. 이런 자유를 탐하는 것은 사적 욕망의 도피일 뿐 거시적 공적 욕망의 자유가 아니다. 개인에게 스며든 세계적 신자유주의의 잔물결이다.


신자유주의는 혁명들의 모토인 자유, 평등, 박애에서의 자유가 아니다. 그 자유는 철저히 공적 욕망이었다. 마가릿 뎃처, 로널드 레이건이 뿌려놓고 간 신자유는 철저하게 사적 욕망의 덩어리이다. 그들에게는 국가도 커다란 개인일 뿐이다.


자아가 사적 욕망으로 질척거리는 개인주의자들은 공적 영역을 담당하더라도 공적 욕망을 가질 줄 모른다. 그것은 그들의 정체성이다.


만성적인 문제도 내재하고 있다. 공적 욕망의 자아를 가진 사람들은 사적 욕망이 강한 사람과 성장기부터 성인기까지 부딪히고 살아오면서  공적 영역에 나서는 것을  회피하는 선택을 더 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 점은 사적 욕망자 부류와 공적 욕망자 부류 양쪽으로 각각 대물림 내림이 되고 출신성분 문제가 된다. 한 쪽에는 강점이 더욱 강화되고, 한 쪽에는 약점이 더욱 강화된다. 정체성을 선택의 문제로 보고 주체적으로 변화하며 공적 욕망을 성숙시켜가는 구성원이 힘지게 살라가야 희망이 있다.


이런 약점을 잘 알고 있는 사적 욕망자들은 공적 영역에 복무하는 공적 욕망자에게서 어떻게 해서든지 털끝만한 약점 하나라도 찾으려 혈안이 된다. 만약 제 염통에 든 대들보보다 백만 배가 더 적은 눈에 티끌이라도 그에게서 발견되면  하이에나처럼 달려들어 물어뜯어 아작살을 내버린다. 조국은 좋은 사례가 된다.


자기 모습을 자기 목적에 따라 수시로 착하고 선한 공적 욕망을 소유한 페르소나로 둔갑시킬 줄 아는 그들은 잇따라 자기 부조리와 이중성, 다중성을 드러내면서도 공직에서 물러나지 않는다.


이런 일도 있게 된다. 생소한 결합의 발상이라 생각할 수 있지만 10.29. 이태원 참사에 인지상정인 측은지심의 정서를 갖는다면 다음과 같이 생각이 우러나오지 않을 수 없다.


시간, 공간, 사건, 인물이 분명한 현재역사인 이 사실참사를 두고  공적 욕망을 가진 순수한 마음들이 자발적으로 강열하게 흐르게 되고 정부와 집권당이 타겟이 될 것으로 예상되자 재빠르고 감각적으로 사적 욕망을 가진 그들은 사악한 마음들을 복잡하고 그럴 듯하게 치장하여 혼재시킨다.


희생자들을 하나의 명단으로 세상에 드러내서 애도 위로하고 우리가 겪은 불행한 재앙 경험을 현장에  징표하여 남겨 기억하고 되풀이 되지 않도록 철두철미해야 하는 당위에  대한 선한 언어에, 악한 언어의 동의할 수  없는 음흉들이 뒤섞이고 있다.


 "보이지 않는 희생자화"를 통해 이 참사를 마무리하여 해결하는 방법은 발상 자체가 유가족에게 "술프지?  행여 위령탑을 세우려 무리하지은 마. 더 슬퍼질 뿐일 거야. 우리가 잠시 국가의 이름으로 애도해줄게"하고 위해준 척하면서 동시에 부추겨 슬픔의 근원인 참사 자체를 희미해지게 하고 참사가 발생하게 방치한 구조적 맥락을 지우며 어느새 어렴풋하게 만들어 책임에서 벗어나려는 저의를 볼 수 있다.


더 슬프고 견디기 힘들더라도 슬픔의 벽을 넘어 우리 사회, 우리 사람들이 직접 만든 재난이 천지자연이 만든 재난과 비교해 예측과 대비가 왜 그렇게 말도 안되게 안되었는지, 행정부와 지자체는 공적 역할은 무엇이고 존재 의미가 무엇인지 물어야  하는 질문들 자꾸 금기시 되고 있다.


통열한 반성과 책임자 퇴장,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하는 과정이 선한 공적 욕망을 바탕으로 이루어져야 하는데도 말이다.


태풍을 예로 들면 태풍 주의보- 태풍 경보를 발령하며 정부는  대비하고 시시각각 국민에게 알린다. 그리고 언론은 계속 실시간으로 속보로 보도하여 국민이 미리 대비하고 피해를 예방하게 한다.


공적 욕망의 소유자들이 이끄는 정부라면 160여명의 사망자와 200여명의 부상자를 낸 이 참사는 미리 예측하고 재난을 대비해 대책을 세우고 군중 밀집 주의보 - 군중 밀집 경보 발령을 낼 수 있었어야 한다. 하늘이 하는 일이든 사람이 하는 일이든 무엇이든지 재난과 재앙이 되고 피해가 예상되면 대비해야 하지 않는가.


한 정치인, 구청장이 "이건 현상이다"( *마음에 인간성의 씨가 자라 인간 심성이 마음에 채워지지 못한 구청장은).... 행사가 아니다, 현상이어서 특별히 해야 할 일도 없었다는 식으로 지껄인다. 그의 말대로 하자면 태풍도 현상이다.


천재이든  인재이든 재앙으로서의 결과는 다를 것이 없다. 똑같다. 다르다면 오히려 대책을 세우고 사고 예방을 하기에는 자연재해보다 인간재해 쪽이 백 배 쯤 더 예측 가능하고 대비의 결과가 확실하다는 것이다.


현 정부를 이끌어 가고 있는 인물들에게는 공동체 구성원 모두가 잘 되었으면 하는 공적 욕망이 보이지 않는다. 마음이 사적 욕망으로 가득 찬 인물들만 드글드글해 보인다. 공적 욕망의 회복만이 이 따위 난을 너끈히 극복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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