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 #6

소설 연재

by 바달



시간은 부질없이 흘러갔고, 날은 선선해졌다. 2학기가 시작되었지만, 몸 상태는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설이는 휴학원서를 들고 학교로 향했다. 익숙하던 길이 낯설게 느껴졌다. 오가는 학생들 사이를 걸었다. 손에 들린 종이 한 장은 돌덩이처럼 무거운 마음을 희롱하듯 가볍게 팔랑거렸다.


달리 해야 할 것도, 할 수 있는 것도 없는 기나긴 혼자만의 방학이 시작되었다. 갑작스레 목표를 상실하는 것은 적잖이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피아노를 시작한 이래로 한 번도 제대로 쉬어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예고 없이 주어진 휴식이 생소했다.

“설아, 나가서 운동이라도 해봐.”

출근할 채비를 마친 엄마가 방안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한 달 만에 처음으로 튀어나온 한숨 섞인 타박이었다.

침대에 누워 있던 설이는 한 손으로 부스스한 머리를 쓸어 넘겼다.

“엄마, 나 카페 아르바이트 자리라도 구해볼까 봐요. 그럼 차라리 시간이 빨리 지나갈 것 같아.”

“가면 몇 시간씩은 서 있어야 하는데, 그러다가 몸 더 나빠지면 어떡해. 정 답답하면 산책이라도 하라니까.”

설이는 다시 이불을 뒤집어썼다. 더 이상 이렇게 피폐하게 지낼 수만은 없다는 사실을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 그래, 설아. 엄마 갔다 올게.”

엄마가 힘없이 가방을 챙겨 집을 나섰다. 현관문이 닫히자 그제야 몸을 일으켜 거실로 걸어 나왔다. 싱크대에 점심 먹고 치우지 못한 그릇이 쌓여 있었다. 부엌을 바라보며 가만히 서있다가 방으로 다시 들어가 머리끈을 가지고 나왔다. 오랜만에 머리카락을 높게 묶어 올렸다. 고무장갑을 끼고 차가운 물을 틀어 설거지를 시작했다.

손이 마음처럼 야무지게 움직여지지 않았지만, 세찬 물소리와 세제 냄새는 상쾌하게 느껴졌다. 설거지를 마친 뒤 세탁기에서 젖은 빨래를 꺼내 건조대에 널기 시작했다. 수건이 원래 이렇게 무거웠나. 젖은 수건을 들고 팔을 올리기가 어려웠다. 그래도 몸을 움직이고 있으니 마음은 조용해졌다.

그다음 날도 설이는 어설프게 설거지를 하고, 무거운 빨래를 널고, 느린 산책을 했다.

다 거짓말일 것 같았다. 연말에 큰 병원에서 제대로 검사를 받고 나면 누군가는 분명, 심각한 일 아니니 걱정하지 말라고, 혹은 나아질 방법이 있으니 괜찮다고 말해줄 것만 같았다. 설이는 그때까지만 버티면 된다는 생각으로 하루하루를 견뎠다.


어느 날 아침, 물을 가득 채운 유리컵을 들다가 손가락 힘이 풀려버렸다.

“어…”

바닥에 쪼그려 앉아 흩어진 유리 조각을 치우기 시작했다.

깨진 컵보다 더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코로 새어 나온 자신의 목소리였다. 분명 놀라서 큰 소리를 냈다고 생각했는데, 입 밖으로는 튀어나온 것은 바람 섞인 흐릿한 신음이었다.


*


“근위축성 측색경화증이라고…”

고막을 울리는 의사의 말을 몸이 거부하는 걸까. 귓구멍으로 들어온 낯선 단어가 머릿속에서 빙빙 돌고 있는 듯한 어지러움을 느꼈다.

“... 흔히 루게릭병으로 불리는 신경 퇴행성 질환이 있는데요.”

퇴행.

뒤로 물러가는 것.

퇴보하는 것.

오늘의 자신이 남은 일생 중 가장 건강한 자신이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워낙 드문 데다, 환자분처럼 어린 나이에 발병하는 경우는 많지 않아요.”

눈앞에 앉아 있는 의사의 말이 마치 긴 복도 끝에서 누군가 중얼거리는 소리처럼 멀게 느껴졌다.

“유사한 증상을 보이는 다른 질병일 가능성 있으니까, 입원 날짜를 잡고 검사를 제대로 받아보는 게 좋겠습니다.”

설이는 원무과로 급히 걸어가는 엄마의 발걸음과 병원 서류를 잔뜩 받아 든 채 가방을 정리하느라 분주히 움직이는 엄마의 손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핸드폰이 울렸다. 설이는 그에게서 걸려 온 전화를 받지 않았다.


엄마는 그날 밤새 컴퓨터 앞에 앉아 있었다. 설이는 늦게까지 켜져 있는 불을 애써 무시했다. 쏟아지는 인터넷 속 정보를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지친 몸을 침대에 뉘었다. 늦은 새벽이었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이유 없이 말썽인 몸에 시달리며 원인을 찾고 싶다는 마음은 간절했지만, 이런 걸 바란 것은 아니었다.

이불을 끌어당겨 머리까지 뒤집어썼다. 포근한 어둠 속에서 두려움은 더욱 선명해져 갔다.

이제 피아노를 칠 수 없게 되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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