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연재
한 생을 살아내는 일은 예측할 수 없는 내일을 감내하는 일이다. 인간의 손에 주어진 것은 찰나의 순간뿐. 그렇게 매일의 불투명함을 견디는 것이 태어난 이상 피할 수 없는 과업인 것이다.
다가오는 내일이 항상 고통스럽지만은 않은 것은, 불확실성조차도 반복되다 보면 어렵지 않게 받아들여지고, 심지어는 익숙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료실 앞에 앉아 순번을 기다리는 순간만큼은 그 익숙해진 것이 견딜 수 없을 만큼 낯설어진다.
겨울방학이 끝나가고 있었다. 입원해 검사를 받은 지도 몇 주가 지난 뒤였다.
“김설 님, 진료실로 들어가세요.”
설이는 품에 안고 있던 코트를 챙겨 들고 진료실 안으로 들어갔다.
의사와 마주 보는 자리에 앉고, 엄마는 그 옆에 두 손을 모으고 섰다. 잠시의 침묵 뒤에 의사가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환자분, 검사 결과 루게릭병이 맞습니다.”
마음이 차라리 고요해졌다. 하루에도 수백 번씩 들쑥날쑥하던 감정에 이젠 지쳐 있었다. 가여운 엄마의 질문이 이어졌다. 모두 속절없는 질문이었다.
“치료 약물 개발을 위한 임상시험이 여러 곳에서 계속 진행되고 있으니 희망을 버리지는 말아야지요.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완치를 목표로 한다기보다는, 병의 진행을 늦추는 데 집중해야 합니다.”
“어떻게 해야 진행을 늦출 수 있나요, 선생님?”
고개를 숙인 채 가만히 앉아 있는 설이와 달리 엄마는 신경을 곤두세우고 의사의 설명을 받아 적고 있었다.
“일단 주기적으로 내원하셔야 합니다. 근력이 약해지면서 재활치료와 물리치료를 꾸준히 받으셔야 할 거고요. 근육 경직으로 인한 통증이 수반될 경우 약물 치료를 병행할 겁니다. 그리고 환자마다 효과는 다르지만, 대체로 수명을 몇 개월씩 연장하는 효과가 있는 약물들이 있어요. 신경세포의 손상을 최대한 막아 보려면 그런 치료도 같이 진행하게 될 겁니다. 그리고…”
“네? 몇 개월이요? 좀 약해지긴 했어도 지금 애가 이렇게 멀쩡한데…”
“어머님, 이 병이 평균적으로는 생존 기간이 2년에서 5년 정도 되지만, 환자마다 진행 양상과 예후가 천차만별이라 정확히 말할 수는 없어요. 10년 넘게 살아 계신 분들도 있고…”
바삐 움직이던 엄마의 볼펜이 멈춰 섰다.
의사는 말없이 앉아 있던 설이를 바라보며 물었다.
“환자분은 궁금한 거 있으신가요?”
묻고 싶은 게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요. 되도록이면 잘 먹고, 체중을 유지하려고 노력하세요. 그래야 몸이 버티니까요.”
“더 챙겨 먹어야 하거나, 도움이 되는 음식이 있을까요?”
엄마가 다시 볼펜을 세워 들며 흔들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음식 삼키는 것도 점점 어려워질 거예요. 지금은 그냥 가리지 말고, 다 잘 드시면 됩니다.”
의사와의 대화는 마무리 지어져야 했다. 뒤에 기다리고 있는 환자가 많았다.
의사에게 들었던 긴 설명보다 엄마의 눈에서 주르륵 흐른 눈물이 더 견디기 힘들었다. 설이는 고개를 숙이고 모든 감각을 차단하기 위해 노력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돌아오던 차 안, 영원처럼 길게 느껴지던 시간 동안 엄마와 설이는 조용히 각자의 숨을 쉬었다. 집으로 돌아온 엄마는 병원에서 받아 적었던 종이를 펼쳐 책상 앞에 붙여 두었다. 이 병과의 싸움에서 결코 지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인 듯했다. 하지만 종이 한 바닥을 가득 채운 글씨가 부질없이 느껴질 만큼, 당장 할 수 있는 일은 없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