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 #2

소설 연재

by 바달


투명하게 부딪히는 소리, 고즈넉하게 깊은 소리, 무거운 호흡의 표면 같은 소리.


샤워를 마친 설이는 방으로 들어가 옷장을 열었다. 커다란 흰색 티셔츠와 느슨한 고무줄 바지를 꺼내 입었다. 손의 힘이 약해지면서 단추가 많거나 몸에 붙는 옷은 입을 때 시간이 오래 걸렸다. 옷 입는 것까지 도움을 받고 싶지는 않은 날이었다.

방문 옆에 기다란 거울이 세워져 있었다. 설이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보았다. 몇 달 새에 체중이 많이 줄어든 탓에 안 그래도 큰 옷이 더 펑퍼짐해 보였다.


“설아, 차로 태워다 줄게. 오늘 지하철 운행 지연된다는데.”

엄마가 설이를 붙잡듯 말했다.

“버스 타면 돼요. 어차피 올 때도 혼자 와야 하는데, 뭐.”

“갈 때라도 태워다 준다니까 그래. 저녁때야 엄마가 학원 나가 있으니까 어쩔 수 없지만.”

“괜찮다니까요.”

설이는 급하게 짐을 챙겨 들고 현관문을 나섰다. 앞으로 얼마나 많은 것을 엄마에게 의지하게 될까. 혼자 할 수 있는 일은 가능한 때까진 스스로의 힘으로 하고 싶었다.

오랜만에 집 앞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파란색 플라스틱 의자는 햇빛을 받아 따뜻했다. 설이는 의자에 앉아 봄 공기를 들이쉬었다. 화창한 날씨였다.

정류장으로 들어오는 버스가 보였다. 안에 사람이 많아 보였지만, 이번 차를 놓치면 수업에 늦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앞문이 덜컹대며 열렸다. 버스 계단이 평소보다 높게 느껴졌다. 얼른 올라타길 재촉하는 듯한 버스 기사의 눈초리를 느꼈다. 비어 있는 손잡이를 잡으러 사람들 사이로 몸을 비집고 들어가려던 참에 버스가 출발했다. 설이의 두 다리는 버스의 가속을 버틸 힘이 없었다.

“어머나!”

설이의 체중이 옆에 서 있던 작은 체구의 아줌마에게로 쏠렸다. 맞은편에 서 있던 양복 차림의 아저씨가 설이의 팔꿈치를 붙잡아준 덕에 두 사람이 넘어지는 일은 막을 수 있었다. 설이 때문에 넘어질 뻔했던 아줌마는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날 선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젊은 아가씨가 왜 이래.”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설이를 붙잡아준 아저씨가 손잡이를 양보하고 버스 안쪽으로 들어갔다. 설이는 손잡이를 잡고 섰다.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버스가 출발하고 멈출 때마다 다리가 휘청거렸다. 머지않아 손가락 힘마저 풀려버릴까 봐 겁이 났다. 노약자석도 장애인석도 모두 사람으로 차 있었다.

설이는 힘을 다해 버스 손잡이에 매달렸다. 사람들이 오르내리면서 이따금씩 안쪽 자리가 하나둘 비곤했지만, 자리에 닿기 전에 버스가 출발해 버릴 것 같았다. 손잡이를 놓을 수 없었다.

여섯 번째 정거장을 지나칠 때쯤 설이의 손아귀 힘은 한계에 도달해 있었다. 겉보기에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이는 설이에게 나서서 자리를 내어주는 사람은 없었다. 생판 모르는 사람에게 말을 걸어 자신의 병을 설명할 바에야 차라리 내리고 말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버스가 다음 정거장에 정차하자마자 설이는 서둘렀다. 뒷문이 닫히려 하고 있었다.

“... 기사님 잠시만요.”

설이의 목소리를 들은 버스 기사가 빠르게 닫혀버린 하차 문을 다시 열어주었다.

설이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정류장 의자에 걸터앉았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새들은 시끄럽게 지저귀며 마침내 겨울이 지나갔다고 축제를 벌이고 있었다. 다음 버스를 탈 힘도, 지하철역까지 걸어갈 힘도 없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설이는 천천히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이제 막 돋아난 잎사귀들의 깨끗한 연둣빛으로부터 도망치듯 발걸음을 재촉했다.

무엇을 잘못했나. 어디서부터 잘못됐나.

너무 안일했나. 부지런히 건강을 챙겼어야 했는데.

욕심이 과했나. 몸을 혹사한 탓일까.

너무 둔했던 걸까. 몸의 이상을 일찌감치 알아채지 못한 탓인가.

아니면 너무 예민했던 걸까. 사소한 일에도 힘들어하는 여린 마음을 몸이 견디지 못한 걸까.

무엇보다도 병의 이유를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이 괴로웠다. 병의 이유를 자신에게서라도 찾을 수 있다면, 그렇게라도 탓할 무언가를 발견해 낸다면 차라리 견딜 만할까. 하지만 안일함이든 욕심이든, 둔함이든 예민함이든, 이런 대가를 치러야 할 만큼의 잘못이었던가.

피아노 앞에 앉은 채 보냈던 수많은 시간이 순식간에 눈앞을 스쳐 갔다. 문득 한 아이가 걸음마를 떼고 뜀박질을 하며, 연필을 쥐는 정교한 손동작을 해낼 때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 자신의 손과 발을 훈련하는지를 생각했다. 몸은 영원한 것도 아닌데 왜 인간은 마치 영원한 것을 가꾸는 듯한 정성으로 몸을 단련하는 걸까.


피아노를 연습하는 일은, 아니 몸을 단련하는 모든 일은, 육신으로부터 자유로워지려는 몸부림이었나 보다. 익숙지 않은 곡 앞에서 더듬대던 손은 숱한 단련 끝에 길어진 호흡으로 걸음을 걷는다. 반복되는 연습으로 육신은 지워지고, 음악만이 남을 때 비로소 연습이 끝난다.

인간이 몸을 단련하는 이유는 유한함의 저주를 입은 몸이 영원을 향한 갈망을 품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한 생명이 태어나 처음으로 허파에 찬 공기를 들이는 순간부터, 이 몸의 덧없음에 저항하는 몸부림이 시작되는지도 모른다.


그 저항이 죄였나. 그 벌로 이토록 철저히 유한한 몸에 갇혀 버리고 만 걸까.


설이는 계속 걸었다. 목적지 없이 그저 눈앞에 보이는 길을 쫓을 뿐이었다. 뻣뻣해진 종아리 근육 때문에 걸음걸이가 불편했다. 봄 햇살은 따사로운데 설이의 다리만 아직 한겨울인 것처럼 굳어 있었다. 차라리 공기가 찢어지게 차가웠다면, 매서운 바람이 볼을 얼얼하게 치고 지나가 주었다면 느린 걸음걸이가 조금은 덜 거슬렸을 텐데. 날카롭게 곤두선 신경은 뻣뻣해진 다리 근육을 오롯이 느껴야 했다.

명치가 뻐근할 정도로 숨이 막혀 왔다. 눈앞에 보이는 육교 계단에 걸터앉아 호흡을 가다듬었다. 몸이 굳어가는 것을 온전한 감각과 정신으로 견뎌야 하는 질병. 간지러워도 긁을 수 없고 고통스러워도 말할 수 없는 병이 존재하는 세상. 주저앉은 설이를 조롱이라도 하듯, 긴 하루가 평온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설이는 자신을 제쳐두고 지나가는 시간의 뒤통수를 바라보다가 분연히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하루가 끝나기 전에 자신에게 남은 걸음을 모두 소진해 버리기로 했다. 아무리 걸음을 아껴 두어도 시간은 무자비하게 그 전부를 빼앗아 갈 것 아닌가. 예상치 못한 어느 날에, 설이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지도 못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었다. 더 이상 시간의 농락에 놀아나고 싶지 않았다. 가진 것을 매일 하나씩 빼앗기는 날들을 견딜 수가 있을까. 매일 퇴보하는 삶이라면 무엇을 바라며 살아 있어야 하나. 걸을 수 있는 걸음에 끝이 있다면 그 끝은 스스로 정하고 싶었다.


하지만 스스로의 의지로 남은 걸음을 다 걷고 나면, 그땐 이 싸움에서 이겼노라고 말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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