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연재
아파트 단지와 초등학교 운동장을 지나고, 횡단보도를 건너 언덕을 올랐다. 골목을 지나 대로변을 걷다가 또다시 골목으로 접어들었다. 무릎이 시큰거리고 발바닥이 아팠다. 종아리는 뻐근했고 몸에 힘이 빠져 균형을 잡기 어려웠다. 그럴 때마다 설이는 아무 곳에나 주저앉아 숨을 고르고 다시 일어나 걸었다. 무언가에 쫓기는 듯이 모든 걸음을 걸었다. 아무리 걸어도 그 손아귀를 벗어난 것 같은 해방감은 찾을 수 없었다. 너무 오랫동안 동화같이 아름다운 거짓말에 속아 눈이 멀어 있었다. 성큼성큼 다가오는 운명의 발걸음을 한 번도 눈치챈 적이 없었다. 속절없이 막다른 골목으로 내던져진 것 같았다. 이제 더 도망칠 곳이 없었다.
어느덧 작은 공원에 들어섰다. 공터에서 뛰노는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산책하는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두 손을 들어 올려 귀를 막았지만, 흙바닥에 살랑거리는 잎사귀의 그림자마저 평화로웠다.
병원에서 보았던 사람들을 떠올렸다. 이제 이 화창한 공원은 더 이상 설이의 세상이 아니었다.
공원 길을 따라 힘없이 걷던 중에 길가의 표지판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순교 성지.
저길 가면 기도할 수 있을까.
설이는 기도하는 법을 알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누구에게라도, 이를테면 신에게라도 원망을 쏟아내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예배당이라 적힌 곳으로 커다란 문을 열고 들어갔다. 다리를 높이 들어 올릴 수 없어서 신발이 자꾸만 바닥에 끌렸다. 그 소리가 조용한 예배당 안에서 유독 크게 울렸다. 불편한 마음을 누르고 한 발씩 조심히 내디뎠다. 나이 든 여인들이 소리 내어 기도문을 암송하고 있었다.
모후이시며 사랑이 넘친 어머니,
우리의 생명, 기쁨, 희망이시여,
당신 우러러 하와의 그 자손들이
눈물을 흘리며 부르짖나이다,
슬픔의 골짜기에서.
...
설이는 예배당 안으로 걸어 들어가 길쭉한 나무 의자에 앉았다. 기도라는 걸 해 본 적이 있었나. 초등학교 때, 친해지고 싶은 친구를 따라 교회에 나가본 적은 있었다. 성격이 밝았던 친구는 교회에 따라 나온 설이를 각별히 챙겨주었다. 한참 동안 모르는 노래를 쫓아 부르고 나면, 전도사님이라고 불리는 얼굴이 동그란 남자가 강대상에 올라 신기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거대한 배를 만들어 큰 홍수에서 살아남고, 지팡이로 바다를 가르고, 물을 포도주로 바꾸었다는 이야기. 하늘에 닿도록 높이 바벨탑을 쌓으려다가 신의 저주를 받았다는 사람들과, 무너져가는 고향을 뒤돌아보았다가 소금 탑으로 변해버렸다는 여인.
얼굴이 동그란 남자의 긴 이야기가 끝나고 나면 아이들은 눈을 감고 두 손을 모았다. 선생님은 하나님과 대화를 하듯 기도하면 된다고 말했다. 아이들은 마치 눈을 감으면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기라도 한다는 듯이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모두 각자의 신을 만나고 있었던 걸까. 이렇게 한 곳에 모여 각자의 신에게 기도하는 모습이 설이의 눈에는 이상하게 보였다.
하지만 그때조차도 신이 있다는 말만큼은 싫지 않았다. 자신의 수많은 생각이 그 누구에게도 전해지지 못한 채 사라져 버리는 것이 싫었다. 자신마저도 잊곤 하는 사소한 순간까지도 누군가가 기억해 줬으면 했다. 무한의 순간으로 연결된 직선의 시간과 그 모든 순간의 점으로부터 뻗어낸 무한의 평면을 다 기억하려면, 그것은 텔레비전에 나오는 신비한 요정 따위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그것은 무한대의 신이어야 했다.
새해가 되자, 설이를 교회에 데리고 다니던 아이는 새로운 친구를 사귀었고, 더 이상 설이에게 관심 갖지 않았다. 설이도 그 이후로 교회에 간 적이 없었다.
고개를 들어 예배당 정면을 바라보았다. 예수가 고개를 떨군 채 두 팔을 뻗고 십자가에 매달려 있었다. 사지에 못이 박힌 예수에게, 굳어가는 손과 발을 돌려내라고 기도하려는 자신이 우스꽝스럽게 느껴졌다. 몸을 일으켜 예배당에서 걸어 나왔다. 옆에 작은 전시관이 있었다. 설이는 무심하게 전시관 안으로 들어갔다.
한 여인의 그림이 유독 눈에 들어왔다. 하얀 한복을 입고 온화한 미소를 띤 얼굴 뒤로는 누런 후광이 서려 있었다. 옆에 작게 적힌 설명을 따라 읽었다. 백 년도 전에 이곳에서 배교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참수당한 사람이었다.
잔혹한 문초에 뼈가 부러지고 살이 너덜너덜하게 찢어졌으나…
아들을 나무에 매단 신에게서 이 여인은 무엇을 찾았던 걸까. 무엇을 보았길래 그것을 목숨보다 중히 여겼을까. 설이는 무슨 대답을 바라듯이 여인의 초상화 앞에 오래도록 앉아 있었다.
여인의 표정만큼 그 입술도 고요했다. 이젠 집으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저하다가 결국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설이는 말없이 조수석에 앉아 창밖을 내다보며 생각했다. 그림 속 여인이 신에게서 죽음의 이유를 찾은 것처럼, 자신도 살아있음을 견디려면 그 이유를 찾아야 한다고. 단지 죽지 못해 사는 삶을 살 수는 없다고.
설이는 그날 이후로 자주 악몽에 시달렸다. 누군가를 쫓거나, 누군가에게 쫓기고 있었다. 끝없이 내려가는 계단 위에 서 있었고, 집 앞 익숙한 거리에서 길을 잃고 헤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