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 #2

소설 연재

by 바달



탄식과도 같은 호흡을 내뱉으며 잠에서 깨어났다. 너무도 생생한 꿈이었다. 오랜만에 괴롭지 않은 밤이었기에 여운이 사라질 때까지 가만히 누워 있었다. 문득 점심에 약속이 잡혀 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핸드폰을 켜 시간을 확인했다. 오전 10시. 아직 시간이 남아 있었다. 매일 새벽마다 뒤척이다 몇 번씩 깨곤 했는데, 이렇게 깊은 잠을 잔 건 꽤 오랜만이었다.

나갈 채비를 마친 설이는 집 근처 한 국밥집으로 향했다. 중고등학교 시절 단짝처럼 친했던 친구에게서 오랜만에 연락이 왔다. 컨디션이 좋지 않다고 둘러댔지만, 친구는 설이의 집 앞까지 찾아오겠다며 고집을 부렸다. 마지못해 잡은 약속 날이 다가올수록 마음이 무거웠다. 젓가락질이 어려워진 모습을 구태여 오랜 친구에게까지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국밥집은 일부러 숟가락만으로 먹을 수 있는 음식을 골라 정한 식당이었다.

오래된 노란색 간판 아래의 무거운 유리문을 밀어 열고 식당 안을 들여다보았다. 자리가 많지 않은 작은 식당이었다. 친구의 얼굴이 보였다. 먼저 도착해 안쪽에 자리를 잡고 있던 모양이었다.

“설아, 여기야.”

친구는 활짝 웃었다. 대학교에 간 뒤로 자주 보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만날 때마다 한결같이 편한 친구였다.

“오랜만이다. 멀리 오느라 힘들진 않았어?”

“힘들긴 뭐가 힘들어. 별걱정을 다 하네. 그게 미안하면 다음번엔 네가 우리 집 근처로 와.”

친구는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설이는 양손으로 테이블을 붙잡고 의자에 앉았다. 다리를 굽혀 앉고 일어서는 것이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었다.

“뭐 하고 지내?”

설이가 자리에 앉자마자 먼저 입을 열었다. 자신의 근황을 오랜 친구에게 설명해야 한다는 부담을 조금이라도 뒤로 미루어 볼 심산이었다.

“나 요즘 유학 준비하고 있어. 토플 성적 맞추느라 골치 아파.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영어 공부나 열심히 해둘 걸 그랬어.”

연주가 자신의 천직이라도 되는 양 무대에 서는 걸 좋아했던 친구였다. 무대 위에서 춤을 추듯 피아노를 연주하던 모습이 눈에 선했다. 피아노 앞에 앉으면 반짝이던 친구는, 반면에 책상 앞에만 앉으면 금세 꾸벅거리기 일쑤였다. 실기 성적에 비해 내신 성적이 잘 나오지 않아 원하던 만큼 좋은 대학에 가지는 못했지만, 언제나처럼 밝은 모습으로 자신의 대학 생활을 즐기는 듯했다.

“토플 공부하려니까 자꾸 너랑 독서실 다니던 때가 생각나. 너랑 있으면 왠지 모르게 나도 부지런해지는 기분이 들어서 좋았는데.”

친구의 말에 독서실에서 같이 공부했던 고등학교 시절이 떠올랐다. 대학에 입학하는 게 세상의 전부처럼 여겨지던 시절이었다. 방과 후에 연습실로 가서 피아노 연습을 마치고 나면 밤 10시가 넘어 있었다. 진이 빠진 몸을 끌고 독서실에 가서 새벽까지 책상 앞에 앉아 있어야 했던 날들이었다.

“넌 정말 부지런했잖아. 독서실에 가면 항상 있었어.”

“에이, 뭘…”

독서실에서 설이를 깨어 있게 한 것은 미래에 대한 불안이었다. 하지만 친구는 설이의 불안을 항상 부지런함이라고 불러 주었다. 친구는 설이와 같이 있으면 그나마 공부할 맛이 난다면서 같은 독서실에 등록했었다. 가끔 선물처럼 나타나선 꾸벅꾸벅 졸던 친구. 고단했지만 외롭지만은 않던 시간들은 분홍빛 기억으로 남아있었다.

주인아저씨가 양손에 국밥 두 그릇을 들고 나타났다.

“뜨거우니까 조심들 하세요.”

아저씨는 뚝배기를 내려놓으며 정감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숟가락을 집어 들려했으나 납작한 손잡이가 손가락에 잡히질 않았다. 친구에게 어딘가 어색한 몸놀림을 들킬까 봐 긴장한 탓이었을까. 설이는 급히 숟가락을 테이블 모서리로 끌어당겨 집어 들었다.

“너는 어떻게 지내고 있는데? 몸은 좀 괜찮아?”

친구는 뜨거운 국물을 한 숟갈 뜨며 물었다.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하는 걸까. 1년에 10만 명당 한두 명 걸린다는 희귀병이 자신에게 찾아온 이유를 알지 못했다.

“그냥 몸에 힘이 좀 없어. 병원에서 무리하지 말라고 해서 학교 다니는 것 말고는 별거 안 하고 있어.”

거짓말은 아니었다. 설이는 학교에 간신히 다니고 있었다.

“그래, 넌 너무 열심히 살아. 이참에 좀 쉬엄쉬엄해. 무리하지 말고 병원에서 하라는 대로 하고.”


공감은 감정의 확장이다. 인간은 자신이 가본 적 없는 낯선 곳으로 감정을 확장하는 법을 알지 못한다. 어느 날 삶의 이정표를 잃고, 이제는 평범한 일상마저 하나씩 내어주어야 하는 마음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설이는 자신의 느려진 걸음걸이를 반복적으로 설명해야 했다. 그 설명을 들은 사람들은 자신이 모르는 고통 앞에서 당황하곤 했다. 설이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흔들리는 눈빛들을 보았다. 누군가는 놀랐고, 누군가는 울먹였고, 또 누군가는 덤덤했다. 사람들은 위로의 말을 늘어놓곤 했지만, 그것은 설이의 마음을 살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감정을 추스르는 것일 뿐이었다.

수많은 질문과 섣부른 위로 속에서 설이는 자신이 그동안 속했던 사회와 서서히 단절되어 가는 것을 느꼈다. 오랜 친구에게조차 그런 감정을 느끼기에는 너무 지쳐 있었다. 설명을 덧붙이려던 설이는 이내 말을 삼키고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국밥은 적당히 식어 먹기 좋은 온도가 되어 있었다.

“나 이번에 시립 오케스트라랑 협연하게 됐어.”

친구가 조심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잘 됐다. 어떤 곡으로?”

“베토벤 황제.”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5번, Op.73.

베토벤이 적군에 의해 점령된 도시에서 난청으로 고통받으면서도 작곡해 낸 피아노 협주곡의 정점. 장엄하고, 슬프고, 아름다운 곡. 이제는 닿을 수 없는 곡.

“그거 너무 좋지. 기대된다.”

설이도 환하게 웃어 주었다. 마음 한편이 아려왔다.

친구는 졸업 후 무엇을 해야 할지, 앞으로의 커리어는 어떻게 쌓아갈지 고민하는 평범한 대학생의 삶을 살고 있었다. 그에 비해 설이의 대학 생활은 흩어지는 수증기를 붙잡아보려는 시도 같았다. 밤낮으로 학교 도서관과 피아노 연습실을 오가던 수많은 날들은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 공중으로 흩어지고 있었다.

친구의 유학 준비에 대해서도 궁금한 것이 많았다. 하지만 그만큼 자신에 대한 질문도 돌아올까 두려워 더 이상 아무것도 물을 수 없었다.

“참, 걔 기억하지? 나랑 같은 대학 다니는 애.“

잠깐의 정적 끝에 친구가 다시 입을 열었다. 설이는 누구를 말하는 건지 짐작이 가지 않아 말없이 친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시각장애 있어서 네가 필기 빌려주던 애 있잖아.”

중학교 때 같은 반이었던 시각장애인 친구의 얼굴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응, 기억나.”

시각장애라는 말이 쓸쓸히 머릿속을 맴돌았다. 자신도 얼마 안 가 장애 판정을 받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사실이 아직도 믿기지는 않았다.

“요즘 얼굴이 안 보이더라고. 친한 사이는 아니라 연락은 못 해봤는데, 갑자기 생각나서.”

“왜, 무슨 일 있대?”

친구는 국물 아래 남은 쌀알을 천천히 건지며 머뭇거렸다.

“학교 가는 길에 버스 사고가 있었다는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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