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연재
텔레비전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는 단조로웠다. 드라마 한 편 보기 어려울 만큼 바쁘게 살았던 때도 있었는데, 이제는 하루 종일 텔레비전 앞에 앉아 있었다. 화면 속 세상도 이젠 답답하게 느껴졌다. 텔레비전을 차라리 꺼 버리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하지만 손을 뻗어도 소파 테이블 위의 리모컨에 닿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소파에 적당히 파묻혀 있는 지금의 자세를 구태여 흩트리고 싶지 않았다. 몸을 뒤척이는 것도 근육이 하는 일이다. 한 번 편안한 자세를 잡는 데 성공하면 그 자세가 불편해질 때까지는 가만히 있는 게 현명했다.
추석 연휴였다. 할머니는 오늘도 손주들을 위해 푸짐한 갈비찜을 만드셨겠지. 할아버지는 오늘도 소파에 구부정히 앉아 텔레비전을 보고 계시겠지.
전화벨이 울렸다. 엄마가 하던 설거지를 멈추고 식탁에 올려두었던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네, 어머님. 다들 잘 계시죠? 설이도 잘 있어요. 네, 바꿔드릴게요.”
엄마가 전화를 스피커폰으로 바꾸어 설이의 무릎에 올려 주었다.
“할머니… 저예요.”
“설이니. 잘 있어? 몸은 좀 어떠니?”
“잘… 있어요.”
어눌한 말투에 쉰 소리가 섞여 나왔다.
“어? 잘 안 들린다, 우리 손녀 맛있는 것 해주고 싶은데, 할미가 힘이 딸려서 서울 올라갈 수도 없네”
“괜찮아요...”
“뭐라고?”
“괜찮… 다고… 요.”
“... 뭐라는지 들리질 않네.”
할머니는 귀가 안 좋으셨다. 큰 소리를 낼 수 없는 데다가 발음까지 어눌해진 설이의 말을 할머니는 잘 알아듣지 못하셨다.
“괜찮대요, 어머님. 설이 잘 먹고 잘 지내고 있어요.”
오랫동안 보지 못한 얼굴들이 그리웠다. 그렇다고 해서 이런 몸으로 친척들을 마주하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명절마다 공부는 잘하고 있냐고, 졸업하면 뭐 할 거냐고 물어보던 친척들이 자신을 보고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곤란해하는 모습은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엄마와 아파트 단지 산책을 하러 나갈 때 이따금씩 마주치는, 참견하기 좋아하는 옆집 아줌마보다도 친척들과의 만남이 더 괴로울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자신의 모습이 명절 때마다 보았던 할아버지의 모습과 닮아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해 한 해 거동이 느려지시더니, 언제부턴가 텔레비전 앞 소파를 세상의 전부인 것처럼 편안해하시던 할아버지.
설이는 자신에게 찾아온 것이 소수의 사람들만 겪는 희귀한 질병이 아니라, 모든 이에게 찾아오는 노화일 뿐이라고 생각하면 분한 마음이 조금은 잠잠해질까 생각했다. 속도의 차이일 뿐, 모든 사람은 죽음을 향해 가고 있으니까. 모든 몸은 나이 듦에 따라 약해지고, 굳어가고, 썩어가고 있으니까.
젊을 땐 누구보다도 힘이 넘치고 활동적이셨다는 할아버지는 쇠약해진 당신의 몸에 어떻게 적응하신 걸까. 어떻게 집 앞 산책만으로 만족할 수 있는 사람이 되신 걸까. 집 한구석, 텔레비전 앞이 어떻게 답답하긴커녕 가장 편안한 장소가 될 수 있었을까. 몸이 늙는 것처럼 정신도 나이를 먹을 수 있는 걸까. 그럴 수 있다면 몸과 마음이 같은 속도로 늙어가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인가.
이젠 꿈속에서나 이따금씩 느껴질 정도로 희미해진 젊음이었다.
브런치북 <물의 유희 2부>에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