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연재
보송한 아기의 솜털 같은 바람이 불어와. 공기 중엔 향긋한 가을 냄새가 가득해.
발 아래 파삭하고 밟히는 가벼운 낙엽들을 봐. 계절이 무르익었어.
샛노랗게 단풍 든 자작나무 숲을 걷고 있어. 세상은 이제 노랑과 연두 사이의 신비로운 빛깔이야.
잎을 떨굴수록 점점 더 무거워질 가느다란 나뭇가지들은 찬란한 색감으로 마지막을 노래하고 있어.
노란 빛깔을 잔뜩 머리에 얹고, 가느다란 몸통으로 위태롭게 서 있는 저 나무들은 엄마가 해주던 기다란 콩나물 반찬 같아. 나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와.
노르게 물든 이파리들이 하늘 높이에 매달려 햇살처럼 반짝이고 있어. 숨결 같은 바람에도 떨어져 내릴 듯한 아슬아슬한 춤사위야.
이 가을 숲은 쓸쓸하나 스산하진 않아. 늦가을의 따스한 햇살이 자작나무의 흰 껍질마다 물들어 있어.
시원한 흙냄새와 산뜻한 나무 향기가 나의 발걸음을 인도해. 나는 너를 찾을 수 있어.
높이 솟은 나무들 사이로 아스라이 펼쳐진 저 푸른 하늘을 봐. 나는 저 높은 곳에도 닿을 수 있어.
계절의 품 같은 숲을 지나 드넓은 언덕을 올라. 끝없이 펼쳐진 갈대들이 선선한 산들바람에 몸을 내맡기고 있어.
한없이 일렁이는 저 은빛 파도를 봐. 우수수 하고 스치는 갈대의 소리는 무성한 금빛으로 퍼져 가고 있어.
언덕 위로 세찬 바람이 불어와. 옷 한 벌 없이 헐벗은 것처럼 몸이 가벼워.
갈대 향기가 내 머리카락을 흩트려 놓아. 짙은 가을 내음 속에서 밀려오는 슬픔을 나는 떨쳐내.
드넓은 언덕은 광활한 하늘과 맞닿아 있어. 나는 마침내 삶이라는 무대를 완주한 연주자와 같아.
나는 숨길 것 없이 헐벗고 있어. 가진 모든 것을 쏟아낸 한 명의 연주자처럼 말이야.
곧게 뻗은 두 다리는 꿋꿋하고 당당해. 서툰 연주를 마치고 관객을 마주한 어리숙한 연주자의 것과 같아.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작은 실수들까지도 그 손엔 얼룩처럼 남아있을 거야. 하지만 연주자는 그 손을 부끄러워하지 않아.
허리를 곧게 세우고 서서 관객을 향해 인사해야 해. 나의 발걸음은 멈추지 않아.
푸른 회색빛의 바람이 불어와. 먼 바닷가에서 불어오는 향기인 것 같아.
나는 슬프게 태어나 슬프게 잠드는 사람이야. 하지만 저길 봐, 길었던 나의 슬픔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풋내 나는 감나무 열매가 되어 있었어.
숨이 차올라. 나는 정상에 다다라. 작은 감나무 밑엔 네가 서 있어.
네가 환하게 웃고 있어. 그렇게 예쁜 미소를 본 적이 없어.
너는 몸을 내던지듯 안겨드는 나를 밀어내지 않아. 이젠 이 품을 벗어나지 않을 거야.
나는 너의 눈을 바라봐. 슬프도록 깊고, 아득하도록 평온해.
너는 내 이마에 살며시 입을 맞춰. 너의 입술은 부드럽고 포근해.
빼앗기길 겁내는 사랑은 지나치게 조심스러워. 하지만 나는 이제야 깨달아.
기억으로, 흔적으로, 메아리로 남은 추억들을 나는 단 한 번도 빼앗긴 적이 없어.
내가 그리워한 건 네가 아니라 나야. 손끝에 흩날리는 삶을 보며 아렸던 가슴, 그건 분명 사랑이었어.
나의 생은 온전히 나의 것이었기에 나는 그것을 그리워하는 데에 거리낌이 없어.
저 예쁜 감나무를 봐. 너는 내가 삶을 미워했던 순간들마저도 기꺼이 용서할 거야.
알고 있지. 가엾이 떨리던 나의 심장을, 길었던 나의 설움을.
그래도 너는 기억해 주지 않을래,
내가 얼마나 간절히
이 생을 사랑했는지를.
그동안 『물의 유희』를 사랑해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영원하지 않은 것들에 대한
슬픔과,
애도와,
사랑을 담아.
바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