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에 머물게 되는 주말의 오전이면 거의 청색 반팔 티셔츠와 옅은 하늘의 반바지를 배바지해 입고 왼팔에는 휴대폰을 넣은 암 밴드와 카시오 손목시계를 착용하고 검은 운동화 차림으로 집 뒤에 있는 공원을 향한다. 그날의 주말 오전도 어김없었다. 총 한 시간 미만의 운동은 주말의 시작이다. 잠들어 있는 신체를 깨우기에 충분한 시간인 한 시간 미만의 시간은 철학의 길을 걷던 두 시간과 버금가는 사색의 시간이다. 더운 볕 아래 달리면 어떤 생각이 들겠냐마는―달리면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묻던 아내의 말을 빌려―단 시간에 무수한 생각들의 파편이 스쳐 박힌다. 음절 하나, 낱말 하나가 기어올라오고, 어떨 때는 행이 긴 문장이 주르륵 넘쳐날 때가 있다.
느림을 의도적으로 선택하고 머릿속 수많은 단어와 문장들을 내뱉기까지 짧게는 몇 초에서부터 길게는 몇 분을 입 속에 머금었던 시절이 있었다. 아내와 연애를 시작하고 1년이 더 지난 시점일까. 고민의 심고를 말에 싣기에는 육성이 감당 안될 때 도리어 말은 더욱 무거워져 발화되지 못했다. 말이 허기질 때면 저녁 식사로 공허를 채웠다. 총각 시절 조촐한 저녁은 기본 밥거리 하나, 소주 한 병이 전부였다. 메인 요리이자 밑반찬이자 안주인 무엇과 소주 한 병이면 그날의 저녁은 충분했다. 술은 입을 더욱 무겁게 했고 그날의 모두를 복기하며 질서정연하게 머릿속 생각들을 나열시켰다. 거의 유일한 혼자만의 시간이 그때였다. 일을 마치고 터덜터덜 옥탑방 문을 열고 들어가 앉은 그때.
느림이 아름답고 시와 같다고 생각하며 스스로 타당을 부여하고 살았다. 하지만 나는 결코 느린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느림을 추구하지만 빨리빨리가 나를 지배했고 천성에 못 이겨 느린 것을 놓치고, 생각과 말들이 공기 중에 흩뿌려졌다. 그렇게 또 몇 년은 흘렀고 나는 남편이 되었고 아빠가 되고 있다. 나의 느림의 시작은 종교였고 아내였으며 책이었다. 그날의 양양 역시 동네에 머물게 되는 주말과 다름없었다. 거의 청색 반팔 티셔츠와 옅은 하늘의 반바지를 배바지해 입고 왼팔에는 휴대폰을 넣은 암 밴드와 카시오 손목시계를 착용하고 검은 운동화 차림으로 양양에 놓인 각종 해변가를 향했다. 무리하지 않는 시간만을 운동했다. 수많은 벤치가 있었다. 그 수많은 벤치 중 저 끝 유독 떨어져 있는 벤치 근처에 한 노모가 서 있었다. 그리고 그녀 곁 노견은 엉덩이를 그녀 곁으로 붙이고는 바닥에 앉아 있었다. 노모는 한 발 한 발 벤치로 걸음을 옮겼고 노견은 곁에서 그녀의 걸음에 맞춰 하나, 둘, 셋, 넷 착실하게 걸음을 맞췄다.
나는 나름의 최선으로 달렸고 A지점에 B지점을 찍고, 다시 B지점에서 A지점을 경유해 숙소로 돌아왔다. 기록을 위한 어플 속 시간은 한 시간을 가리켰고, 그 시간 안에 노모와 노견은 여전했다. 여전히 자리를 지킨 그들에 대한 가벼운 의문은 거기에 그냥 두고 숙소로 돌아와 샤워를 하고, 외출 준비를 마치고 갈증 해소와 더불어 우리 가정에서의 당연한 선택인 평양냉면을 먹었다. 양양에서는 거의 유일한 평양냉면. 서울 중구에서 먹은 것과 마포구에서 먹은 것과 그 외의 것들과는 다소 다르지만 그만의 매력이 충분했던 평양냉면이었다.
그날 그냥 한 번 본 그 광경은 그날로 족했고 나는 다시 나와 우리 가정의 주기에 맞춰 적당히 바쁘게 살아가고 있다. 가정을 꾸리고 시간을 이제야 바둑판 위에 올려놓고 살아가는 지금에서야 본 노모와 노견의 동선과 시간은 썩 강하게 남아 있다. 나는 그들보다 동 시간에 물리적 거리를 풍성하게 취했고 그들은 나보다 유대의 깊이를 서로 간―늙은 개와의 시간―에 나누었다. 그리고 아직 아내에게도 말하지 않은 문장이 존재한다. “그들의 동행이 말이야, 그냥 나는 슬펐어. 뛰다 말고 서서, 아, 조금 거리를 두고 섰어. 부담스러우니까. 그리고 좀 지켜봤어. 5분? 긴 시간인가? 서로가 서로를 아는 거 같았어. 걸음을 맞추더라고. 배려했어. 사랑했고. 느렸지만 강렬했어. 그리고 아름다웠어. 노인의 흰머리는 세월이 내려앉았고 노견의 눈 아래의 검은 칠은 인내가 묻어 있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