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네 시 정도일 거 같다. 계절에 따라는 다섯 시일 수도 있는 적당한 시간에 맞춰 익숙하고도 영문 모를 슬픔이 어김없이 몰려온다. 함께여도 혼자인 듯한 그 시간에는, 지금의 공기와 닮아 있는 과거의 어느 시간으로 나를 이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발 딛은 서울은 내게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이고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자 이상의 <날개>였고, 염상섭의 <삼대>와 김광섭의 <성북동 비둘기>였을 뿐이었다. 책상에 앉아 교과서와 시험지로 접한 서울은 막연했고 나와는 접점이 아무리 해도 없겠거니 미련 없이 붙잡지도 않았던 곳이었다. 대학생이 된다면 그제야 가게 될 수도 있는 곳이었고, 설사 가족의 길을 따라 나 또한 교사가 되었다면―당연히 교사가 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대구‧경북 사범대, 교대를 나와 대구‧경북에 직장을 구하고 대구‧경북에서 연애를 하고 대구‧경북에서 결혼을 했을 것이다. 뭐에 홀린 것마냥 수능 며칠을 앞두고 진로를 바꾸었고 소설에서 접한 서울에 거처를 옮겨 살게 되었다.
책상에 앉아 내일을 낙서했던 과거의 나는 지금의 나를 짐작했을까? 그때의 나에게 이제 겨우 나는 말할 수 있게 되었다.
혜화동에 처음 자리잡아 청량리―명동을 비롯해 중간중간 헤아릴 수 없이 여러 곳에 자리잡다 떠났다―에서 이문동까지 월세살이는 지속되었고 전세 보증금이라는 개념은 내 삶에 존재할 수 없었다. 시간은 흘렀고 이문동의 몇 년이 지나 정릉동으로. 정릉동에서 수유동을 지나 연남동 짧게 묵었다 일산으로 정착했다. 특히 이문동. 한국외국어대학교 정문을 뒤에 두고 좌측으로 얼마―지금은 재개발이 진행되는 듯하다―를 걸어 위치했던 나의 거처. 내게 필모그래피가 있다면 2016년, 이문동에서의 삶이 가장 꽉 찬 시기가 아니었을까. 이문동으로 자리한 사연을 떠올리면 개연성 가득했다. 혜화동에서 살던 당시, 월세를 내지 못해 이사를 가야 했고, 성균관대학교 부근 친구 집에서 몇 개월을 지내다 미안과 염치로 어딘가를 가야 했고 고교 동창과 술 한잔 나누다 사연을 들은 외대생 친구는 자신의 집에 몇 개월을 묵게 해 주었다. 그 당시 외대는 저렴했고 조용했다. 다시 저렴했다. 저렴한 게 가장 큰 이유였다. 작은 집 하나 구해 꽤 오랜 시간을 머물렀다. 다시 동대문구, 성북구, 강북구, 마포구를 지나 서울을 벗어나 버렸다…….
더 적어 내지 못한 서울. 모든 것 하나하나가 시작이었던 이문동 구석 어디에 있는 내가 떠올린 나의 서울은 스무 살과 서른을 빈틈없이 관통한 하나의 정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