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lacebo - Too Many Friends
I got too many friends
Too many people
That I'll never meet
And I'll never be there for
I'll never be there for
Cause I'll never be there
‘Too Many Friends’ - Placebo - <Loud Like Love> 2013
돌이 좀 지난 아기와 지하철을 탔었다. 아기의 밥때가 되어 어쩔 수 없이 준비해온 주먹밥을 먹이는데 옆과 앞에 앉아 있던 어르신들이 한 마디씩 했다.
잘 먹는다는 칭찬에서부터 시작해 몇 개월 됐느냐, 우리 손주도 몇 개월 됐다, 과자 같은 거 먹이면 안 된다, 밥을 먹여야 한다, 어떤 음식이 좋다, 이런 음식을 만들어 줘야 한다, 등등 모든 분이 한 마디씩 보태셨다.
그 많은 말에 감사하긴 하다. 다 아기가 예뻐서 하는 말들이지 나쁜 마음으로 말하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솔직히 귀찮은 건 어쩔 수 없었다. 아기에게 밥 한 숟가락을 먹이는 것도 고도의 집중력을 요구하는 스포츠인데, 동시에 훈수 두는 말들에 맘 상하지 않게 적당히 답해야 하는 건 솔직히 피곤한 일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아무 말 없이 그저 미소 만을 받고 싶다.
회사에서 회사 페이스북 페이지를 만들었으니 ‘좋아요’를 눌러 달라고 했다. 나는 대답만 하고 누르지 않았다. 나는 조용히 회사에 다니고 싶은 사람이다. 회사는 나의 기본적인 정보 외에는 아무것도 몰라 주었으면 한다. (하긴… 그 기본적인 정보가 이미 치명적인 정보이긴 하다)
회사를 위해 ‘좋아요’ 한 번 누르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좋아요’를 누름으로써 나의 페이스북 프로필과 사진들, 포스팅 등이 그들에게 노출되는 것이 싫었다. 나는 나의 기호와 사상을 별로 친하지도 않은 사람에게 커밍아웃하고 싶지 않다. 깔끔하게 서로가 합의한 계약 관계로서의 예의만 지켜 주었으면 좋겠다.
별로 친하지도 않은 사람이, 어쩔 수 없이 친한 척해야 하는 사람이 내 인생의 영역으로 침범해 들어오는 것이 나는 싫다.
SNS를 보면 누가 어디에 누구와 함께 있는지 실시간으로 알 수 있다. 나는 그런 포스팅들을 볼 때마다 음험한 상상을 한다. 마음만 먹으면 어떤 사람의 하루를 쉽지 않게 추적할 수 있으며, 그 하루하루를 모으면 그 사람의 패턴을 알게 될 테고, 그렇게 되면 그 사람의 행동, 혹은 그 사람의 앞으로의 행동도 예측할 수 있다.
생각해 보면 너무나 쉽게 누군가를 스토킹 할 수 있는 세상에 살고 있다. SNS를 통해 우리는 이미 거대한 힘을 가지게 되었다. 우리는 지금 누군가를 스토킹하고 언제라도 뒤를 캐낼 수 있는 도구를 하나씩 다 가지고 있는 셈이다. 당신이 잠든 사이에 누군가 당신을 엿보고 있을지도 모른다. 지금 곁에 있는 사람보다 더 정확하게.
신용카드 회사로부터 전화를 받았었다. 지금 쓰고 있는 카드로 공과금을 자동 이체해 놓으면 할인 혜택이 있으니 이용해 보라는 전화였다. 여기까지는 흔한 광고 전화였다. 하지만 그 뒤가 문제였다. 내가 원한다면, 내가 지금 이 통화 상태에서 내가 승인만 해주면, 자동으로 자동이체를 신청해 준다는 거다. 내가 추가로 해야 하는 절차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지금 내가 오케이 사인만 주면 모든 게 끝나는 것이었다. 나는 왠지 찝찝한 마음이 들어 내가 알아서 하겠다고 하고 전화를 끓었다. 그리고 카드 회사의 오지랖에 대해서 생각했다. 내 가정의 공과금 할인까지 챙기다니….
생각해보면 이런 비슷한 일이 심심치 않게 일어난다. 내가 가입해 놓은 인터넷 사이트에서는 매년 내 생일 때마다 생일 축하 문자와 이메일 보낸다. (내 가족은 물론이고 나 자신조차 깜빡할 때가 있는 내 생일을!!)
웹서핑을 하다가도 섬뜩해질 때가 있는데, 내가 좀 전에 검색해본 상품의 광고가 인터넷 창 옆이나 중간에 주르륵 뜬다거나, 유튜브에 들어갔을 때 내가 좋아할 것 같은 영상만 골라 윗자리를 채우고 있을 때이다. 나의 선호를 인터넷이 꾸준히 기록하고 분석한다는 데서 오는 섬뜩함이다. 이렇게 관심과 오지랖, 그리고 집착의 경계가 점점 희미해지고 있는 건 아닌지 생각했다.
나는 아파트에 산다. 1년여 살다 보니 양 옆집과 아랫집 할머니 하고는 지나가다 마주치면 인사하는 사이가 되었다. 그 이상까지는 별로 바라지도 않는다. 그리고 그 외에 다른 얼굴은 알지 못한다. 별로 알고 싶지도 않고.
SNS를 사용하게 된 후로는 연락이 뜸했던 사람에게 연락할 일은 없어졌다. SNS를 통해 그냥 알 수 있으니까. 얼마 전에 미국으로 유학을 간 친구가 있다. 친했는데, 결혼하고 서로 바빠서 만나지 못했었다. 결국, 얼굴 한번 못 보고 유학을 떠났지만, 멀리 있다는 느낌은 없다. SNS 상에선 늘 가깝게 있으니까.
SNS 안에 친구 목록 중에는 내가 한 번도 만난 적 없고 때로는 얼굴도 모르는 사람이 친구로 등록되어 있다. 대부분은 누구의 친구, 혹은 누구 친구의 친구 같은 식으로 내가 추가한 사람도 있지만, 도무지 누구인지, 왜 내가 이 사람을 친구로 추가했는지조차 생각이 나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그리고 나는 그 친구들의 소식까지도 별생각 없이 쳐다보고 있을 때가 많다.
스마트폰 안에 전화번호부는 이미 내가 기억할 수 있는 범위를 넘었다. 전화번호 목록을 보고 있으면 모르는 사람이 너무 많다. 분명히 내가 저장해 놓은 것인데도 불구하고 전혀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 사람이 누구이기에 내 전화번호부에 있는지.
분명히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SNS에서 내가 그 사람을 친구로 등록한 이유가.
스마트폰 전화번호부에 그 사람의 연락처를 저장했던 이유가.
그런데 기억을 못 한다는 건, 노화로 인한 단순한 기억력 감퇴의 문제만은 아닐 것이다.
어떤 사람을 아는 것과, 모르는 것 사이의 경계가 희미해지고 있는 건 아닌지,
알아야 할 사람과 몰라도 되는 사람의 경계가 희미해지는 것은 아닌지 생각했다.
별로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은 쉽게 잊어버리듯,
사람도 그렇게 잃어버리고 있는 건 아닌지 생각했다.
내 곁에 친구라 부를 수 있는 사람들이 매우 많지만,
우리라 부를 수 있는 사람은 몇이나 되지?
( 제목에 '곁' 은 엄기호 선생님의 글귀를 인용한 것입니다.) ‘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