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 돼지, 벌레

장필순 - TV, 돼지, 벌레

by B Side



1.


TV, 돼지, 벌레


도로 위엔 오늘도 미친 자동차 아이들은 어디에 텅 빈 놀이터
나는 TV 앞에서 하루를 보냈죠

채우고 채워도 부족한 세상 우리의 욕심은 하늘을 찌르네
나는 하루 종일 먹고 또 먹었죠 돼지처럼

들여다봐요 두려워말고 헛된 꿈으로 가득 채워진 세상
이 슬픔의 강은 언제쯤 그 푸른 바다를 만날 수 있을까

화내지 말아요 피곤해져요 따지지 마세요 거기 서 거기
그럴 땐 하루 종일 잠을 자 봐요 벌레처럼

들여다봐요 두려워말고 헛된 꿈으로 가득 채워진 세상
이 슬픔의 강은 언제쯤 그 푸른 바다를 만날 수 있을까

날카로운 칼날 같은 이 시간 위를 그대와 나도 걷고 있네요
아무런 느낌조차 없는 날들을


-작사,작곡 조동익



2.

아이가 아파서 어린이집에 못 가는 날, 주위에 아이를 봐줄 친척도 없는 날이면 일을 해야 하는 엄마와 아빠는 몸도 마음도 바쁘다. 아이는 오전에 삼촌과 지냈다. 그날 나는 회사에서 잠깐 외출을 해 삼촌 집에서 아이를 찾아서 두어 시간 정도 같이 시간을 보내고 다시 엄마에게 맡긴 후 회사에 돌아가야 했다. 계획대로라면 1시 정도에 아이를 만나 시간을 보내다 3시 좀 넘은 시간에 엄마에게 다시 아이를 맡기고 4시까지 회사에 돌아올 계획이었다.


하지만, 계획이란 것은 늘 틀어지기 마련이다. 1시경에 아이를 찾아 엄마가 일하는 회사 근처에서 시간을 보냈다. 평일 낮에 시내 한 복판에서 아이와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다. 맥도널드에서 아이스크림을 최대한 천천히 먹으며 시간을 보내다, 지루해 하자 지하철역 계단을 오르내리며 시간을 보냈다. 시간이란 참 묘하다. 기다리는 시간은 더디 오고 멈추었으면 하는 순간은 쏜살같다. 엄마 직장에서 급한 일이 생겨 제시간에 못 온다는 연락을 받고 40분을 더 시내 한복판에서 기다려야 했다. 나는 4시까지 회사로 복귀하기로 되어 있고 시간은 3시 40여분. 바로 택시를 타고 급히 가면 10여분 정도 늦게 되고 10여분 정도는 미안한 얼굴로 굽신굽신 하면 넘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 계획도 틀어졌다. 급히 택시를 잡아탔지만 이번엔 공사로 길이 막혔다. 이미 4시는 넘었다. 택시 내비게이션에 표시된 회사 앞 도착 예정시간은 4시 50분대를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막힌 택시 안에서 생각했다. 왜 이렇게 살아야 하나. 왜 이렇게 바쁘게 살아야 하나. 아이를 이리 맡기고 저리 맡기면서, 이 사람에게 미안하고 저 사람에게 양해를 구해 가면서, 퍼즐 맞추듯 시간을 맞추면서.



3.

영화 ‘비트’가 유행하던 때가 있었다. 청소년 관람불가 영화였지만, 나를 포함한 거의 대부분의 청소년들은 그 영화를 봤을 거다. 그 영화의 첫 대사는 정우성의 내레이션으로 시작한다.

“나에겐 꿈이 없었다”

당시 극우, 극렬 기독교주의자였던 나는 그 영회를 보면서 안도했던 기억이 있다. 꿈이 없이 쌈질이나 해대며 돌아다니던 주인공의 인생과 나는 얼마나 다른가! 하나님 안에서 나는 꿈이 있었음에 진심으로 감사했다. 그리고 꿈이 없어 보이는(당시 내 기준에서) 내 또래 친구들을 보며 느낀 우월감은 보너스였다.


그래서 나는 그 당시의 그 꿈을 이루었을까? 당연히 이루지 못했다.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한 것이 아니라, 그 꿈을 이루게 해달라고 하나님이란 존재에 매달렸었다는 사실을 깨닫기까지, 나는 미련할 정도로 오랜 시간이 걸렸다. 노력한다고 꿈을 이룰 수 있는 건 아니지만, 나는 그때 그조차도 하지 않았다. 나는 그때 바쁘게 살았다. 꿈을 이루기 위해 개신교 신앙적으로 철저하게 하나님에게 밉보이지 않으려 하다 보니 바빴다. 하나님께 철저하면 그 보답으로 꿈을 이룰 수 있게 해줄 것이기에 신앙적으로, 또 교회일로 바빴다. 그 바쁨은 선한 것 이었고, 정의였다. 그리고 그 바쁨이 나를 증명하고, 나를 살아있게 하기도 했다. 나는 다른 삶들이 가기지 못한 더 높고 더 큰 것을 가졌다는 우월감으로 바쁘고 바빴다. 그리고 그 우월감은 아주 바르고 간편하게 혐오로 발전했다. 우월감은 혐오의 다른 이름이다.



4.

바쁘게 사는 건 탈이 난다. 지치기 때문이다. 스무 살 중 후반에 나는 모든 게 지겨워졌고 지쳐있었다. 그래서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내가 가지고 있던 적금을 깨서 여행을 갔다. 한가하게 삶을 살아도 되겠다고 느낀 건 그 여행에서였다. 그것도 한가롭게 여행하던 사람들을 통해서가 아니라, 바쁘게 코스를 짜 유럽을 돌던 한국인 관광객들을 통해서. 그들은 컨베이어 벨트 돌듯 여행을 다녔다. 한편으로는 이해가 된다. 가진 재산으로 최대한 많이 보고 싶은 마음을. 하지만, 내 눈에는 그들이 참 바빠 보였다. 그만큼 내가 그 당시 바쁨에 지쳐있던 건지도 모른다.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고, 여행의 환각도 사라지고, 일상을 살다 보니 다시 바빠졌다. 그래도 바뀐 게 있다면, 바쁘기 위해 굳이 노력하지는 않는다는 것. 그리고 바쁜걸 별로 좋아하지 않게 됐다는 것.



5.

나는 휴일에 하루 종일 TV를 보거나 하루 종일 잠만 자는걸 해본 적이 없다. 그리고 애석하게도 지금은 그러고 싶어도 그러질 못한다. 아이가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기 때문이다.

옛 습관이 쉽게 바뀌지 않아서 아직도 휴일에 아무 일 없이 아이와 놀아주다 보면 내가 시간을 너무 쓸데없이 쓰는 것 아닌가라는 생각이 슬금슬금 치밀어 오를 때가 있다. 적당히 놀아 주면서 책이라도 봐야 하는 것 아닐까? 내가 좀 더 나아가야 하는데, 아이 핑계 대고 그냥 눌러앉아 있는 건 아닐까 하는.


몹쓸 병이다. 한 존재와, 하나의 우주와 시간을 기꺼이 낭비하는 것을 아까워해선 안 되는데 말이다. 같이 시간을 보내는 것만으로도 충분한데, 왜 더 의미 있고, 더 알찬 효율을 찾는 것일까?

바쁘고 알찬 삶이 좋은 삶인지, 느리고 비효율적인 삶이 좋은 삶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누군가와 함께 시간을 죽이는 일을 아까워하는 것은 몹쓸 일 이긴 하다.

종일 TV 보고, 돼지처럼 먹고, 벌레처럼 잠자는, 느리고 비효율적인 하루를 보내는 일은 요즘 같은 시대에 혁명이지 않을까를 생각한다. 매우 쉬워 보이는데 참 어려운 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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