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저는 TV를 디자인하고 있는 제품 디자이너입니다. 네, TV를 디자인한다고 하면 다들 먼저 이런 생각을 떠올리시겠죠.
"TV가 무슨 디자인할 게 있지?"
켜지면 화면이 전부인, 꺼지면 그저 검은색 사각형에 불과한 TV지만, 어떻게든 저희는 회사의 마음에 들기 위해, 밥그릇을 지키기 위해, 디자이너로서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매일 분투하고 있습니다.
제가 TV를 바라보는 시점은 회사에 들어오기 이전과 이후로 명확히 나뉩니다. 이곳에 들어와 보니, 이전의 저는 한 번도 TV를 정면 이외의 각도에서 바라본 적이 없더군요. 소비자에서 디자이너로의 전환은 저로 하여금 후면, 측면 등 다양한 각도에서 TV를 바라보게끔 만들어 주었습니다. 하지만 한 층 넓어진 시야를 뒤로한 채, 저는 항상 스마트폰 디자이너가 부러웠습니다. 물론 예전만큼 제품 디자인이 주목받는 시대는 아니지만, 그래도 스마트폰만큼 사람들이 디자인에 관심 갖는 전자제품이 없기도 하기 때문이죠. 버튼의 모양, 카메라의 배열 등을 어떻게 했는지에 따라 온갖 IT 유튜브 채널에서 화제가 되어버리곤 합니다.
그렇다면 TV는 어떨까요? 앞서 언급한 스마트폰과 달리, 애석하게도 소비자가 TV를 바라보는 시선과 디자이너가 TV를 바라보는 시선에는 상당한 차이가 존재합니다. 밤을 새워서 다듬은 TV의 유려한 후면과 측면 디자인은, 대부분 사내 보고와 성과를 위해 사용될 뿐입니다. 그렇다고 사용자의 눈에 띄기 위해 과하게 디자인을 강조하면 시청 경험을 방해하는 요소가 되기 마련이죠. 또한 큰 화면의 TV는 필연적으로 벽에 밀착한 채 사용자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게 됩니다. 조작이야 어차피 리모컨으로 하면 되는데, 사용자 중에서 TV의 디자인을 만져보고 그 자체를 감상하는 비율은 얼마나 될까요? 즉 우리는 스포트라이트를 등진 곳에서 어제와 다른 내일(신상품)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셈입니다.
화질에 대한 설명으로 가득 찬 홈페이지, 일사불란하게 벽에 붙어 강렬한 색감의 영상을 틀고 있는 매장에서 제품 디자인이 목소리를 내기란 쉽지 않은 것이 현실입니다. 그렇게 허공을 향한 디자인을 거듭하던 어느 순간, 비관주의와 매너리즘에 빠져 스스로를 잃어버린 저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거듭되는 "나는 누구일까?" 하는 의문에 답을 하기 위해, 하루 종일 바라보고 있는 TV의 뒷면에서 무언가 의미 있는 것을 찾아내야만 했습니다.
B-side라는 말이 있습니다. 레코드판의 뒷면을 가리키는 단어로, 정규 앨범에 없는 미발표곡 혹은 리믹스 곡이 담긴 영역을 뜻합니다. 과거 LP 바이닐 시절에는 음반사에서 미는 히트곡 후보작이 A면에 수록되고, 뒷면인 B면에는 A면에 담기지 못한 일종의 '자투리' 곡들이 수록되곤 했었습니다. 그 당시 B면은 주목받는 영역이 아니었지만, 요즘은 뮤지션 개개인의 개성이 뚜렷하게 묻어난 음악을 B-side 음악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가수 선미의 경우 활동하면서 남긴 B-side 곡들을 모아 별도의 앨범을 구성하기도 했었죠. 좋아하는 가수의 B-side를 감상하는 순간은 때때로 '그 사람' 자체를 더욱 입체적으로 받아들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문득 걸어온 길을 돌아보니, 저는 A-side에서 달려가기 바빴던 것 같습니다. 주류의 세상에서 선택받기 위해, 남들에게 어떻게 보일지를 항상 신경 쓰며 겉면을 가꾸기 급급했던 것 같습니다. TV의 뒷면을 오랫동안 마주하고 나서야, 저의 B-side를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LP판의 뒷면에서 때때로 발견하는 명곡처럼, 자신만의 시선으로 발견해 내는 다양한 B-side로부터 잃어버린 목소리를 되찾을 수 있음을 뒤늦게 깨달았습니다.
어쩌면 제가 그동안 회사에서 배운 것은 제품 디자인 그 자체라기보다, '대상을 바라보는 각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갈수록 얇아지고 간결해지는 TV에서 새로운 디자인 요소를 발굴하기 위해 어떻게든 시각을 바꿔보며 기회의 영역을 찾아야 했기 때문이죠. 이에 저는 스포트라이트를 등진 채 보내온 시간이 헛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기로 했습니다. TV의 보이지 않는 면을 발견해 내는 힘이, 우리 주변의 일상을 대하는 단편적인 시각을 한층 입체적으로 만드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A-side를 이리저리 들춰 봄으로써 발견한 새로운 면을 적어봄으로써, 평면적으로 존재하는 대상 및 현상에 질문을 던져 보고자 합니다. 차곡차곡 쌓아진 글들이, 저 자신의 B-side를 구성하고, 나아가 정면으로 바라보기만 했던 우리의 일상을 대하는 새로운 각도를 만들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사실 제가 겪었던 고충은 비단 디자이너만의 것이 아닐 것입니다. 규모가 큰 조직일수록 개인의 존재 의미에 의문을 갖는 사람들이 생겨나겠죠. 커다란 간판 뒤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조금씩 잃어가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명함이 없어도 우리의 이름은 온전히 빛을 발할 수 있을까요? 반복되는 일상에서 갈수록 얇아지고 평면적으로 되는 것은 TV뿐만이 아닐지도 모르겠습니다.
'B-side : TV의 뒷면에 내 이름을 적었다.' 시리즈에서는 우리의 일상 속 다양한 A-side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저만의 시각과 생각이 담긴 글들을 적어보려고 합니다. 그리고 이 글을 읽는 여러분들이 자신만의 새로운 B-side를 도출해 내는 시발점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곁에 있었던, 하지만 발견할 수 없었던 일상의 B-side를 제안합니다. 익명의 삶을 걸어온 우리가, 이곳에서 각자의 이름을 찾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