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번외] 미국 의료시스템과의 첫만남

결핵검사 하나에 일주일이나 걸리다니

by 유지니안

5월의 어느 화창한 날, 나는 엘리의 손을 잡고 Covell에 있는 UC Davis Medical Group Davis로 향했다. DPNS Mini Summer Camp에 참가하기 위해, 그리고 나아가 DPNS 정규반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다양한 증빙서류들이 필요했다. 다른 서류들은 대부분 예방접종 여부를 물어보는 내용이었기 때문에, 한국에서 떼온 예방접종증명서를 곧바로 제출하면 되었다. 그러나 제출 서류 중에 단 하나 부족했던 "결핵검사(TB test) 음성 확인서", 이 서류만큼은 미국 의료기관에서 반드시 발급받아야 했다.


'결핵검사? 요즘 세상에 누가 결핵에 걸리지? 예방접종 증명서도 있는데 왜 또 검사를 해야 하는 거야?'

우리를 맞이한 것은 인도계 소아과 의사 Dr. Maria Martins였다. 정말 똑똑해보였지만, 한편으로는 굉장히 엄격해보였다.

Dr. Martins에게 한국에서 가져온 두툼한 예방접종 수첩과 정부24에서 발급받은 예방접종증명서 영문본을 제출했지만, 역시나 Dr. Martins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캘리포니아 주법상 모든 아이들은 TB 테스트를 받아야 해요. 보통은 피부반응검사로 결핵 유무를 확인하지만... BCG 접종을 했다면 피부반응으로는 확인이 안되요. 반드시 혈액검사(blood test)를 해야 합니다."

한숨이 나왔다. 우리나라에서는 필수 접종인 BCG가 이렇게 발목을 잡다니. 미국 아이들은 BCG 접종을 하지 않나보다.

"그냥 X-ray로 바로 확인하면 안 되나요? 아이가 주사를 너무 무서워해서..."

"안 됩니다. 먼저 혈액검사를 하고, 양성이 나오면 그때 X-ray를 찍을 수 있어요. 이건 정해진 절차예요."

인터넷에서 찾아보니, 바로 X-ray를 하기도 하던데, 일본 친구가 말했던 대로 Dr. Martins는 정해진 법과 절차를 반드시 지키는 사람이었다. 혈액검사 동안 울부짖을 엘리를 생각하면 정말로 우울했지만, 여기는 미국이고, 미국의 법을 따라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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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혈실로 들어가자 덩치 큰 흑인 남자 간호사가 우리를 맞았다. 투박한 손으로 엘리의 가느다란 팔을 잡고 혈관을 찾기 시작했다. 한 번, 두 번, 세 번... 바늘이 들어갈 때마다 엘리의 비명소리가 커졌다.

"혈관이 너무 작네요. 잘 안 보여요."

정말 최악이었다. 아무리 숙련도가 떨어진다고 해도, 이건 너무 기본이 안 되어 있었다. 15분이 넘는 시간 동안 엘리는 계속 울부짖었다.

"엄마 빨리! 엄마 빨리! 빨리!"

그는 5번이 넘는 주사바늘 구멍을 내고서야 겨우 피를 뽑아 시험관에 옮겨 담았다. 내 심장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겨우 진정시켜 집으로 돌아왔는데, 다음 날 아침 클리닉에서 전화가 왔다.

"죄송합니다만, 어제 채혈한 양이 부족해서요. 다시 오셔야 할 것 같습니다."

순간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어 올랐다.

"What? Are you kidding me? 우리 아이가 어제 얼마나 고생했는지 아세요? 무려 15분이나 걸렸다구요. 이건 아이에게 학대 아닌가요?"

내 서툰 영어로 항의했지만, 돌아온 대답은 한결같았다.

"정말 죄송합니다. 이번에는 경험 많은 간호사가 담당하도록 하겠습니다."

미국의 의료시스템이 별로라는 이야기는 익히 들었지만, 정말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한국 같았으면 이미 의료사고라고 난리가 났을 텐데 말이다. 하지만 우리에게 대안은 없었다. 엘리가 미국 친구들과 사귀고, 나아가 미국 어린이집 시스템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TB test 결과가 반드시 필요했다.


KakaoTalk_20250712_134733440.jpg 재차 피 뽑으러 결핵검사 2차 방문


불신과 불안을 가득 안고 다시 찾은 클리닉. 불안해하는 엘리를 달래기 위해 남편까지 총출동했다.

"우리 아이가 트라우마가 생겼어요. 제발 최고의 간호사를 배정해 주세요."

이번에는 정말 괜찮은 사람을 만나게 해달라고 재차 부탁했다. 그 결과 만난 사람이 티나(Tina)라는 간호사였다. 그녀는 정말 프로페셔널했다. 엘리에게 스티커를 보여주며 주의를 돌린 후,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채혈을 끝냈다. 우리가 왜 그렇게 불안에 떨었는지 이해가 안 될 정도로 능숙했다.

'아, 처음부터 이 사람이 했으면...'

하지만 안도한 것도 잠시, 며칠 후 나온 결과는 양성(positive). 진짜 한숨이 절로 나왔다.

'제발 한번에 좀 끝내주면 안되나.. 병원하고 전화하는 것도 정말 버겁다고!' 마치 영어듣기평가를 하는 것 같았다.


KakaoTalk_20250712_134555267.jpg X-ray 찍으러 결핵검사 3차 방문. 엘리는 또 피 뽑는 줄 알고 얼어있다.


"BCG 접종 때문에 양성으로 나올 수 있어요."

또다시 클리닉 행. Dr. Martins는 이런 경우가 많았는지 자연스럽게 설명을 이어갔다.

"한국 아이들은 대부분 BCG를 맞았죠? 그게 문제예요. BCG는 결핵 예방 백신인데, 이걸 맞으면 실제로 결핵에 걸리지 않았는데도 검사에서 양성이 나와요. 그래서 이제 X-ray를 찍어서 활동성 결핵이 아님을 확인해야 합니다."

BCG가 또 다시 발목을 잡은 것이다. BCG 미접종자는 단순히 피부 검사만으로 끝나는데, 우리 엘리는 혈액검사 2번에 X-ray까지 찍어야 했다. BCG 때문에.

다행히 엑스레이는 순조롭게 끝났고, 결과도 정상이었다. 드디어, TB 음성 확인서를 받을 수 있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엘리는 내 손을 꼭 잡고 있었다. 오늘은 주사를 맞지 않아서 그런지 기분이 좋아보였다.

"엘리야, 이제 다 끝났어. 이제 학교 갈 수 있어!"

"이제 주사 없어? 병원 안가?"

"알아. 미안해. 우리 엘리 정말 잘했어."

결핵검사 하나 때문에 병원에 거의 일주일 동안 출근하다시피 했다. 한국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 단 하나의 검사 때문에 이렇게 고생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하지만 이것도 미국 생활의 일부라고 받아들이기로 했다.


창밖으로 데이비스의 별이 빛나고 있었다. 우리의 미국 생활도 이제 본격적인 2막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엘리가 어린이집에 들어가기만 해도 우리의 삶이 크게 바뀔 것 같았다. 나는 2시간이나마 자유를 찾고, 엘리는 다양한 친구들을 사귈 수 있을 것이었다. 엘리 친구들과의 playdate를 통해 나도 미국 현지 친구들을 사귈 수 있겠지.

비록 시작부터 순탄치 않았지만, 이 정도 시련은 이겨낼 수 있다.

We will find a way, we always have. 우리는 언제나 그래왔듯이 길을 찾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