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독립, 엘리의 첫걸음
목요일 새벽, 평소보다 30분 일찍 알람이 울렸다. 오늘은 나의 첫 Duty Day. 단순히 엘리를 데려다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보조 교사'로 참여하는 날이었다. 영어도 서툴고, 미국 교육 시스템도 잘 모르는 내가 과연 잘할 수 있을까? 하지만 한편으로는 기대도 됐다. 3일 동안 울기만 했던 엘리가 학교에서 어떻게 지내는지 직접 볼 수 있는 기회였으니까.
"엘리야, 오늘은 엄마도 학교에 같이 있을 거야."
"진짜? 엄마도 같이 있어? 진짜지?"
엘리의 표정이 환하게 변했다. 엄마 없는 사흘이 엘리에게는 꽤나 큰 충격이었나 보다.
8시 20분 즈음 DPNS에 도착하니, 조금 일찍 도착해서였는지 다른 부모들은 보이지 않고, Teacher Becky와 Teacher Christina가 미리 와서 수업을 준비하고 있었다.
"Becky!"
엘리가 평소와 달리 보무도 당당하게 Becky에게 가서 인사한다. Becky가 노란 명찰을 건네며 오늘의 역할을 설명해 줬다.
"오늘의 역할은 'Project Mom'이에요. 명찰에 쓰여진 역할(role)을 해주시면 돼요. 가장 중요한 건 등하교 도우미 역할이고요."
Project는 쉽게 말하면 "서포터" 같은 역할이었다. Yard(놀이터)나 Patio(마당), Art(실내 미술테이블), Block(블록놀이하는 큰 방), Quiet room(책 있는 작은 방)과 같이 정해진 지역에서 정해진 역할을 하는 게 아니라, 그때그때 필요할 때마다 지원해 주는 역할. 그나마 정해진 역할이 바로 등하교 도우미였다.
"엄마 나는 빨간색이야~"
Becky와 함께 오늘 역할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데, 엘리가 이야기한다.
같이 간식 먹는 팀을 정하기 위해 아이들에게 주어진 색깔들이 있었다. 빨강, 파랑, 노랑, 초록, 보라, 주황 6가지 색깔 중에서 엘리는 빨간색 팀이었던 것이다.
"어쩌지 엄마는 노란색인데. 엘리랑 같이 간식을 못 먹으려나."
Duty mom/dad는 총 6명이 참여하는데, 각자가 맡은 역할에 따라 색깔로 구분한다. 그리고 그 색깔의 팀에 가서 snack time을 함께 보내야 하는 것이다. 주로 책을 읽어주면서 아이들이 간식을 잘 먹을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아, Susie, 그건 걱정하지 마요. 엄마나 아빠가 Duty Day인 경우 자녀를 데리고 같이 먹어도 되니까요."
Becky가 덧붙였다.
"부모가 와서 일하는데 자식하고 같이 못 먹게 하는 것도 이상하잖아요."
9시, DPNS 정문을 여는 것부터 project mom인 나의 역할이다. 다들 일찍 온 모양인지 문 밖에서 서로 인사하는 소리가 들린다. 엘리와 함께 서서 등교하는 아이들과 부모들을 반겨주었다.
'첫인상이 중요하니까 웃는 얼굴로, 약간 과장 섞인 느낌으로, valley girl accent를 떠올리면서, '
"안녕~ 나는 엘리 엄마야!"
"여기에 아이 이름하고 도착 시간 써주시고요, 옆에 사인해주세요."
"안녕? 너는... Ramsey구나. lunch box는 노란색 바구니에 넣으면 된단다."
등원하는 아이들을 맞으며 하나하나 바구니에 정리해주다 보니, 아이들의 이름과 얼굴을 자연스럽게 익힐 수 있었다. 금발의 Ramsey, 보라색 안경을 쓴 Adena, 그리고 Wolf... 이름이 참 특이하다 싶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할머니가 백인이고 손자는 흑인이었다.
정신없이 몰려드는 아이들과 부모들을 상대하고 나니, 아직 시작인데도 벌써부터 지친 느낌이었다.
폭풍 같은 시간이 지나고 9시 15분, 본격적인 일과가 시작되었다. duty parents 모두 각자 맡은 위치에서, 저마다의 역할을 수행해 나갔다. 나는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아이들의 안전을 살피는 역할. 나에게서 떨어지지 않는 엘리를 데리고 돌아다니면서 아이들이 신발을 벗고 자전거를 타지는 않는지, 나뭇가지를 들고 휘두르지는 않는지, 서로 싸우고 있지는 않는지 지켜보았다.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보니, 어떤 아이는 블록 쌓기에 열중하고, 어떤 아이는 소꿉놀이를 하고, 또 어떤 아이는 책을 읽고 있었다. 각자의 관심사가 이렇게 다를 수 있구나 싶었다.
그러다 어느새 엘리가 내 곁에 없다는 걸 깨달았다.
'엘리 어디 갔지?'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니, 어느새 Art table에 가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깜짝 놀랐다. 월요일부터 수요일까지 3일 동안 Teacher Becky 무릎에서 떨어지지 않았다던 아이가, 나 없이도 혼자 미술 테이블로 걸어갔다니. 물론 내가 같은 공간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안정감을 느꼈겠지만, 그래도 나에게 매달리지 않고 스스로 하고 싶은 활동을 찾아간 것이 너무나 신기했다.
조심스럽게 다가가 지켜보니, 엘리는 물감으로 그림을 그리다가 손에 묻은 물감을 보고 깔깔거렸다. 그리고는 크레용으로 종이를 가득 채우다가 또 다른 색을 찾아 열심히 그려나갔다. 한국에서는 주로 TV 앞에 앉아있던 아이가 이렇게 활발하게 놀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Circle time!"
어느새 첫 번째 Circle time. teacher Christina의 종소리에 아이들이 하나둘 교실 안으로 모여들었다. 나는 아이들이 한 줄로 서서 질서 정연하게 들어갈 수 있도록 도왔다. 실내에 둘러앉아 선생님의 말에 귀 기울이는 아이들. 몇몇 큰 아이들은 선생님의 질문에 손을 들고 대답하는 모습도 보였다. 나는 내 무릎에 앉아서 몸을 기대고 있는 엘리를 보며 생각했다.
'우리 엘리도 저렇게 자랐으면 좋겠다... 언제쯤 저렇게 대답도 잘하고 적극적으로 나서게 될까?'
"Now, let's wash hands for snack time!"
서클타임이 끝나자 간식 시간이었다. 아이들은 줄을 서서 차례대로 손을 씻고, 각자의 색깔 바구니를 가져와 자리에 앉았다. 나와 같은 노란색 팀은 장난꾸러기 라티노 Ramsey와 보라색 안경을 쓴 내성적인 Adena. 나머지 노란색 친구들은 오늘 학교에 오지 않았나 보다. 나는 엘리를 노란색 테이블로 데려와 함께 간식을 챙겼다.
Ramsey는 간식을 반쯤 먹더니 벌떡 일어나서 놀러 가려고 했다.
"Ramsey, 간식을 다 먹고 나가야 해요."
Teacher Becky가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말했다. Ramsey는 잠시 투덜거렸지만 결국 자리로 돌아와서 간식을 마저 먹었다.
반면 보라색 안경을 쓴 Adena는 정말 천천히, 오랫동안 먹었다. 다른 아이들이 다 먹고 나가도 혼자 앉아서 조금씩 조금씩 먹는 모습이 귀여웠다.
가장 놀라운 건 엘리였다. 한국에서는 밥 먹이기가 그렇게 힘들었는데, 여기서는 경쟁심이 붙었는지 열심히 먹기 시작했다. 다른 아이들이 다 먹는 모습을 보니 자극이 된 모양이었다. 결국 간식을 다 먹어치우고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일어났다.
간식을 마친 아이들은 다시 자유놀이 시간을 가졌다. 엘리가 이번에는 바깥 놀이터로 나가더니, 페이지와 함께 뛰어놀았다. 생각보다 페이지와 서먹서먹하길래 서로 싸웠나 했는데, 또 그건 아니었나 보다.
만 3-4세 아이들의 우정은 마치 캘리포니아 날씨처럼 변덕스럽다. 아침에는 "You're my best friend!"라며 껴안다가도, 점심때쯤 되면 "I don't want to play with you!"를 외치곤 한다. 미국의 많은 프리스쿨에서는 이런 행동을 문제로 보지 않는다. 오히려 정상적인 발달 과정의 일부로 받아들인다.
실제로 UC Davis의 한 연구에 따르면, 이 시기 아이들은:
- 병행놀이(Parallel Play)에서 협동놀이(Cooperative Play)로 전환하는 중 : 같은 공간에서 각자 놀다가 잠깐씩 상호작용하는 것이 일반적
- 감정 조절 능력이 아직 미숙 : "Mine!"을 외치며 장난감을 뺏었다가도 5분 후엔 나눠주는 게 일상
- 자기중심적 사고가 당연한 시기 : 친구가 왜 속상한지 이해하기보다는 자신의 감정에 더 집중
- 언어 능력의 차이가 관계에 영향 : 특히 ESL(English as Second Language) 아이들은 의사소통의 어려움으로 더 자주 갈등을 겪을 수 있음
DPNS 선생님들은 이런 순간마다 "It's okay"라고 말해준다. 억지로 화해시키기보다는 각자의 공간을 존중하는 것이 미국식 접근법. 한국에서라면 "친구랑 사이좋게 놀아야지"라고 말했을 텐데, 여기서는 개인의 선택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
재미있는 건, 이렇게 "안 논다"라고 선언한 아이들이 보통 30분도 안 돼서 다시 함께 논다는 것. 마치 우리 어른들의 SNS 친구 차단처럼, 그 순간의 감정일 뿐이다.
DPNS 정규수업의 마지막 시간, 두 번째 circle time은 Teacher Becky가 책을 읽어주는 시간이다. 밖에서 정신없이 뛰어놀던 아이들이 얌전히 실내로 들어와 선생님의 말에 귀 기울이는 모습을 보니 DPNS에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신없이 엘리를 챙기고, 다른 아이들을 돌보고 나니, 내 첫 duty가 무사히 끝났다는 생각에 한껏 긴장했던 몸이 추욱 풀렸다. 그러다 깜빡 잊고 있던 마지막 역할. 연장 수업(Extended time)을 신청한 아이들이 점심을 먹는 것, 즉 Lunch bunch를 도와줘야 했던 것이다.
아이들 의자에서 잠깐 멍 때리고 있을 때, 함께 Duty에 참여한 Wolf의 할머니가 나를 일깨워주었다.
"엘리 엄마, Lunch Bunch 도와주러 가야 하지 않아요?"
"아, 맞다! 깜빡했어요. 감사해요!"
급하게 Lunch Bunch 교실로 가서 늦었다고 사과하며 도움을 드렸다. 점심을 가져온 아이들이 각자 자리에 앉아 먹는 동안, 나는 우유를 따라주고 냅킨을 나눠주며 아이들을 돌봤다.
Lunch Bunch가 끝나자 이번에는 Parenting Meeting이 기다리고 있었다. 월 1회 열리는 부모 교육 시간으로, 오늘은 '아이의 감정 표현 도와주기'가 주제였다.
"3세 아이들은 아직 자신의 감정을 언어로 표현하기 어려워해요. 때로는 떼를 쓰거나 울음으로 표현하죠. 이때 부모가 어떻게 반응하느냐가 중요해요."
강사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엘리도 종종 말로 표현하지 못하고 울거나 짜증을 낼 때가 있었다. 앞으로 어떻게 도와줘야 할지 많은 걸 배웠다.
오후 1시가 되어서야 모든 일정이 끝났다. 정리를 마치고 나가려는데 Teacher Becky가 다가왔다.
"오늘 첫 Duty 어떠셨어요?"
"정신없었지만 정말 많이 배웠어요. 엘리가 저 없이도 Art table에 가는 걸 보고 깜짝 놀랐어요."
Becky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DPNS 신입생들과 그 부모들에게는 적응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잘 알고 있어요. 그래서 첫 달에는 project 역할을 드려요. 아마 돌아다니면서 많은 걸 보고 배울 수 있었을 거예요."
"정말 그랬어요. 각 구역에서 아이들이 어떻게 노는지 다 볼 수 있었어요."
"무엇보다 어느 한 장소에만 머무르는 업무를 맡았다면 엘리가 엄마와 떨어지기 힘들었을 거예요. 그런 면에서 project 업무는 아이와 엄마 모두에게 딱 좋은 일이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엘리가 말했다.
"엄마, 학교 재밌어! 내일도 가고 싶어!"
그 한마디에 모든 피로가 날아갔다.
DPNS는 단순히 아이를 맡기는 곳이 아니었다. 부모도 함께 성장하는 곳이었다. 내가 보조 교사가 되어 다른 아이들을 돌보면서, 엘리뿐만 아니라 다양한 아이들의 성향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미국의 교육 철학을 몸소 체험할 수 있었다.
앞으로도 일주일에 한 번씩 이런 봉사를 해야 한다. 처음에는 부담스럽게 느껴졌지만, 오늘 경험해 보니 오히려 기대가 되었다. 엘리가 친구들과 어떻게 지내는지 직접 볼 수 있고, 나 역시 '진짜 미국 엄마'가 되어가는 느낌이었다.
집에 도착해서 남편에게 하루 있었던 일을 신나게 이야기했다. 엘리도 옆에서 거들며 자기가 얼마나 간식을 잘 먹었는지, 친구들과 어떻게 놀았는지 설명했다.
"정말 잘 선택한 것 같아. 엘리도 행복해 보이고, 당신도 즐거워 보여."
남편의 말에 나도 웃었다. 맞다. 이곳에서 우리 가족은 조금씩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