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꿈을 비추는 조연이었지만, 스스로의 서사를 끝내 놓지 않았다.
11월 넷째 주 목요일, 추수감사절 아침이 밝았다. 미국에 오기 전, 추수감사절은 그저 영화 속에서나 보던 칠면조 파티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곳 분위기는 완전히 달랐다. 우리나라 추석처럼 멀리 사는 가족들이 모이고, 목금토일 연휴를 이용해 많은 사람들이 여행을 떠나는, 그야말로 민족 대이동의 날이었다.
"우리도 어디 갈까?"
남편이 묻더니 곧 항공료를 찾아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 가격 봐, 평상시보다 훨씬 비싼데."
나도 숙박비를 검색해보다가 절로 고개를 저었다. 텅 빈 통장을 바라보며 우리는 현명한 포기를 선택했다. 내년에는 꼭 여행을 갈 수 있기를 희망하면서, 올해는 데이비스에서 조용히 보내기로 했다.
날씨가 좋아서 소풍 기분으로 간단한 도시락을 쌌다. 물론 '도시락'이라고 해봤자, 딸기잼 샌드위치에 과일 몇 조각이 전부였지만.
목적지는 남편의 학교, UC 데이비스 캠퍼스. 저녁에는 그 로스쿨에서 유학생들을 위한 만찬도 열린다고 해서 겸사겸사 다녀오기로 했다.
"아빠가 매일 자전거 타고 다니는 곳 가볼까?"
남편이 공부하는 king hall에서 출발한 우리는 캠퍼스를 가로지르는 푸타 천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평소라면 학생들과 데이비스 시민들이 산책을 즐겼을 텐데, 추수감사절이라 그런지 고요한 숲 속을 걷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조용한 푸타 천변 숲길을 따라 걷다보니 수목원(Arboretum)이 나왔다. 캘리포니아의 뜨거운 햇살을 닮은 지중해 식물 군락을 지나다가도, 어느새 동아시아의 아담한 정원을 만나기도 했다. 주말마다 어디 갈지 고민하던 우리에게 이렇게 멋진 공간이 바로 곁에 있었다는 게 새삼 고마웠다. 왜 진작 오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마저 들 정도로.
"엄마! 여기에 말 있어! 봐봐!"
수목원을 감상하다가 엘리에게 이끌려 도착한 곳은 작은 목장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캠퍼스 내 동물과학과에서 관리하는 실습용 농장이었다. 말 몇 마리가 여유롭게 풀을 뜯고 있는 모습에 엘리는 눈을 반짝였다.
"말아 이리와! 이거 먹어!"
엘리는 손에 들고 있던 사과 조각을 흔들며 말을 불렀다. 하지만 말들은 울타리 너머의 작은 아이가 신기한지 고개만 들어 바라볼 뿐, 가까이 오지는 않았다. 아마 처음 보는 사람을 경계하는 것 같았다. 엘리가 울타리에 바짝 붙어서 팔을 쭉 뻗으며 애타게 불러보았지만 소용없었다.
"엘리야, 함부로 말에게 우리가 먹던 걸 주면 안 돼."
나는 엘리의 손목을 살짝 잡아당겼다.
"왜?"
"사람한테 괜찮은 음식이 말한테는 위험할 수도 있거든."
엘리는 아쉬운 듯 사과를 다시 입에 넣으며 말들을 한참 바라보았다. 이제 가자는 아빠의 말에 웃으며 말에게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물론 말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저녁 시간이 되어 Walter A. Buehler Alumni Center로 향했다. 행사장은 이미 각국에서 온 학생들로 북적였다. 유럽, 아프리카, 중국, 일본... 다양한 억양의 영어가 뒤섞인 공간에서 남편이 스스럼없이 여러 나라 친구들과 인사를 나누는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저 사람, 언제 저렇게 사교적이 되었나. 한국에서는 그렇게 적극적이지 않았는데.'
무엇보다 반가운 건 한국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동안 엘리 또래 아이가 없어서 한국 유학생 가족들과 깊이 교류할 기회가 없었으니까.
"남편분이 정말 공부를 열심히 하세요. 새벽까지 도서관에 계시던데요."
"맞아요, 우리보다 먼저 와서 늦게 가시더라고요."
남편의 동료들의 연이은 칭찬에 대견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마음이 복잡해졌다.
'나도 내 일과 공부가 있는데... 나만 뒤쳐지는 걸까? 난 지금 뭐 하고 있지?'
하지만 곧 또 다른 생각이 들었다.
'그래, 지금은 이 사람이 주인공일 시간. 내가 할 수 있는 역할을 하자. 미국에서 나의 역할은 전업주부다. 남편과 딸을 위해 확실하게 내 역할을 하자!'
드디어 저녁 만찬 시간. 주인공은 역시 거대한 칠면조 구이였다. 처음 먹어보는 칠면조 맛은… 솔직히 실망스러웠다. 살이 퍽퍽하고 특유의 냄새를 잡으려 했는지 후추 맛이 너무 강했다.
"어때? 맛있어?"
남편이 물었다. 나는 애매하게 웃으며 대답을 피했다. 닭만 보면 눈이 반짝이는 남편은 꾸역꾸역 잘 먹었지만, 나와 엘리는 몇 조각 먹다가 포크를 내려놓았다.
"엄마, 맛없어."
"그래도 먹어야지. 아빠 봐봐. 잘 먹잖아."
하지만 속으로는 나도 동감이었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느끼한 속을 부여잡고 라면 물을 올렸다. 보글보글 끓는 라면에 김치 한 조각. 역시 한국인은 어쩔 수 없나 보다. 엘리도 냄새를 맡고 어느새 식탁에 앉아 라면을 기다리고 있었다.
"엘리, 라면은 매운데."
"괜찮아. 물로 씻어먹으면 돼!"
오늘만큼은 엘리가 라면을 먹는 걸 허락할 수 밖에 없었다.
다음 날은 블랙 프라이데이. 온 미국이 쇼핑에 열광하는 날이었지만, 우리에게는 그림의 떡이었다.
"우리도 뭐 좀 살까? 뭐 사고 싶은 거 있어?"
남편이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말했다.
"말로는 아주 이재용이지. 우리 처지에 뭘 살 수나 있고? 그냥 집에서 쉬기나 하자."
블랙 프라이데이. 하지만 우리에겐 그냥 평범한 금요일이었다.
...사고 싶은 것도, 살 돈도 없었다.
이게 유학 생활이구나, 남편 유학 뒷바라지 하느라 참 많은 걸 포기하고 사는구나 싶었다.
'내년에는 돈 좀 모아서 푹신한 이불도 사고, 예쁜 그릇도 꼭 사야지.'
부디 나의 이 희생이 우리 가족의 등불이 될 수 있기를 바라며 눈물젖은 베개를 끌어안고 잠에 들었다.
추수감사절(Thanksgiving)은 매년 11월 넷째 주 목요일에 열리는 미국의 대표적인 국경일이다. 1621년 플리머스 식민지의 청교도들이 아메리카 원주민들과 함께 풍성한 수확을 감사하며 나눈 식사에서 유래되었다고 전해진다.
이날 미국인들은 멀리 떨어져 살던 가족들이 모여 함께 식사를 나누며 한 해 동안 받은 은혜에 감사를 표한다. 전통 음식으로는 칠면조 구이, 크랜베리 소스, 호박파이 등이 있으며, 특히 칠면조는 추수감사절의 상징적인 음식이 되었다.
현재 추수감사절은 미국에서 가장 바쁜 여행 시즌 중 하나로, AAA에 따르면 매년 약 8천만 명의 미국인들이 이 기간에 여행을 떠난다고 한다. 목요일부터 일요일까지 4일간의 긴 연휴로 인해 공항과 고속도로는 극도로 혼잡해지며, 그야말로 '민족 대이동'이라 불릴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