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펌킨 패치에 대해 아시나요

by 유지니안

10월 초, DPNS Fall Festival도, Halloween도 아직 오지 않았던 어느 더운 날의 이야기다.




엘리가 DPNS에 들어간 지 벌써 한 달이 넘어가고 있었다. 달력은 가을을 가리켰지만 데이비스의 햇살은 여전히 여름의 끝자락을 놓지 못하고 뜨겁게 내리쬐고 있었다.

'하... 오늘 너무 덥고 힘드네.'

매주 찾아오는 DPNS 일일교사. 저번 달까지만 해도 project mom으로 깍두기 역할을 맡았던 나는, 한 달이 지나 art area를 담당하게 되었다. 미술을 좋아하는 우리 엘리와 몇몇 아이들의 적극적인 참여로 인해 책상은 형형색색 물감으로 도배되었고, 바닥은 가위로 자른 색종이 조각들로 가득했다. 이 모든 걸 치우는 것도 art mom의 역할.

KakaoTalk_20250724_135109714.jpg
KakaoTalk_20250724_135109714_01.jpg
KakaoTalk_20250710_093425350.jpg


드디어 두 번째 circle time까지 마친 후, 기진맥진한 몸을 이끌고 마지막 세션인 parent meeting으로 향했다. 그런데 Teacher Becky가 재밌는 이야기를 전했다.

"이번 주말, Woodland Pumpkin Patch에 다 같이 가요! DPNS를 통해 티켓을 구매하시면 특별히 호박 하나도 공짜로 준다고 하네요!"


펌킨 패치(Pumpkin Patch).

DPNS가 지역 농장과 연계해 진행하는 커뮤니티 행사였다. DPNS는 학부모들에게 단체 티켓을 팔아 농장을 홍보해주고, 농장은 그 수익의 일부와 풍성한 호박들로 다가올 DPNS 가을 축제(Fall Festival)를 후원하는 구조. 서로 돕고 사는, 그야말로 미국식 ‘품앗이’ 정신이 깃든 행사였다.

덕분에 우리는 이런 행사가 있는 줄도 알게 되었고, DPNS를 통해 구매한 티켓으로는 커다란 호박 하나를 덤으로 받을 수 있었으니, 이보다 더 좋을 순 없었다.

그렇게 늦여름과 초가을의 문턱에서, 우리 가족의 첫 펌킨 패치가 시작되었다.




데이비스와 이웃한 도시 우드랜드(Woodland)의 너른 농장으로 향하는 길, 엘리는 카시트에서 조잘조잘 끊임없이 이야기를 한다.

"호박은 어디서 나오게. 맞춰봐! 몰라? 신데렐라잖아!"

다행히 펌킨 패치에 도착하는데 10분이면 충분했다. 한낮에는 햇볕이 너무 뜨거워서 아침 일찍 출발했는데도 임시로 만들어둔 것 같은 주차장에는 벌써 차들이 가득하다. DPNS 친구들만 오는게 아니라 인근의 모든 아이들이 학부모를 이끌고 온 모양새였다.

'DPNS 테이블이 있다고 했는데.'

다른 엄마들보다 일찍 왔는지, DPNS 테이블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쉬운 마음을 뒤로 한채 본격적으로 펌킨 패치 나들이를 시작했다.

20221009_150504.jpg
20221009_150256.jpg
20221009_150129.jpg


가장 먼저 우리를 맞이한 것은 드럼통을 개조해 만든 알록달록한 기차. 덜컹거리는 트랙터가 끌어주는 기차는 흙먼지를 일으키며 달렸다. 정신없이 흔들리는 통 안에서 속이 울렁거릴 지경이었지만, 엘리의 웃음소리가 그 모든 걸 삼켜버렸다.

다음 코스는 아빠와 함께하는 옥수수밭 미로 탐험. 남편이 자신만만하게 엘리의 손을 잡고 옥수수밭 미로로 향했다. 나는 그늘진 벤치에 앉아 잠시만의 자유를 즐겼다. 하지만 10분, 20분이 지나도 두 사람은 나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아니, 걱정이라기보다는 '저 양반, 또 길 잃었군' 하는 확신에 가까운 예감이었다. 그때, 미로 출구에서 한눈에봐도 너덜너덜해진 두 영혼이 비틀거리며 나타났다. 가을 햇살에 벌겋게 익은 얼굴, 땀으로 젖은 머리카락. 에너지 넘치는 엘리마저 한껏 지친 모습이었다.


한쪽에서는 아이들을 위한 말타기 체험이 한창이었다. 둥글게 만들어진 트랙을 따라 조랑말들이 천천히 걷는, 펌킨 패치의 단골 코스였다. 이미 줄이 길게 늘어서 있어 잠시 망설였지만, 반짝이는 엘리의 눈빛에 우리는 기꺼이 그 줄의 일부가 되기로 했다.

드디어 우리 차례. 직원이 건네주는, 머리에 꼭 맞지도 않는 낡은 헬멧을 쓰고 작은 계단을 올라 조랑말에 오르는 순간까지도 나는 조마조마했다. 하지만 내 걱정이 무색하게, 엘리는 꼿꼿이 허리를 펴고 고삐를 잡은 채 제법 의젓한 자세를 뽐냈다. 겁을 먹고 울음을 터뜨릴 거라 생각했던 내 아이가, 낯선 말 위에서 세상을 내려다보는 그 짧은 순간, 나는 아이가 또 한 뼘 훌쩍 자랐음을 느꼈다.


구매한 티켓을 다 쓴 우리는 그늘에 앉아 잠깐 휴식을 취했다. 데이비스의 여름은 한국과 정말 다르다. 신기하게도 그늘에만 들어가면 시원한 걸 넘어 춥기까지 하니까.

주변에 푸드트럭도 있었지만, 억척스럽게 된 우리 가족은 미리 싸온 과일을 먹으면서 조잘조잘 이야기를 했다.

"옥수수밭에 갇히면 진짜 아무것도 안 보여."

남편이 이제 좀 살겠다는 얼굴로 옥수수밭 미로에서의 무용담을 늘어놓았다.

"다른 사람들도 엄청 헤매더라고. 봤던 사람 또 보고 또 보고... 진짜 질릴 정도였어. 그나마 저 멀리 크레인이 있어서, 그거 보고 겨우 빠져나왔지."

포도를 먹던 엘리가 보탠 한 마디에, 온 가족이 웃음을 터뜨렸다.

"아빠 수고했어."


티켓이 없어도 놀 수 있는 시설도 있었다. 수영장처럼 옥수수 알갱이를 가득 채워놓은 콘 풀(Corn Pool), 건초 더미로 만든 아담한 미로까지. 엘리도 다른 아이들과 뒤섞여 옥수수 수영도 하고, 술래잡기를 하며 또 한참을 놀았다. 화려하진 않아도, 아이들에게는 그 자체로 완벽한 놀이동산이었다.

maze.gif
Movie001 (1) - frame at 1m28s.jpg
20221009_145809 - frame at 0m7s.jpg


그렇게 우드랜드에서 즐거운 추억을 쌓고 돌아온 며칠 뒤, 일본인 친구 Miyo에게서 새로운 소식을 들었다.

"혹시 Apple Hill에 있는 Boa Vista에 가봤어요? 지금 가면 딱 좋을 텐데."

산기슭을 타고 올라간 곳에 위치한 Boa Vista는 우드랜드의 왁자지껄함과는 사뭇 다른, 정돈된 아름다움이 있는 곳이었다. 잘 가꿔진 사과나무 농원은 한 폭의 수채화 같았고, 노랗고 하얀 호박들을 가지런이 쌓아둔 '펌킨 패치'에는 인스타 용으로 세워 둔 입간판들도 있었다.

12321421432424.jpg
20221001_123320.jpg


이곳에도 기차가 있었지만, 진짜 기차처럼 정해진 트랙을 따라 천천히 움직이는 평화로운 기차였다. 그래서인지 부모가 같이 타지 않아도 괜찮았다. 물론 엘리는 우드랜드의 덜컹거리던 드럼통 기차가 더 재밌었다며 아쉬움을 표했지만 말이다.


이곳의 명물은 갓 구운 애플파이 위에 시나몬 아이스크림을 올려주는 디저트였다. 긴 줄을 기다려 받아든 파이를 한 입 베어 무는 순간, 예전 ‘스파이시 펌킨 수프’의 악몽을 떠오르게 하는 강한 계피 향이 코를 찔렀다. ‘아, 이것이 미국인들이 사랑하는 가을의 맛이구나.’ 남편은 아이스크림이라면 뭐든 좋다며 게눈 감추듯 먹어치웠지만, 나는 조용히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보아비스타 기차.gif
KakaoTalk_20250726_142122195.jpg


대신 갓 짜낸 사과 주스는 우리 모두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인공적인 단맛 없이 사과 본연의 상큼함이 그대로 담긴, 그야말로 진짜 가을의 맛이었다. 이 신선한 주스를 마시며 문득 생각했다. ‘한국에도 이렇게 다채로운 농장 축제가 많아지면 얼마나 좋을까.’


더불어 재미있었던 것은 다양한 사과들이였다. 한국에 비해 정말 많은 품종의 사과를 판매하고 있는데 그것을 시식 및 시음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호박, 사과는 기본이고, 올리브오일, 잼, 파이까지. 예상보다 훨씬 다양한 품목들을 경험할 수 있었다.




찾아보니 한국에도 과일 따기 체험 같은 행사들은 꽤 있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대부분 과일을 따고 판매하는 데 그칠 뿐, 우드랜드 펌킨 패치처럼 온 가족이 하루 종일 즐길 수 있는 다양한 먹거리와 액티비티가 결합된 ‘축제’는 드물다. 어쩌면 오랜 시간과 이야기가 쌓여 만들어지는 그들만의 문화일지도 모른다.

언젠가 우리나라도 자신만의 색깔을 담은 농장 축제들이 많아져, 세대를 이어가는 즐거운 추억의 장소가 되기를. 보아 비스타의 사과 주스 한 잔에, 나는 그런 기분 좋은 상상을 더했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