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스쿨 절대 안간다며..
7월의 끝자락, 남편의 첫 여름방학이 끝나갈 무렵.
책상 위에는 가을학기 수강신청 자료가 펼쳐져 있었다. Criminal Law, Constitutional Law, Evidence... 생소한 과목명들이 빼곡했다. 남편은 연필로 무언가를 적다가 지우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뭔가 고민이 많아 보였다.
저녁을 먹으면서 남편이 불쑥 말을 꺼냈다. 도서관에서 만난 한국인 LLM 학생들 대부분이 Bar exam은 생각도 안 한다는 거였다. 그냥 학위만 따고 한국으로 돌아간다고.
그 말을 듣는 순간, 작년 가을이 떠올랐다. MBA에 목을 매던 남편이 어떻게 LLM으로 오게 됐는지. 그 아찔했던 과정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작년 1월의 한국은 유난히 춥게 느껴졌다. 아마도 남편의 MBA 집착 때문이었을 거다. 회사에서 어렵게 얻은 유학 기회인데도 오직 MBA만 고집했다. Round 3의 합격률이 얼마나 낮은지 모르는 것도 아니면서.
내가 LLM이라는 대안을 제시할 때마다 남편은 고개를 저었다. 자신은 법학 전공자가 아니라는 거였다. LLM은 법학사나 로스쿨 졸업생들이나 가는 과정이라고. 논리적으로는 맞는 말이었지만, 세상에 정답만 있는 건 아니지 않나.
겨울 내내 남편과 나는 MBA 에세이와 씨름했다. Why MBA, Career Goal, Leadership Experience... 새벽까지 노트북 자판 소리가 들렸다. 남편은 모니터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한 문장을 쓰고 지우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이제 막 돌을 지난 엘리를 재우고 같이 고민하고 어떻게 이야기를 풀어나갈지 같이 머리를 싸매고 고민했다.
3월이 되자 결과가 하나둘 나오기 시작했다. 예상은 했지만 막상 현실로 닥치니 참담했다. 줄줄이 불합격. 남편의 표정이 날이 갈수록 어두워졌다. 회사에 뭐라고 보고해야 할지, 유학 기회를 이렇게 날려도 되는지 초조해했다.
< P.T.S.D 오는 reject letter 예시 >
Thank you for applying to the Master of Business Administration (M.B.A.) program at xxx University. With regret, we must inform you that the Graduate Admissions Committee, after careful review of your application, was unable to offer you admission for graduate study.
Each year, the number of applicants seeking admission to our department exceeds by many times the number of available openings. As there are many exceptional students among these applicants, the competition for admission is extremely intense. While we wish we were able to admit all qualified applicants, we thank you for the time and effort to complete the application package.
We wish you every success in satisfying your educational and career goals.
그러던 어느 날, 퇴근한 남편이 의외의 이야기를 꺼냈다. 회사 동료 중에 사이버대학교 법학사 학위로 LLM을 간 사람이 있다는 거였다. 심지어 졸업도 안 하고 입학 허가를 받은 경우도 있다고.
신기하게도 내가 몇 달 전부터 이야기했던 내용이었다. 하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남자들이란 게 원래 그렇다. 아내가 백 번 말해도 안 듣다가 밖에서 누가 한마디 하면 금세 납득하는.
그날부터 남편은 사람이 바뀐 듯 LLM 리서치에 매달렸다. 미국 전역의 로스쿨에 이메일을 보내기 시작했다. 법학 전공이 아니어도 지원 가능한지, 사이버대학교 학점도 인정되는지 하나하나 물어봤다.
며칠 후,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UC Davis, Washington University in Saint Louis, University of Illinois Urbana-Champaign. 세 학교에서 긍정적인 답변이 왔다. 특히 UC Davis는 구체적인 입학 요건과 함께 지원을 권하는 메일을 보내왔다.
남편은 즉시 지원서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MBA 에세이를 쓸 때와는 달리 훨씬 빠르게 준비할 수 있었다. 아마도 절박함이 만든 집중력이었을 거다.
최종적으로 UC Davis와 Washington University in Saint Louis에서 합격 통지를 받았다. 둘 중 Washington university in Saint Louis는 꽤 높은 랭킹의 학교였다. 그렇지만 남편은 정말 쿨~하게 UC Davis가 장학금을 WashU보다 더 많이 줘서 고민할 것도 없다고 했다. 연간 1만4천 달러. 학비 전액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그제서야 Davis가 어딘지 찾아봤다. Sacramento 근처의 작은 도시. San Francisco에서 동쪽으로 한 시간 반. 인구 7만의 대학 도시라고 했다.
"UC Davis는 농대랑 수의대가 유명하대."
"법학도 괜찮아. 그래도 UC고... 일단 캘리포니아잖아."
WashU는 치안이 정말 안 좋기로 유명했고.. 그렇다 남편은 학교 랭킹보다는 그래도 치안과 날씨가 좋은 캘리포니아로 마음이 기운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오히려 잘된 일 같아."
남편이 수강신청 자료를 정리하며 말했다.
"법이 생각보다 재밌어. 특히 Contracts랑 Torts. 케이스 읽으면서 판사들이 어떻게 결론에 도달하는지 보는 것도 흥미롭고. 나중에 회사 들어가서도 내 전문성과 연결도 잘 되는것 같아."
1년 전의 MBA 실패가 오히려 전화위복이 된 셈이었다. 물론 그때는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았겠지만.
"근데 이제 진짜 고민이네. Bar를 볼지 말지."
남편이 연필을 놓으며 한숨을 쉬었다. Criminal Procedure, Will and Trust... Bar 시험 과목들에 동그라미가 쳐져 있었다. 마음이 기울고 있다는 신호였다.
When one door closes, another opens.
때로는 원하던 문이 닫혀야 다른 문이 보이는 법이다. MBA의 문이 닫히지 않았다면 LLM이라는 새로운 길을 발견하지 못했을 테니까. 그리고 지금, 또 다른 갈림길 앞에 서 있었다.
미국에서 변호사가 되려면 로스쿨 졸업 후 반드시 Bar Exam(변호사 시험)에 합격해야 한다. 각 주마다 자체 시험을 실시하며, 합격하면 해당 주에서만 변호사 활동이 가능하다. 예를 들어 캘리포니아 Bar에 합격하면 캘리포니아에서만, 뉴욕 Bar에 합격하면 뉴욕에서만 변호사로 일할 수 있다. 여러 주에서 활동하려면 각 주의 Bar를 따로 합격해야 한다. (일부 주는 상호 인정 협정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