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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인의 숲 Jan 11. 2024

르완다에서 부는 바람

출국 한 달 전 

2023년 12월, 르완다 출국 한 달 전이다. 굵직한 일은 거의 마무리가 된 듯하다. 이제야 하늘을 바라보며 큰 숨 한번 내쉰다. 너무나 빠르게 모든 일들이 이루어졌고 나는 어디서 그런 힘이 났는지 모르게 움직였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남편과 겪었던 대립들을 생각한다. 둘의 온도차는 몇 차례의 소낙비가 쏟아지고 그에 못지않게 천둥, 번개도 쳤다. 


11월 초 파견기관의 계획이 갑자기 취소되면서 남편은 더 예민해졌다. 코이카 사무소에서 파견 지를 다시 섭외하고는 있었지만 선례를 보면 이렇게 해서 파견이 아예 취소되는 경우도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미 살던 집을 전세를 놓았고 그 후의 절차를 진행하고 있었기에 난감한 일이 생길까 봐 더욱 그랬다. 이해 못 할 것도 없었지만 삼십 년 함께 살면서도 알지 못했던 속살을 보는 듯했다. 어찌 생각하면 고개를 갸웃갸웃할 일들이 많았다. 내가 생각하는 보편적인 일들이 왜 남편에게는 먹히지 않을까! 참 이상했다.


르완다행이 결정되면서 결국 함께 가는 것에 의견을 모았지만 야옹이 거처 문제가 가장 이슈가 되었다. 처음에는 데리고 가자는 의견도 있었지만 워낙 장시간을 비행하는지라 그것도 힘들 것 같았다. 그래서 생각 생각하다가 내린 결론이 서울집을 전세 놓으면서 대전에 살고 있는 둘째 딸 원룸을 전세로 얻어주는 것이었다. 물론 이렇게 되면서 모든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지만 거기까지 가는 과정은 참으로 혀를 찼다. 


어렵사리 구한 대전 아파트 평수를 놓고도 남편은 몹시 못마땅해했다. 내가 힘들게 발품 팔아 어려움 없이 이삿짐을 옮기게 되었는데도 고생했다는 말보다는 욕을 실컷 먹었으니 말이다. 남편의 생각과 기준은 내가 이해 못 할 그런 것이었다. 과연 내가 이런 사람하고 함께 갈 수 있을까? 하는 의문조차 들었다. 사실 그랬다. 바쁜 일들이 하나하나 끝나면서부터 몇 번씩 마음이 움직이는 것이었다. 


남편은 서울에 있는 짐을 고스란히 새 집에 옮겨놓고 싶어 했다. 특히 서재에 가득 꽂혔던 책들을 쉽게 처분하지 못했다. 몇 년 동안 펼쳐보지 못했던 책들까지 고스란히 가져가고 싶어 했다. 그러나 나는 이 참에 한 번 훌러덩 뒤집어버리고 싶었다. 버리려고 내놓은 책들을 다시 방으로 들여놓는 이런 미묘한 차이가 서로의 마음을 다치게 했다. 그러니까 남편은 자신의 짐을 옮겨놓은 처소에 딸이 들어와 사는 것을 생각했으나 나는 딸이 새 집의 주체가 되어 살아가기를 원했다. 그러려면 우리 짐을 최소화해야 했다. 남편은 친구들의 말을 듣고 나서야 비로소 자기의 의견에 수정을 가했지만 나는 그것이 현실적으로 맞다고 이미 생각하고 있었다. 남편에게 나는 매우 현실적인 사람이었다. 


2023년 12월 17일 토요일, 드디어 대전으로 짐을 옮겼다. 26년 동안 한 곳에 머문 자리는 구석구석 먼지 투성이었고 낡은 가구들이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안고 있었다. 결혼할 때 가져온 장식장이며 입주할 때 있던 티브이 다이, 세 아이들이 쓰던 기다란 목재책상, 손잡이 하나가 떨어져 나간 장롱까지 사실 가전제품 몇 가지를 제외하고는 버려도 아깝지 않을 물건들이었다. 그리고 내가 더 놀라웠던 것은 따로 챙길 귀중품이 없다는 것이다. 우리 집에서 가장 귀한 것은 사람이야!라고 말했지만, 그동안 내가 이렇게 살아왔나 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였다. 짐의 대부분을 처분하고 3인용 소파와 3단 서랍장, 그리고 자전제품 몇 가지를 가지고 가기로 했다. 이 또한 여러 차례 분분한 다툼을 거친 후의 결정이었다. 


이사 간 집은 볕이 잘 들고 앞이 탁 트여서 야옹이 캣타워를 세우기에 적합했다. 딸과 함께 집을 구하면서 야옹이를 먼저 생각했던 기준이 바로 이것이었다. 마음껏 창밖을 보고 마음껏 즐길 수 있도록 해주자는 것이었다. 처음 보았을 때도 그랬지만 이 집 구조는 마치 서울 집의 축소판을 보는 것 같았다. 남편도 집을 보고 나서야 마음에 드나 보다. 팔을 걷어 부치더니  찌든 레인지후드를 닦고 베란다 큰 창문을 닦는다. 마치, 내가 언제 성질을 부렸냐는 듯 집안 곳곳을 열심히 청소한다. 저 사람은 참 단순하구나! 나는 남편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웃음이 절로 나왔다 


이삿짐을 옮기고 다음날 남편은 서울 집으로 올라가고 나는 며칠 더 남아 짐 정리를 했다. 대구에 사는 큰 딸이 임신한 몸으로 와서 많은 도움을 주었다. 풀어놓은 책을 박스에 담아서 한쪽 방에 차곡차곡 올려놓고 옷방의 옷을 정리하는 일이 만만치 않았다. 야옹이는 몸도 제대로 펴지 못하고 납작 엎드려서 조심조심 다닌다. 첫날에는 잠도 안 자고 왔다 갔다 하면서 계속 울었다. 타지에서의 첫날은 사람도 동물도 잠을 설쳤다. 영역 동물은 불안함과 낯섦을 극복하려면 시간이 필요했다. 나 또한 그랬다. 이런 내가 어찌 남편과 동행하려는 용기를 낸 것일까. 


남편이 코이카 자문관으로 확정된 9월 중순부터 거의 세 달 동안 이 모든 일이 이루어졌으니 힘들다고 나자빠지지 않은 게 이상할 정도다. 누군가의 도움 없이 어찌 이렇게 일이 순조롭게 진행될 수 있었을까! 하는 고백을 한다. 기한이 한참 남은 둘째 딸 원룸이 갑자기 나가게 된 것도 그렇고 다행히 대전에 구한 아파트가 공실이라 이사를 빨리 들어갈 수 있었던 것도 그렇고 무슨 바람에 밀리듯 일이 진행되었다. 그저 뒤에서 "너는 그냥 마음 편히 떠나라"하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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