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하는 인간
삶에서 사유란 하지 않아도 상관없는 권리가 아니라 반드시 수행해야 할 의무이다. - 한나 아렌트
골목길을 가는데 강아지 똥이 몇 덩어리 떨어져있다. ‘헉!’ 간신히 피해 걷는다. 속으로 강아지 주인에 대해 욕을 한다.
그런데 돌아올 때 보니, 강아지 똥 덩어리들이 여기저기 으깨어져 흩어져 있다. 몇 사람이나 무심코 밟고 지나갔을까? 아니면 몇 사람이나 강아지 똥을 밟은 줄 알고 온갖 욕을 다하고는 지나갔을까?
강아지 주인은 으스스했을 것이다. ‘왜 갑자기 몸이 이렇지?’ ‘지뢰’를 밟은 사람들의 저주가 나쁜 기운이 되어 그의 온 몸으로 스며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왜 강아지 주인은 강아지 똥을 그냥 내버려두고 갔을까? 그는 속으로 중얼거렸을 것이다. ‘나만 이렇게 사나? 다들 제 이익만 챙기며 살지 않아?’
그는 자신의 행동에 대해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사실 다들 그렇게 살지 않는가? 식당 벽에 붙어 있는 국산 김치라는 말을 얼마나 믿을 수 있을까?
참기름을 팔며 진짜 참기름이라고 말하는 상인들의 말을 우리는 얼마나 믿는가? 정치인들의 달콤한 말을 우리는 일단 불신하고 듣지 않는가? TV, 신문에서 하는 말을 믿었다가 우리는 얼마나 많이 당했는가?
‘죄 없는 자가 그를 돌로 치라’면 아무도 그에게 돌멩이를 던지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정치사상가 한나 아렌트라면 그에게 ‘사유하라!’고 외치지 않을까?
한나 아렌트는 수많은 유태인들을 학살하고서도 전혀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 나치 독일 친위대 장교 겸 홀로코스트(유대인 학살) 실무 책임자 아돌프 아이히만에게 경악한다.
아이히만은 자신은 상부의 명령을 충실히 따른 모범 공무원이었다고 항변한다. 준법정신이 투철한 모범 시민인 자신의 죄가 무엇이냐는 것이었다.
아렌트는 그의 죄를 ‘악의 평범성’이라는 말로 설명한다. 사람들이 당연하게 여기는 삶을 사는 것, 평범한 삶이 악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아이히만은 자신의 삶을 성찰하지 않았다. 자신이 하는 말과 행동이 과연 옳은지 그른지 생각해 보지 않았다. 맹목적으로 법을 지키고 명령을 따르며 살았다. 그게 그의 죄이고 악이라는 것이다.
악의 평범성, 아이히만에 대해 ‘사유하라!’고 부르짖었던 아렌트의 분노에 대해서는 충분히 공감이 가지만, 과연 오랫동안 평범하게 살아가던 사람들이 갑자기 성찰하는 인간이 되어 비범하게 살아갈 수 있을까?
우리 주변을 둘러보면 다들 평범하게 살아가고 있지 않는가? 세상의 평범한 기준에 맞춰 다들 소시민으로 잘 살아가고 있지 않는가? 언론매체는 평범한 삶을 예찬하고.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것을 체험적으로 익히 아는 그들이 그들의 삶을 바꿀 수 있을까?
나는 ‘무사유의 인간들을 향해 사유하라!’고 외치기보다 사유하지 않게 하는 사회구조를 바꾸는데 함께 힘을 모으자고 하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생각한다.
무지한 대중들을 향해 사유하라고 외치는 것은 인텔리 냄새가 나서 싫다. 인텔리들은 고고한 강의실에서 혹은 높은 강단에서 그런 외침으로 잘 살고 있지 않는가?
춘추전국시대의 현자 순자는 말했다. “물은 배를 띄우기도 하지만 배를 뒤엎기도 한다.”
대중은 큰 강물이다. 평소엔 묵묵히 배를 띄우는 것 같지만, 한 번 분노하고 일어나면 아무리 큰 배도 뒤집어엎는다.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셋이라면 더욱 좋고 둘이라도 함께 가자
앞서가며 나중에 오란 말일랑 하지 말자
뒤에 남아 먼저 가란 말일랑 하지 말자
둘이면 둘 셋이면 셋 어깨동무하고 가자
〔......〕
가다 못가면 쉬었다 가자
아픈 다리 서로 기대며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마침내 하나됨을 위하여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마침내 하나됨을 위하여
- 김남주,《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부분
우리 모두 함께 대중(大衆)을 우중(愚衆)으로 만드는 세상을 바꿔가자. 명령에 따라 살고 죽을 수밖에 없는 사회구조를 바꿔가자.
우중이었던 대중이 우리 모두 큰 강물이라는 것을 깨닫는 사유를 했으면 좋겠다. 그래서 우리 함께 배를 띄우기도 하고 뒤집어엎기도 하며 함께 흘러갔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