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聖)과 속(俗)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 - 폴 엘리아르
원시인들은 동물을 잡아먹을 때 피를 흙에 뿌려 다시 생명을 얻어 부활하기를 기원했다.
얼마나 성스러운 행위인가?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들의 이 신성한 행위에는 세속적 이익이 함께 고려되어 있다.
동물의 피를 잘 빼지 않으면 고기를 오래 보관하기 어렵고 맛도 떨어진다. 원시인들은 오랫동안 동물을 잡아먹으며, 피를 흙에 뿌리는 행위에 의해 성(聖)과 속(俗)이 하나 된 삶을 살아 갈 수 있었던 것이다.
불교에서는 불살생(不殺生)의 계율을 가장 중시한다. 살아 있는 생명을 해치지 말라는 것이다. 왜 생명을 해치지 말아야 할까?
그 당시 인도에서는 최고 높은 계급인 바라문들이 수백, 수천 마리의 소를 제물로 잡아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석가는 이 폐단을 없애려 한 것이다. 소들은 농민들에게 얼마나 중요한 재산인가? 석가는 그들에 대한 자비로 불살생의 계율을 만든 것이다.
생명을 해치지 말라는 신성함과 농민을 위한 세속적인 가치가 서로 충돌하지 않은 것이다. 성(聖)과 속(俗)이 하나로 만난 것이다.
현대문명인은 ‘성과 속’을 나눠서 본다. 성스러운 것을 좋게 보고 속된 것을 나쁘게 본다.
이 둘이 나눠지면 어떻게 될까? 성스러운 것이 따로 있게 되면, 나머지는 속된 것이 되어 하찮게 된다.
신이 거하는 성소가 따로 있게 되면 나머지 지역에서는 속물적 가치만 남는다. 서로의 이익을 위해 상대방을 마구 짓밟는 게 허용이 되어버린다.
이 세상의 신성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성역이 파괴되어 한다. 우리는 금지된 것들을 소망해야 한다.
천하를 흰 구름처럼 떠돌아다니던 한 스님이 어느 절에 잠시 머물게 되었다고 한다.
그 스님은 방안이 너무나 추워 잠을 이룰 수 없었단다. 그 스님은 할 수 없이 대웅전에 모셔져 있는 목불을 가져다 아궁이에 불을 떼고서야 단잠을 잘 수 있었다고 한다.
다음 날 아침 예불하러 대웅전에 들렀던 주지스님은 대경실색했다. ‘아니? 부처님이 사라지다니?’
주지스님은 떠돌이 스님에게 가보았다. 구들방에 손을 대보니 따뜻한 게 아닌가? 그는 부리나케 부엌으로 갔다. 역시나 목불의 재가 있었다.
주지스님은 떠돌이 스님을 깨우고서 불 같이 화를 냈다. “아니? 부처님을 태워버리다니 어떻게 불제자가 이럴 수 있는 거야?”
그러자 떠돌이 스님은 부엌으로 가 재를 뒤적거리며 중얼거렸단다. “아니? 부처님을 태웠는데, 왜 사리가 없지?”
그 말을 들은 주지스님이 말했다. “나무를 태웠는데 무슨 사리가 나와?” 떠돌이 스님이 그 말을 맞받았다. “부처님이 아니고 나무였어요?”
떠돌이 스님은 부처를 태워 버림으로써 모든 곳에 부처님이 있게 했다. 성을 없애버림으로써 모든 속을 성스럽게 했다.
꿀벌은 꽃잎 속에
꽃잎은 흙 안에
뜨락은 흙 안에
흙은 동네 안에
〔......〕
그리고 그리고 하느님은
조그만 꿀벌 속에
- 가네꼬 미수주,《꿀벌과 하느님》부분
시인은 꿀벌을 보며 하느님을 본다.
‘꿀벌은 꽃잎 속에/ 꽃잎은 흙 안에’...... ‘흙은 동네 안에’...... ‘하느님은/ 조그만 꿀벌 속에’ 중중무진(重重無盡), 서로 겹치고 겹쳐지며 끝없이 하나로 어우러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