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고석근


화가 풀리면 인생도 풀린다. - 틱낫한



나는 자주 꿈에서 괴기스러운 장면과 만난다. 어젯밤엔 다리가 없는 사람이 마구 기어가다 언덕 아래로 굴러 떨어지는 광경을 보았다.


전쟁통도 아닌 것 같은데, 세상이 뒤죽박죽이다. 나는 SF 영화 속을 헉헉대며 여기저기 뛰어다니다 꿈을 깼다.

살아오면서 내 마음에 화를 켜켜이 쌓아온 결과일 것이다. 나이 들어 겉으로는 많이 온화해졌지만 나의 깊은 무의식에서는 화가 똬리를 틀고 있을 것이다.


나는 오래 전에 ㅅ 대학병원에서 불안장애 판정을 받았다. 한의원에서는 화병이라고 했다.


불안장애가 발작하기 전에는 같은 꿈을 반복해서 꾸었다. 아마 내가 태어나 세 살까지 살았던 산골 마을 같다.

여기저기 가 보아도 빈집이다. 나중에는 꿈에서도 ‘아, 내가 또 같은 꿈을 꾸는구나!’하고 생각했다. 지금도 선명하게 가슴에 남아 있는 빈집들이다.


부모님이 그 마을에 손수 집을 지어 사셨다고 한다. 아버지는 멀리 산판일 가시고 어머니 혼자 나를 기르시며 나를 옆집에 맡기고 일을 나가셨다고 한다.


어린 나는 종종 걸음으로 자주 집에 가보았을 것이다. ‘아, 아직 엄마 없네.’ 그때의 상처가 그렇게 컸나 보다.

세 살 때 읍 변두리로 이사를 왔다. 셋집이었다. 높은 마루와 주인집 할머니가 생각난다. 할머니는 항상 친절하게 대해주셨지만, 우리는 알아서 조심스레 행동했던 것 같다.


그 후 셋집을 옮겨 다니며 주인집 아들들과 싸운 기억이 난다. 엄마가 떠준 목장갑을 끼고 상대방 아이의 코를 때려 이겼다.


다음에 이사 간 집에서는 주인집 아이와 엉켜 밭고랑을 뒹군 기억이 난다. 그 아이 몸을 위에서 꽉 눌러 이겼다.

그렇게 남에게 지지 않으면서 어린 시절을 즐겁게 보냈는데, 읍내에 있는 초등학교에 들어가면서 내 가슴에 화가 쌓이기 시작했다.


시골 출신의 까만 우리와 희멀건 읍내 아이들과의 대비다. 그들은 우리와 다른 종(種)이었다.


명랑하던 나는 갑자기 말이 없는 아이가 되어갔다. 그들과 싸울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싸움이란 끼리끼리 하는 게 아닌가?


그들과 우리를 대하는 담임선생님의 태도는 확연히 달랐다. 분명히 잘못되었는데, 뭐라고 말할 수 없는 상황. 그 상황을 안고 보낸 초중고 12년.


고등학교 때 교련선생님의 별명은 ‘악랄리스트’였다. 국립고둥학교라 빡세게 훈련을 받았다. 서울의 교련실기대회에서 1등을 했다.


담장 너머로 본 ㅇ 고등학교의 교련시간, 우리들 눈에도 확연히 시간 때우기로 보였다.


‘좋은 부모 만난 쟤네들은 저렇게 교련을 하는구나!’ 우리는 망연히 그들을 바라보았다.


가난한 시골 출신들이 모인 국립실업계고등학교, 선생님들은 우리를 두려워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겉으로는 얌전한 학생이었지만, 속까지 그랬을까? 그 억눌린 에너지들은 마음 깊숙이 쌓여갔을 것이다.


동창생들을 만나면, 그때의 상처가 쓰라리게 되살아난다. 나는 한순간에 막막한 아이로 되돌아간다.


이 화가 승화된 적이 있다. 교직에 있을 때 전교조 활동을 했었다. 내 머리 위에 군림하던 교장선생님, 장학사와 맞서 싸우며 나는 내 안에서 충만해 오는 힘을 느꼈다.


니체가 말하는 ‘힘의 의지’가 내 안에서 충만해지자 나는 너그러워지기 시작했다. 교실에 들어가면 아이들 하나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아이들 하나하나의 마음이 물결처럼 내 마음에 다가와 찰랑거렸다. 사랑은 강자, 주인만이 할 수 있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남에게 짓눌려 사는 노예는 남을 사랑할 수 없다. 그에게는 충만한 힘이 없기 때문이다.


화는 개인의 차원에서 일어나는 감정이지만, 더 넓은 사회의 차원으로 승화되면 거룩한 분노가 된다.


거룩한 분노는 아름답다. 불의(不義) 앞에 화, 분노가 일어나지 않는 사람은 죽은 사람일 것이다.


전교조 활동을 하며 거룩한 분노의 아름다움을 알게 되었다. 우리들의 모든 화가 거룩한 분노의 에너지로 화하면 천지개벽의 힘이 될 것이다.


틱낫한 스님은 말했다. “화가 풀리면 인생도 풀린다.”


‘화는 살아 있는 생명체다. 화가 일어나면, 다시 가라앉을 때까지는 시간이 걸린다... 우리의 마음은 밭이다. 그 안에는 기쁨, 사랑, 즐거움, 희망과 같은 긍정의 씨앗이 있는가 하면 미움, 절망, 시기, 두려움 등과 같은 부정의 씨앗이 있다. 어떤 씨앗에 물을 주어 꽃을 피울지는 자신의 의지에 달렸다.’

허공으로 날아가거나 거룩한 분노로 승화되지 못한 화가 결국엔 화병으로 나타났을 것이다. 내가 평생 안고 가야할 소중한 나의 삶의 동반자다.



산다는 것
지금 살고 있다는 것
울 수 있는 것
웃을 수 있는 것
화낼 수 있는 것
자유로운 것


- 다니카와 슌타로,《산다》부분



‘산다는 것’은 온갖 희로애락을 표현하며 ‘자유로운것’을 느끼는 삶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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