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신
나는 최선을 고를 수가 없다. 최선이 나를 고른다. - R. 타고르
프란츠 카프카의 소설 ‘변신’에서 평범한 보험회사의 외판원이던 그레고르 잠자는 어느 날 아침 눈을 뜨자마자 자신이 벌레가 되어있음을 발견한다.
가족들은 처음에는 그를 동정하는 듯하지만, 돈을 벌어오지 못하는 그를 차츰 멀리하게 된다.
가족들에게 그는 돈을 벌어오는 가장이었기 때문이었다. ‘돈을 벌어올 수 없는 가장이라니?’
그는 가족들에게서 끝내 버림을 받고 쓸쓸하게 죽어간다. 가족들은 그가 사라진 빈자리를 신속하게 메꾸어간다.
우리 모두 이렇지 않을까? 인간은 ‘사회적 존재’라 사회 속에서 존재의 의미가 사라지면, 이 세상에서 사라져야 한다.
그레고르 잠자가 벌레가 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보험회사의 외판원으로서 한계에 이르렀을 때, 그는 벌레로 변신했을 것이다.
오래 전에 간암 환자를 본 적이 있다. 배에 물이 차오른다고 했다. 의사는 좋은 현상이라고 했단다.
그의 몸은 암에서 그의 몸을 보호하기 위해 배에 물을 채운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배의 물이 암을 이겨내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는 몸을 비난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누구나 알 것이다.
그레고르 잠자가 벌레가 된 것도 ‘최선의 선택’이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더 이상 견딜 수 없었을 테니까.
그런데 어느 누가 그의 변신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을까? 우리는 자살하는 사람에 대해서 “죽을 마음으로 한번 살아보지”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게 어디 말처럼 쉬울까? 인도의 시성 타고르는 말했다. “나는 최선을 고를 수가 없다. 최선이 나를 고른다.”
우리는 왜 다른 사람의 ‘변신’을 받아들이지 않는 걸까? 변신한 본인들은 변신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있을 텐데.
그레고르 잠자는 벌레인 자신을 받아들여 천장에 매달려 보기도 하고, 누이가 올 때는 그녀가 청소하기 좋게 어둠 속에 숨는다.
그의 가족들이 그의 변신을 받아들였다면, 다들 행복하게 잘 살 수 있지 않았을까? 그들은 왜 니체가 말하는 ‘아모르파티(운명에 대한 사랑)’를 받아들일 수 없었을까?
그레고르 잠자가 단지 돈을 벌지 못해서가 아닐 것이다. 그레고르 잠자에 대한 정체성 때문일 것이다.
‘성인이 된 아들은 당연히 돈을 벌어야 해!’ 가장이 돈을 벌지 못하면, 비정상인 것이다. 그들은 비정상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우리는 일생을 살아가면서 사실은 수없이 변신을 한다. 하지만 겉으로는 변함없는 인간인 것처럼 살아간다.
속은 변했는데, 겉으로는 변치 않은 것처럼 살아야 하니 살아도 사는 게 아니다. 그 모든 변신은 어떤 알 수 없는 힘이 우리에게 최선의 삶을 살 수 있게 해 준 것이었다.
장자는 꿈에 나비가 되었다. 장자는 중얼거렸다. ‘나는 인간인가? 나비인가?’ 그는 둘 다로 살다 간 위대한 인간이다.
신화에서 신들은 수없이 변신을 한다. 우리는 신들의 이야기를 빌려 변신의 소망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호적도 없이
되씹고 되씹어도 알 수는 없어
성한 사람이 되려고 애써도 될 수는 없어
어처구니없는 사람이올시다
나는 문둥이가 아니올시다
나는 정말로 문둥이가 아닌
성한 사람이올시다
- 한하운,《나는 문둥이가 아니올시다》부분
문둥이로 변신한 시인은 중음계(中陰界)를 떠돈다. 그는 사람도 아니고 문둥이도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