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성과 감상

by 고석근

감성과 감상


감상은 폭력의 메아리다. - 조셉 캠벨



나는 오랫동안 나의 감정을 꼭꼭 숨기고 살아왔다. ‘가난한 소작농의 장남’에게 세상은 감정 표현을 허용하지 않았다.


‘울면 안 돼!’ 속으로 울음을 꾹꾹 눌렀다. 좋아도 좋다는 말을 하지 못하고 싫어도 싫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나중에는 이게 습관이 되어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살아가는 게 편했다. 생각하는 인간이 아닌 기계가 되면 얼마나 편한가?


내 얼굴은 ‘데드마스크’가 되어갔다. 하지만 그 가면 아래에는 천진난만한 아이 얼굴이 있었다.


혼자 있을 때 또는 술에 취했을 때, 갑자기 이 얼굴이 튀어나왔다. 나는 마냥 아이가 되어 신이 났다.


그러다 내 얼굴 표정이 일그러지며 갑자기 우울해졌다. 조울증. 교직에 있을 때 학생들은 나를 ‘기분파’라고 했다.


학생들은 나의 죽 끓듯 하는 변덕에 얼마나 괴로웠을까? 감성이 미숙해 나오는 감상은 폭력의 메아리인 것이다.


그러다 문학 공부를 하며 나의 감정을 들여다보게 되었다. 내 안에서 쌓였던 김정들이 북받쳐 올라왔다.


술을 마시다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 한번 허물어져버린 감정의 둑은 다시는 쌓아지지 않았다.


걷잡을 수 없게 되었다. 한 복지관 주최의 수련회에서도 감정의 강물은 둑을 허물고 마구 흘러나왔다.


다음 날 아침, 함께 간 ㄴ 신문 기자가 말했다. “수련회에서 강사가 이런 행동을 하는 건 처음 봤어요. 그런데 보기 좋아요.”


그녀는 아마 내가 측은했나 보다. 이렇게라도 해묵은 감정들을 털어버려야 내가 건강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을 아는 듯했다.


그 뒤 차츰 나는 평정을 되찾아갔다. 오래된 우물은 물을 다 퍼내야 맑은 샘물이 솟아올라온다.


감성이 거울처럼 맑아지면 세상이 선명하게 비친다. 좋은 문학작품이 내 감성에 와 닿기 시작했다.


감성이 흐릴 때는 좋은 글과 나쁜 글이 구분이 잘 되지 않았다. 감성이 흐리면 세상이 왜곡되어 비친다.


왜곡된 감성이 드러난 글들이 좋아 보인다. 서점에 가보면 문학적 가치가 낮은 작품들이 베스트셀러 목록에 오른 것을 많이 본다.


감성이 미숙한 사람들에겐 얕은 감정을 건드리는 글들이 좋아 보이는 것이다. 지하철에서 혹은 버스 정류장에서 감상적인 글들이 자주 눈에 띈다.


그런데 그런 글들을 자주 접하다 보면 감성이 점점 퇴화한다. 막장 드라마가 계속 인기를 누리는 이유다.


글을 읽는 건, 자신에 대한 위로를 넘어서야 한다. 딱딱하게 굳어버린 감정을 깨뜨리는 행위가 되어야 한다.


감성이 되살아나야 세상이 맑게 보이고 좋은 글이 보인다. 좋은 세상을 만나고, 좋은 글을 만나는 재미는 무궁무진하다. ‘살아있음의 환희’다.



아버지

언제 적부터

아버지야

네가 태어난

그 시간부터란다

와 신기하다

아버지


〔......〕


아버지

때로는 어린이가

되어줄래

흉내 내봐도

안 되는구나

가엾어라

아버지


- 쓰루미 마사오,《아버지》부분



‘흉내 내봐도/ 안 되는구나’


얼마나 많은 아버지들이 이럴 것인가? 그러다 다 늙어 자신도 모르게 아이가 된다. ‘유치한 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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