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유냐 존재냐
삶이 소중한 이유는 언젠가 끝나기 때문이다. - 프란츠 카프카
나는 30대 중반에 중년의 위기가 왔다. 내 몸을 꽁꽁 옭아매고 있는 거미줄을 견딜 수 없었다.
‘차라리 큰 병에 걸렸으면 좋겠어. 그러면 병원에 입원하여 이 지옥을 벗어날 수 있겠지...... .’
어느 날 아내와 절에 갔다. 대웅전에서 예불을 하고 나서 아내에게 말했다. “나 직장 그만두고 자유롭게 살아보고 싶어.”
아내는 조용히 말했다. “응, 알았어.” 나는 그 순간, 하늘로 솟구쳐 올랐다. 그 뒤 오랫동안 발이 땅에 닿지 않았다.
하늘을 붕붕 떠다녔다. 함께 공부하는 도반들과 밤새워 술을 마신 다음 날도 전혀 피곤하지 않았다.
옛날의 잠수함에는 토끼를 싣고 다녔다고 한다. 물속에 오래 있으면 산소가 부족해지는데, 토끼는 워낙 예민해 산소가 조금만 부족해져도 숨이 차 헐떡거린다고 한다.
그러면 잠수함은 바다 위로 올라가 산소를 보충한다고 한다. 세상에는 토끼 같은 사람들이 있다. 타고나기를 예민한 사람들이다.
토끼 같은 사람들은 남들은 멀쩡히 잘 다니는 직장에서도 숨 가빠한다. 그들은 살기위해 ‘백수’가 되어야 한다.
그들은 예술가의 길을 가게 된다. 가쁜 숨을 예술을 통해 풀어낸다. 주변에서 왜 돈도 안 되는 예술을 하느냐고 힐난을 하지만 그건 살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독일 작가 프란츠 카프카는 아버지의 명령에 따라 법학을 공부하고 보험회사에 근무하게 된다.
그는 숨 막히는 직장에서 벗어나면, 소설을 썼다고 한다. ‘변신’에는 벌레가 되어서라도 ‘아버지의 세계’에서 벗어나고 싶은 그의 슬픈 소망이 담겨 있다.
변신의 주인공 그레고르 잠자는 아침에 잠에서 깨어나자 벌레로 변한 자신을 발견한다. 그는 벌레가 되어버린 자신보다 직장과 가족을 걱정한다.
하지만 직장과 가족은 벌레인 그를 무참하게 버린다. 그는 버림을 받고서도 벌레인 자신을 담담히 받아들인다.
그의 깊은 무의식이 간절히 원한 변신이었으니까. 죽어가면서도 편안해한다. 이제 이 지옥을 벗어날 수 있으니까.
흔히 ‘변신’을 산업사회의 인간 소외로 해석한다. 그렇게 해석하고 나면 우리는 마음이 편할 것이다.
이름을 지으면 모든 고통은 사라지니까. 우리는 카프카의 고뇌를 가볍게 허공으로 날려버리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직장과 가족은 무엇인가? 직장은 자본의 증식을 위해 인간이 일벌레가 되어야 하는 곳이다.
과연 일벌레가 되어서 인간이 잘 살아갈 수 있을까? 일벌레는 하루살이로 변신한다. ‘오늘도 무사히...... .’ 기도하거나 혹은 술에 흠뻑 취해 하루하루를 견딘다.
가족은 어떤 곳인가? 흔히 가족, 가정은 사랑의 보금자리라고 말한다. 그건 우리의 바람이지 현실의 가족, 가정은 아니다.
자본주의 세상에서 가족, 가정은 자본주의 체제의 가장 작은 단위다. 부모는 자식을 ‘자본주의의 인간형’으로 기른다.
돈을 최고의 가치로 숭배하는 가족, 가정이 사랑의 보금자리가 될 수 있을까? 돈과 사랑은 양립할 수가 없다.
그래서 미국의 사회심리학자 에리히 프롬은 현대인에게 선택하라고 한다. “소유냐? 존재냐?”
소유로 세상을 보는 사람은 ‘존재’할 수가 없다. 존재는 있음, 그냥 있는 것만으로 충만한 삶이다.
아직 소유에 때 묻지 않은 아이들을 보자. 그들은 최소한의 인간적 욕구만 충족되면 부족함이 없다.
그들은 마냥 신난다. 이런 인간, 존재만으로 행복이 철철 넘치는 세상과 무언가를 소유해야 인정을 받고 살아갈 수 있는 세상.
우리는 이 둘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소유의 가치로 살아가는 그레고르 잠자의 가족들은 잠자가 돈을 벌 때는 그를 인간으로 인정해주지만 돈을 벌지 못하자 한 순간에 그를 버린다.
우리 가족들의 실상이 아닌가? 카프카는 ‘변신’이라는 도끼를 우리의 굳은 머리에 내리치고 있다.
가정이 사랑의 보금자리라는 망상을 깨라고. 벌레가 되고 죽어서라도 지옥을 벗어나려하는 게 인간이라고.
그럼 폐허가 되어버린 이 세상에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우리는 두려울 것이다.
하지만 궁하면 통한다. 통하면 변하게 된다. 일단 우리는 막다른 골목까지 가봐야 한다.
내 방이었습니다
구석에서 벽을 타고
올라갔습니다
천장 끝에서 끝까지
수십 개의 발로 기었습니다
다시 벽을 타고 아래로
바닥을 정신없이 기었습니다
이렇게 많은 다리를 가지고도
문을 찾을 수 없다니
- 진은영,《벌레가 되었습니다》부분
시인도 어느 날 벌레가 되었나 보다. 그런데 벌레가 되어서도 출구를 찾지 못하는 자신을 본다.
하지만 벌레인 자신을 바라보는 시인의 눈은 끝내 출구를 찾아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