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아무나 하나

by 고석근

사랑은 아무나 하나


물을 주고 가꾸는 수고 없이 꽃을 사랑한다고 말할 순 없다. - 에리히 프롬



‘신사와 아가씨’라는 드라마를 보았다. 신사는 자녀가 셋이 딸린 재벌회장이고, 아가씨는 20대 후반의 가정교사다.


드라마는 이 둘의 사랑을 통해 세상만사를 보여준다. 아가씨의 부모는 강력히 반대한다.


아버지는 신사 앞에서 무릎까지 꿇는다. “회장님. 제발 우리 딸을 놓아 주세요. 이제 우리 딸은 겨우 27세에요. 딸 가진 아버지의 심정을 헤아려 주세요.”


부모는 왜 딸의 사랑에 그리도 개입하는가? 부모는 딸을 자신의 분신으로 생각한다. 한 인간으로 대우해주지 않는다.


가족주의가 무서운 건, 가족을 ‘나’로 본다는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 성숙한 인간인가?


우리는 안다. 성숙한 인간은 별로 없다는 것을. 그런데 다른 사람, 가족을 미성숙한 자신으로 본다니.


다른 사람은 각자 자신만의 개성을 지닌 사람인데, 그 개성을 깡그리 무시하고 미성숙한 자신으로 만들어버리다니.


이런 무자비한 폭력이 어디 있나. 그런데 그 폭력은 ‘사랑’이라는 가면을 쓰고 있다.


신념에 가득 찬 사람은 어떤 폭력도 저지를 수 있다. 사랑의 신념! 그 폭력 앞에 무방비로 서 있는 연약한 자식.

사회심리학자 에리히 프롬은 말했다. “물을 주고 가꾸는 수고 없이 꽃을 사랑한다고 말할 순 없다.”


사랑은 꽃을 가꾸듯이 한 인간을 한껏 꽃 피우게 하는 것이다. 그 꽃을 자신처럼 되라고 강요하는 게 아니다.

그래서 사랑은 아무나 할 수 없다. 성숙한 인격을 지녀야 가능하다. 우리는 다 미숙한 인간이므로 ‘사랑의 이름’ 앞에 무한히 겸허해야 한다.


아버지는 먼저 살아보았기에 어떤 삶이 좋은지 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 생각이라는 게 자본주의와 가부장적인 가치들을 전제하고 있는 게 아닌가?


설령 딸이 잘못된 선택을 할지라도 딸과 함께 대화로 풀어가야 한다. 그래도 끝내 딸이 고집을 부리면 딸의 의견을 존중해야 한다.


지혜라는 게 시행착오를 겪으며 체득되는 게 아닌가? 정말 딸을 사랑한다면 딸을 지켜보아야 한다. 큰 산처럼.

지쳐서 딸이 돌아올 때는 따스하게 품어줄 수 있어야 한다. 그러다 딸이 다시 세상 밖으로 날아갈 때는 미련 없이 보내줄 수 있어야 한다.


사랑은 오롯이 상대방의 삶이 성숙되기만을 바라는 거니까. 딸이 자녀 셋이나 딸린 홀아비를 사랑할 수 있는 건, 위대한 사랑의 힘이다.


사랑이 아니고서 누가 그런 희생을 한단 말인가? 하지만 삼라만상을 보라. 사랑과 희생으로 삼라만상이 운행되지 않는가?


‘사랑’은 천지자연이 제대로 돌아가게 하는 진리의 구현이다. 자신의 이익밖에 모르는 세상은 조만간 종말을 고하게 되어 있다.


사랑은 인류의 종말을 막는 위대한 힘이다. 사랑은 인간을 신으로 높이 승격시켜준다.


딸의 사랑을 지켜보며 아버지는 잃어버린 사랑을 배워야 한다. 탐욕의 육체에 꽁꽁 갇혀버린 영혼을 깨어나게 해야 한다.


얼마나 좋은 기회인가? 딸의 사랑을 통해 자신이 구원받을 기회가 온 것이다. 그 기회를 발로 차버리는 아버지의 딱딱하게 굳은 얼굴. 타나토스(죽음의 본능)다.


나는 철이 들면서 내가 ‘가난한 소작농의 장남’이라는 것을 알았다. 연약한 아들인 나는 부모님의 뜻을 예민하게 알아차린 것이다.


부모님이 강요한 적은 없다. 하지만 가끔 말씀하셨다. “네가 잘해서 동생들이 다 잘한다.”


아들은 부모님의 뜻을 거스를 수 없다. 뜻을 어기면 자신의 존재감이 사라지는 걸 아니까.


나는 부모님의 대행자로서 동생들에게 폭군이 되어갔다. 부모님은 말없이 나의 폭군을 지켜보았다.


한평생 ‘아버지의 세계’에 갇혀 살았던 프란츠 카프카는 말했다. “문학이 주는 위안 그것은 살인자의 대열에서 뛰쳐나가는...... .”


그는 글을 쓰며 살인자가 되지 않을 수 있었다. 우리 사회의 온갖 엽기적인 살인 사건들은 우리 사회의 무언가가 그들을 살인자의 대열에 서게 한 결과일 것이다.



아버지가 모종컵 속에 나를 심는다 아가야, 어서어서 피어라 너를 팔아 새 눈알을 사야지 그때서야 내 너를 볼 수 있지 나는 빛나는 아버지를 쬔다 일렬로 줄을 선 모종 컵 속으로 골고루 아버지가 비친다〔......〕


모종컵 속에서 아버지의 사지가 하나씩 피어난다


- 조말선,《거울》부분



시인은 우리에게 그로테스크한 풍경 하나를 보여준다. 아버지의 일터인 비닐하우스의 모종컵들 속에서 아버지의 사지가 하나씩 피어나는 것을.


흡사 거울이 비추인 것들을 무수히 만들어내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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