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와 가짜
내려 놓아라! - 조주 선사
한 스님이 물었다. “여러 장님들이 코끼리를 만져보고 제각기 다르게 말하는데, 무엇이 진짜 코끼리입니까?” 조주 선사가 대답했다. “가짜 코끼리는 없다. 가짜로 알고 있는 것은 너다.”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는 이야기다. '코끼리 다리를 만진 장님은 기둥 같다고 하고, 코끼리 코를 만진 장님은 뱀 같다고 한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눈이 먼 자들의 착각’을 비유하는 이야기로 알고 있다. 하지만 조주 선사는 일갈한다. “가짜 코끼리는 없다.”
우리는 장님이 아니니까 눈에 보이는 코끼리가 진짜 코끼리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우리가 보는 코끼리가 진짜 코끼리일까?
코끼리는 사람마다 다 다르게 보인다. 사람은 자신이 갖고 있는 ‘생각의 틀’로 대상을 보는 것이다.
사람 아닌 다른 동물의 눈으로 보면 코끼리는 전혀 다른 존재로 보인다. 눈이 퇴화하여 초음파로 세상을 인식하는 박쥐가 코끼리를 본다면?
세상은 그대로 보이는 게 아니라 생명체마다 다른 ‘인식의 틀’에 의해 다양한 모습으로 드러난다.
조주 선사는 자신의 마음으로 보고 있는 것을 ‘객관적 진실’이라고 믿고 있는 그 스님의 굳은 생각을 깨뜨리려 한 것이다.
밖에 보이는 풍경은 자신의 마음이 밖에 투영된 것이다. 모든 것은 자신의 마음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다.
환상 문학의 거장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소설 ‘알모따심에로의 접근’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대학생은 두어 차례 손으로 문을 두드리고 알모따심을 찾는다. 한사람의 목소리 -알모따심의 형용할 수 없는 목소리-가 들어오라고 응답한다. 대학생은 커튼을 젖히고 안으로 들어간다. 그 순간 소설은 끝난다.’
알모따심은 깨달음 자체인 사람이다. 즉 신(神)이다. 오랫동안 신을 찾아 헤맨 끝에 드디어 신을 만났는데, 왜 소설이 끝나버리는 걸까?
그 다음은 독자들이 상상하라고 한 게 아닐까? 보르헤스는 우리가 온 마음을 다해 보려 하면, 그 다음을 볼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것은 독자의 몫이니 그가 개입할 수 없다. 그가 설명해버리면 진실은 사라져 버린다. 진실은 언어로 드러낼 수 없으니까.
우리는 조주 선사가 외친 “가짜로 알고 있는 것은 너다.”라는 말을 마음으로 들어야 할 것이다.
진짜가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는 그 스님은 진짜를 만날 수 없다. 진짜를 알아보는 눈은 그의 마음에 있기에 그가 마음을 비우기만 하면 된다.
그가 텅 빈 마음이 되면 그가 있는 곳, 바라보는 것이 바로 진짜의 세상이다. 조주 선사는 그 스님의 선입견을 깨주려 한 것이다.
그 스님이 조주 선사의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해도 어쩔 수 없다. 진리는 말로 전할 수가 없으니.
보르헤스는 독자가 대학생이 안으로 들어가 온전한 자신을 만나는 광경을 상상하기를 바랐을 것이다.
그토록 찾아 헤매던 신이 바로 그 자신이라는 놀라운 사실을 깨닫고 황홀경에 젖어 있는 대학생을.
신화학자 조셉 캠벨은 ‘네가 바로 그것이다’고 했다. 인류의 오랜 지혜인 신화를 공부하며 그는 ‘모든 인간이 바로 신’이라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가을 산 기운 저녁에 더욱 좋고
날새들 짝지어 집으로 돌아오니
이러한 경지가 바로 참맛이려니
말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으라!
- 도연명,《음주》부분
우리는 ‘카르페디엠(현재를 잡아라)’이라는 말을 많이 듣는다. 마음을 다 내려놓았을 때, 우리는 현재에 있다. 진짜 세상이다.
시인은 ‘가을 산 기운 저녁’에 현재를 누리고 있는 자신을 노래한다. ‘이러한 경지가 바로 참맛이려니/ 말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으라!’
마음이 텅 비어 있지 않으면 현재는 쏜살같이 흐르는 시간이 된다. 그 현재는 절대 잡을 수가 없다.
우리는 카르페디엠을 ‘현재를 아껴쓰라’는 말로 오해하지 말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