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정한 사람
슬픔의 새가 머리 위를 지나가지 못하게 막을 수는 없지만, 그 새가 당신의 머리에 둥지를 틀지 못하게 할 수는 있다. - 스웨덴 속담
ㅇ 문화단체의 사무국장을 할 때였다. 술자리에서 한 화가가 내게 “고 선생은 냉정한 사람 같아.”라고 말했다
나는 그가 내 내면을 냉철하게 꿰뚫어본다고 생각했다. 그 후 그 말이 틀린다는 걸 긴 방황 후에 알았다.
나는 냉정한 사람이 아니라 ‘갑각류’로 퇴화한 인간이었다. 상처받는 게 두려워 갑옷 같은 살가죽을 만들어 나를 보호했던 것이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나의 마음을 표현하지 않았다. 가난한 집안의 ‘장남’은 항상 성숙한 아이여야 했다.
마을 어르신들, 선생님들에게는 절대 복종했다. 내 감정은 전혀 살피지 않았다. 나는 항상 착한 아이였다.
가끔 안에서 알 수 없는 화가 솟구쳐 올라오고, 이따금 짙은 외로움이 밀려왔지만 이내 평상심으로 되돌아왔다.
집으로 돌아와 거울을 보면 딱딱하게 굳은 얼굴 표정, 한참 시간이 지나서야 서서히 풀어졌다.
나는 스스로를 지극히 현실적이고 이성적(理性的)인 성격이라고 생각했다. 30대 후반에 문학 공부를 하며 나의 감정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그동안 흘리지 못한 눈물이 샘물처럼 흘러내렸다. 나의 희로애락(喜怒哀樂)을 비로소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
너무나 오랫동안 꼭꼭 눌러놓았었기에 감정표현이 서툴렀다. 즐겁게 술을 마시다가 불쑥 화를 내고 펑펑 울었다.
나의 감정을 자연스레 표현하는 데 수십 년이 걸렸다. 이제 나의 마음을 알 것 같다. 남의 마음도 조금이나마 알 것 같다.
드라마 ‘홍천기’를 보며 생각한다. 한 소년이 마왕(魔王)이 되었다. 그는 앞으로 어떻게 될까?
그의 마의 기운을 누가 잠재울까? 그의 가슴에는 한 소녀가 있다. 함께 궁궐에 들어온 소녀.
그 소녀는 그의 ‘아니마’다. 아니마는 심층심리학자 융이 말한 마음속의 ‘여인’이다. 오랜 인류사에서 남성의 깊은 무의식에 새겨진 여성에 대한 원형상(源型象)이다.
남성은 아니마가 깨어나야 ‘온전한 남자’가 된다. 무의식의 여성이 없는 남성은 ‘마초’가 된다.
마초가 힘을 갖게 되면 마왕이 된다. 전쟁터에서 온순하던 군인들이 얼마나 잔인해지는가?
‘여성’만이 마왕을 구원할 수 있다. 그래서 대문호 괴테는 ‘여성성이 인류를 구원하리라’고 했다.
경찰은 강원 강릉 옥계와 동해 일대를 불바다로 만든 60대 A씨에 대한 구속영장을 신청했다고 한다.
A씨는 말했단다. “주민들이 수년 동안 나를 무시해서 범행을 저질렀다.” 그의 범행으로 그의 노모가 죽고 산림 500㏊와 건물 수십 채가 잿더미가 되었다.
그의 머리에 둥지를 튼 슬픔, 그 슬픔은 그의 영혼을 서서히 잠식해갔을 것이다. 슬픔을 밖으로 드러내야 하는데, 그에게 그런 기회가 몇 번이나 있었을까?
그의 마음속의 여성이 깨어난 적은 몇 번이나 있었을까? 그의 귀에 세상 사람들의 무시하는 목소리가 들릴 때, 그의 옆에 누가 있었을까?
그는 자신이 가끔 마왕이 된다는 것을 알지 못할 것이다. 그의 죄는 무엇으로 씻을 수 있을까?
최초의 슬픔은
눈물과 사과
두 번째 슬픔은
절규와 바다
세 번째 슬픔은
침묵과 작은 돌
슬픔을 견디려다
사람은 슬픔을 잃어버린다
네 번째 슬픔은
냉소와
혼잡...
- 다니카와 슌타로,《슬픔에 대해서》부분
사람이 슬픔을 견디려다 슬픔을 잃어버리면 어떻게 될까? 절규하려다 침묵하고 냉소적이 되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