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실현
사람은 어떻게 해서 본래의 자기가 되는가. 인생의 다양한 실책조차 고유한 의미와 가치를 갖는다. 실책에는 일종의 커다란 영리함과 그보다 더한 최상의 지혜가 존재하는 것이다. - 프리드리히 니체
심층심리학자 융은 인생의 목적은 “자기실현(自己實現)”이라고 했다. 자신 안의 영혼, 자기(self)을 활짝 꽃 피우는 것.
철학자 니체는 우리가 살아오면서 겪는 다양한 실책조차 ‘자기를 실현하는 여정’이라고 말한다.
겉으로는 실책으로 보이지만, 그 안에는 커다란 영리함과 그보다 더한 최상의 지혜가 있다는 것이다.
고등학교 때 무협지를 많이 읽었다. 취직이 보장되는 국립고등학교라 공부할 필요가 없었다.
대학에 가지 않는 나는 자취방으로 돌아오면 옷을 갈아입고 설레는 가슴으로 만화방으로 갔다.
주로 와룡생이 쓴 무협지를 빌렸다. 밤이 이슥하도록 나는 강호의 고수가 되어 천하를 떠돌았다.
우연히 은둔 고수에게서 사라졌던 비급을 얻고 영약을 얻어 최절정 고수가 되었다. 약관 18세의 소년이 정파와 사파를 아우르는 무림의 ‘절대지존’이 되었다.
어디를 가나 천하의 미녀들이 따르고 영웅들이 우러러마지 않는 나의 아바타. 나는 나의 분신을 나날이 멋지게 가꾸어갔다.
말하자면 나는 게임에 빠진 아이였다. 아침에 부스스한 눈으로 학교에 갔다. 혼자 자취를 하니 아무도 나를 제지하지 않았다.
어른이 되어 ‘청춘시절을 그렇게 낭비하다니’하고 후회한 적도 있다. 그러다 나이 들어 니체 글을 읽으며 나의 과거가 새로이 구성되었다.
그런 나의 실책들은 시간 낭비가 아니라, 나의 영혼이 자신을 꽃 피워가는 지난한 과정이었던 것이다.
그때 차가운 자취방에서 협객을 꿈꾸지 않았다면, 나는 그 참혹한 시절을 견뎌낼 수 있었을까?
밤마다 협객의 꿈을 꾸며 나의 나약한 정신은 비굴한 정신으로 추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시선 이백은 그의 시에서 말했다. “자고로 문인은 협객의 꿈을 꾼다.” 현실 속에서 참을 수 없는 울분들이 결국 나로 하여금 글을 쓰게 했을 것이다.
나는 타고나기를 여린 심성이라 불의 앞에 당당하게 나서지 못한다. 그렇다고 그들을 두고 볼 수도 없다.
나는 노트북 좌판을 두드리며 칼을 휘두르는 것이다. 약자를 괴롭히는 자들을 응징하고 우리의 나약하고 비굴한 정신도 단칼에 날려 보내는 것이다.
내가 자란 마을 앞에는 사철 맑은 물이 흐르는 시내가 있었다. 모래밭에서 놀 때는 나는 주로 모래로 커다란 의자를 만들었다.
모래 의자의 팔걸이에는 별들을 조각했다. 나의 원초적 소망은 ‘왕’이었을까? 남의 집에 세 들어 살며 나는 강한 나를 꿈꾸었던 것 같다.
지금도 나는 누군가에게 무시당하면 견디지 못한다. 왕이 되려던 꿈을 계속 꾸고 있는 것 같다.
나의 왕국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내가 오랫동안 공들여 가꿔왔기에 절대 무너지지 않는 왕국이다.
나의 이념으로 운영되는 나라, 나의 마음으로 꽉 채워진 나라. 명령하는 왕도 없고 순종하는 백성도 없는 유토피아다.
나는 죽을 때 나의 왕국도 함께 순장할 것이다. 활짝 꽃 피웠던 나의 영혼이 툭 가랑잎처럼 떨어질 때 나의 왕국도 연기처럼 사라져갈 것이다.
가장 훌륭한 시는 아직 씌어지지 않았다.
가장 아름다운 노래는 아직 불려지지 않았다
최고의 날들은 아직 살지 않은 날들
〔......〕
무엇을 해야 할 지 더 이상 알 수 없을 때
그때 비로소 진정한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
어느 길로 가야 할지 더 이상 알 수 없을 때
그때가 비로소 진정한 여행의 시작이다.
- 나짐 히크메트,《여행》부분
지난 인생의 수많은 실책들은 ‘어느 길로 가야 할지 더 이상 알 수 없을 때’였다. 길 찾기였다.
지나고 보면 ‘그때가 비로소 진정한 여행의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