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조리
인생은 부조리해 보인다.〔......〕그것이 부조리해 보이는 건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신비로운 심오함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숙연히 알아차렸을 때, 인생은 신성한 것이 된다. -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우리는 가끔 스스로에게 질문을 한다. ‘인간은 왜 사는가?’ ‘산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 거야?’
이럴 때 우리는 그 질문에 대한 질문을 해야 한다. ‘내가 왜 내게 이런 질문을 하는 거지?’
오래 전에 한 수강생이 강의 시간에 질문을 했다. “시어머님이 우리 부부 생활에 너무 간섭을 해요. 어떻게 하면 좋죠?”
나는 빙그레 웃으며 대답해주었다. “할아버지들 많이 오시는 복지관에 다니시게 하셔요.”
한 달쯤 뒤에 그녀가 말했다. “선생님 말씀대로도 했더니 시어머님이 할아버지 한 분을 사귀셔서 우리 부부 생활에 전혀 간섭을 안 해요.”
괴테의 파우스트 박사도 그렇지 않았던가? 모든 학문을 섭렵한 파우스트는 말년에 삶에 대한 깊은 회의를 느껴 자살하려 한다.
그때 메피스토펠레스가 나타나 그를 다시 젊게 해준다. 젊어진 그는 신난다. 사는 게 마냥 즐겁다.
그는 신화 속의 미녀, 헬레나를 만나며 깊은 사랑에 빠진다. 만일 이때 그에게 삶의 의미가 뭐냐고 물으면 그는 뭐라고 답할까?
‘삶의 의미’는 삶이 시큰둥해진 사람이 하는 질문이다. 인생이 항상 통통 튀는 사람은 그런 질문을 하지 않는다.
‘삶아있음’을 잃어버린 사람은 ‘부조리(不條理)’를 느낀다. ‘이 세상은 조리(條理)가 없구나!’
이런 사람들에게 종교는 삶의 의미를 친절하게 가르쳐준다. 왜 사는지? 죽으면 어디로 가는지? 조리 있게 설명해준다.
그런 조리 있는 종교를 믿으며 인류는 오랫동안 살아왔다. 그런데 이제 그런 종교의 조리를 믿는 사람은 별로 없다.
신화학자 조셉 캠벨이 말한 ‘삶의 의미가 아닌 살아있음을 느껴라!’는 이 시대의 화두다 이 말을 풀어야 우리는 이 시대를 잘 살아갈 수가 있다.
이 시대의 고도자본주의는 우리에게 충분히 살아있음을 느끼게 해준다. ‘돈만 많이 버세요!’
자본주의는 우리의 오감을 자극할 온갖 현란한 것들을 뚝딱뚝딱 만들어낸다. 우리는 마냥 즐기면 된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으로 만족할 수 있을까? 곧 깊은 회의감에 젖어든다. ‘이게 제대로 사는 거야?’
그러면 자본주의는 더 자극적인 것을 생산하여 그에게 보여준다. 우리는 점점 말초적인 쾌락에 젖어든다.
하지만 끝내 우리는 우울, 권태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새로운 살아있음’을 찾아내야 한다.
자본주의의 손길이 닿지 않은 천지자연에서 우리는 오감을 여는 연습을 해야 한다. 들판에 나가 오감을 다 열고 가만히 있으면 충만해진다.
충만한 살아있음에서 ‘삶의 의미’가 샘물처럼 솟아난다. 뭐라고 말할 수 없는 삶의 의미가 초현실주의의 그림들처럼 우리 앞에 나타난다.
그것을 굳이 말로 하면 천국, 극락 이런 단어가 될 것이다. 하지만 그건 비유이지 사실적인 천국, 극락이 아니다.
20세기의 철인 비트겐슈타인은 말했다. “인생이 부조리해 보이는 건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신비로운 심오함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숙연히 알아차렸을 때, 인생은 신성한 것이 된다.”
여러 사람을 모아놓고 염라대왕이 물었다.
〔......〕
“천국에 가고 싶은 사람은?”
모두 다 손 들었다.
“지금 천국에 가고 싶은 사람?”
몇 사람이 손 들었을까?
- 에리히 케스트너, <천국보다 좋은 곳> 부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천국보다 좋은 곳’에 살고 있다는 것을. 그러면 그것으로 다 된 것 아닌가?
죽음의 공포란, ‘천국보다 좋은 곳’에 살고 있다는 걸 깜빡 잊었을 때의 망상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