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
항상 깨어 있어라 문제는 늘 내 안의 한 생각이다. - 라마 크리슈나
영국의 인류학자 프레이즈는 그의 저서 ‘황금가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원시인들은 그의 그림자나 영상을 그의 영혼이라고 보거나 어쨌든 자신의 살아있는 부분으로 간주했다.’
그래서 원시인들은 자신의 그림자가 밟히거나 찔리거나 하면 마치 자기 자신의 몸에 상처를 입은 듯이 느꼈다고 한다.
현대과학의 눈으로 보면 참으로 미개하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그들은 그런 사고에 의해 지혜롭게 살아왔다고 생각한다.
‘그림자는 햇빛에 의해 생겨나는 거야.’하고 생각하고 생각하는 현대인들과 ‘그림자는 내 영혼이야.’하고 생각하는 원시인들 중 누가 더 지혜롭게 살아갈까?
원시인들은 자신의 그림자를 자신의 영혼이라고 생각하기에 자신의 그림자가 다치지 않도록 매사에 조심할 것이다.
그에 반해 현대인들은 그림자를 소중히 하지 않기에 실용적인 삶을 살아가는 데는 훨씬 유리할 것이다.
하지만 눈부신 물질문명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과연 행복한가? 행복은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다.
현대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철학, 공리주의에서는 인간의 쾌락이야말로 행복이라고 주장한다. 그들의 구호는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다.
그들은 인간을 동물적 욕구를 가진 존재로 본다. 하지만 인간은 고도의 영적 욕구도 지니고 있다.
이러한 인간의 행복을 어떻게 숫자로 계산할 수 있는가? 그들의 철학은 현대고도자본주의를 옹호하는 이데올로기일 뿐이다.
인간을 소비의 향락에 젖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소비는 인간의 욕구를 만족시키지 못한다.
인간은 물질적 욕구가 충족되면 비물질적인 욕구를 추구하기 때문이다. 마슬로가 얘기했듯이 인간의 욕구는 상승하게 되어 있다.
비물질적인 욕구에 목마른 현대인에게 고도자본주의는 계속 새로운 물질적 욕구를 추구하게 한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허탈하다. 우리나라도 부자들의 자살률이 가난한 사람들의 자살률보다 더 많다고 한다.
우리는 원시인들에게서 삶의 지혜를 배워야 한다. 자신의 그림자 하나도 사랑하는 마음을 배워야 한다.
우리는 효율성을 최고의 가치를 여겨 바쁘게 사는 삶에서 벗어나야 한다. 원시인들처럼 매사에 경건해야 한다.
그러면 일상에서 명상이 이루어진다. 몸의 움직임과 호흡이 일치하게 된다. 자연스레 생각도 그것들과 하나가 된다.
항상 깨어 있는 마음이 된다. 몸과 마음의 건강이 회복될 것이다. 항상 허덕이는 삶에서 충만한 삶으로 바뀔 것이다.
아파트 공터 한 귀퉁이
속도를 잊은 폐타이어
땅속에 반쯤 묻힌 깊은 침묵 속
햇빛을 둥글게 가두어 놓고
동그랗게 누워 있다
그가 그냥 바퀴였을 때는 단지
속도를 섬기는 한 마리 검은 노예일 뿐이었다
날마다 속도에 사육되고
길들어 갔다
다른 속도가 그를 앞질러 갈 때
그는 바르르 떨며
가속 결의를 다져야 했다
〔......〕
그가 속도의 덫에서 풀려나던 날
온몸이 닳도록 달려온 일생을 위로하듯
바람은 그의 몸을 부드럽게 핥아주었다
잠시 뒤의 어떤 바람은 풀씨랑 꽃씨를
데리고 와서 놀아주었다
벌레들의 따뜻한 집이 되었다
잃어버린 속도의 기억 한가운데
초록의 꿈들이 자란다
노란 달맞이꽃은 왕관처럼 환히 피어 있다.
- 김종현, <폐(廢)타이어> 부분
한번 속도의 덫에 갇힌 타이어는 ‘폐(廢)타이어’가 되어서야 풀려날 수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폐인이 되기 전에 속도에서 풀려날 수 있다. 우리의 ‘한 생각’에 의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