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죽음

by 고석근

삶과 죽음


더 이상 자랑스럽게 살 수 없을 때 자랑스럽게 죽는 것, 삶을 부지해가는 것이 남 부끄러운 일일 수 있다. – 프리드리히 니체



코로나 19가 창궐하고 있다. 하루에 사망자가 수백 명이다. 60세 이상 노인들이 사망자의 90%를 넘는다고 한다.


인터넷 댓글에는 노인의 죽음에 대해 안타까워하는 글도 있지만, ‘늙은이가 살아있으면 추하지 않아?’하는 댓글들도 있다.


노인의 반열에 드는 나는 쓴웃음이 나온다. 밖에서 본 그 많은 사람들 중에 나를 보며 ‘저 노인 왜 살아서 돌아다녀?’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라 생각하니 마음이 착잡하다.


현대 철학의 문을 연 니체는 말했다. “더 이상 자랑스럽게 살 수 없을 때 자랑스럽게 죽는 것, 삶을 부지해가는 것이 남 부끄러운 일일 수 있다.”


니체의 말이 잔혹하게 들릴 수 있지만, 우리는 ‘삶과 죽음’에 대해 깊이 사고해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학창 시절에 생명 존중, 특히 인간 생명의 고귀함에 대해 배웠다. 생명은 더 없이 소중하고 신성하다는 것이다.


정말 그럴까? 그런 사고가 코로나 19를 불러왔을 것이다. 인간의 생명, 삶을 위해 마구 지구를 파헤친 결과 태곳적부터 잠자던 바이러스가 인간 세상으로 날아오지 않았는가?


고대의 현인 맹자는 ‘하늘의 뜻에 따르는 자는 흥하고, 그에 반하는 자는 망한다’고 했다.


하늘은 천지자연의 운행 원리다. 인간도 천지자연의 일부라 천지자연의 원리에 따르지 않으면 망한다는 것이다.


‘생명 존중’은 언뜻 보면 고귀한 도덕률 같지만 곰곰이 따져보면, 하늘의 이치를 거스르는 도덕률일 수 있다.

근대산업자본주의가 18,9세기에 인류역사의 무대에 등장하면서, 의료분야에서 ‘위생학’이 등장했다.


그전까지는 인간의 의료의 기본은 ‘양생술’이었다. 몸을 튼튼히 하여 건강을 유지하는 것.


그러다 근대의 의학이 눈부시게 발전하면서, ‘위생학’이 등장한 것이다. 병을 일으키지 않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 아주 중요해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학창 시절에 ‘손 씻기’를 배우며 병을 일으키는 병균, 바이러스들을 악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하지만 인간 세상에 병균, 바이러스가 없는 환경이 가능할까? 그들도 생명체라 생존의 본능이 있다.


그들을 악의 축으로 간주하여 박멸하려는 현대의학, 정말 인간 생명 존중에서 나왔을까?


사실 그건 자본주의의 논리가 아닌가? 인간의 생명이 자본증식의 도구가 되는 것. 우리는 병원에서 태어나 병원을 오가며 살다 병원에서 죽는다.


이제 우리는 현대의학에 기대어 생명을 근근이 유지하게 되어버렸다. ‘오늘도 무사히...... .’ 기도하며 살게 되었다.


니체는 이런 나약한 인간, 천지자연의 이치를 따르지 않는 인간을 단호히 거부하는 것이다.


그는 ‘자랑스럽게 살다 자랑스럽게 죽어라’는 것이다. 사실 인간 외의 모든 생명체가 그렇게 살다 죽지 않는가?

언뜻 보면 ‘노인 혐오’로 보이는 인터넷 댓글들은 우리에게 인간의 삶과 죽음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하게 한다.


인간으로 태어난 우리는 어떻게 인간답게 살다 어떻게 인간답게 죽어야 할까? 인간다운 삶이 없으면 인간다운 죽음도 없다.



사랑은- 생명 이전이고

죽음- 이후이며-

천지창조의 근원이고


- 에밀리 디킨슨, <사랑은 생명 이전이고> 부분



사랑이 충만할 때, 우리는 천지자연의 이치를 예감할 수 있을 것이다. 삶과 죽음에 대해 더 이상 생각조차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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