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의 화장실
좋은 친구관계는 좋은 결혼으로 이어지는 기초가 되기도 한다. 결혼생활에는 우정을 키우는 재능이 반드시 필요하다. - 프리드리히 니체
ㅅ 대학에서 남녀 구분을 없앤 화장실, ‘모두의 화장실’을 설치했다고 한다. ‘여러 계층을 배려한 세심한 구조가 돋보인다’며 호평하기도 하지만, 그게 ‘양성 평등 실현이 되냐’며 강하게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한다.
그 대학에서는 문화제, 대토론회 등을 거쳐 반대 의견을 설득하여 ‘누구나 편하고 안전하게 이용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었다고 한다.
프랑스 정신분석학자 라캉은 ‘남녀는 화장실 입구 차이’라고 했다. 모두의 화장실은 그 화장실 입구차이 마저 없앴으니 진정 전복적인 화장실이다.
라캉은 왜 남녀의 차이라는 게 화장실 입구 차이밖에 없다고 했을까? 그는 ‘남녀라는 허상’에 사로잡혀 사는 우리의 머리에 도끼를 내리친 것이다.
오래 전에 아내가 내게 말한 적이 있다. “자기는 여자에 대한 환상을 갖고 있는 것 같아.”
나는 어린 시절에 남자 형제들만 있는 내가 창피했다. 여자 형제가 있는 친구들이 부러웠다.
항상 논과 밭에서 일하시느라 나이보다 훨씬 늙어 보이는 엄마는 여자로 보이지 않았다.
읍내에 있는 초등학교에서 들어가면서 처음으로 ‘여자’를 봤다. 하얀 얼굴에 늘 향기가 나는 여자 아이들.
그 아이들은 너무나 멀리 있었다. 멀찍이서 그녀들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녀들의 하얀 이가 지금도 뇌리에 깊이 박혀 있다.
초등학교 2학년 때, 담임선생님이 청색의 슬리퍼를 신고 수업을 하셨는데 굵고 하얀 종아리가 지금도 눈에 선하게 남아 있다.
내게 깊이 새겨진 ‘도시 여자’에 대한 환상은 한 평생 나를 지배하고 있다. ‘촌스런 여자’에 대한 거부감과 동시에.
그 뒤 남녀가 구분되는 중학교, 고등학교를 다니며 나의 환상은 더욱더 깊어만 갔던 것 같다.
아마 많은 우리나라 남녀가 나와 같을 것 같다. 서로가 서로를 환상으로 보며 만날 것 같다.
이런 환상 속에서 온갖 엽기적인 사건, 사고가 일어나지 않을까? N 번방 사건 같은 경우가 대표적인 얘가 될 것이다.
남녀가 서로 대등하게 만나지 않으면, 그들의 관계는 ‘사디즘- 마조히즘 관계’가 되어버린다.
겉으로는 멀쩡한 연인, 부부들의 관계가 실제로는 사디즘- 마조히즘 관계가 엄청나게 많지 않은가?
니체는 ‘좋은 친구관계가 좋은 결혼으로 이어진다’고 했다. 우정의 능력이 있어야 좋은 남녀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나는 ㅅ 대학이 처음으로 도전한 ‘모두의 화장실’을 우리 모두 소중히 살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범죄를 걱정하지만, 많은 범죄가 ‘남녀의 환상’ 때문에 생겨나지 않는가? 대학에서 그 환상의 매듭을 풀어야 하지 않겠는가?
오래 전에 범인이 여자들을 납치해 와서 그녀들의 뼈로 미술작품을 만드는 엽기적인 영화를 본 적이 있다.
남녀에 대한 환상은 이리 무섭다. 여성에 대한 환상을 ‘불멸의 여인’으로 승화시킨 고전들도 많다.
12살 소녀, 베아트리체를 보자마자 천상의 여인을 본 단테. 그 소녀는 ‘신곡’의 주인공이 되고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에서도 나타난다.
하지만 환상은 일시적으로는 도움은 될 수 있지만, 크게 보면 인간에게 ‘실제의 삶’을 방해한다.
나는 오랫동안 인문학을 강의하며, 많은 여자 수강생들을 접하며 여자에 대한 환상에서 많이 벗어나고 있다.
실제의 남자, 여자를 만나야 남녀는 무궁무진한 관계로 발전해 나갈 수 있다는 것을 뼈아프게 깨닫는다.
불면 꺼질 듯
꺼져서는 다시 피어날 듯
안개처럼 자욱이 서려있는
꽃.
하나로는 제 모습을 떠올릴 수 없는
무엇이라 이름을 붙일 수도 없는
그런 막연한 안타까움으로 빛깔진
초련(初戀)의
꽃.
〔......〕
아,
우리 처음 만나던 날 가슴에 피어오르던
바로 그
꽃 !
- 이수익, <안개꽃> 부분
우리 가슴엔 누구나 ‘안개꽃’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영원한 사랑’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그건 도피다. 우리는 손을 뻗으면 물컹 만져지는 한 사람을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
그 사람을 통해 신을 만나고 우주의 맨 끝에 닿아야 한다.